76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4)
“……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이 안 나.”
“괜찮아. 아껴 뒀다가 써도 돼.”
엘피는 마치 물건이라도 되는 듯한 트론의 표현을 듣고 실소를 흘렸다.
“알았어. 열심히 고민해서 정말 필요한 거 부탁할게.”
“……응. 그래 주면 기쁘겠어.”
선물을 받은 엘피보다 오히려 더 만족한 듯 트론이 살며시 웃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트론을 독차지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무척 사치스러운 선물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누나가 좋아할 만한 걸 스스로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
“무슨 그런 말이 있어! 이 귀걸이도 정말 예뻐.”
“……매번 보석이나 액세서리를 선물해도, 안 하고 다니니까.”
“아, 아깝잖아! 잃어버리면 어떡해!”
“얼마든지 다시 사 줄 수 있어.”
“됐어, 그 돈으로 론의 커프스단추 하나라도 더 맞추는 게 보람차다고.”
엘피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구두쇠 같은 소리를 했다. 그녀가 항상 트론이 삶의 중심인 양 챙겨 주는 건 기뻤지만, 언제나 본인의 일은 뒷전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관만 해서야 보석이 불쌍하잖아.”
“생각나면 자기 전에 보석함 열고 한참 들여다보고 그래! 그것만으로 왠지 기운도 나고 정말 행복한걸.”
어째서인지 그가 준 선물들은 장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쪼록 올해의 선물은 그녀가 만족할 만한 실용적인 것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엘피는 치롤헷으로 떠난 이후의 공백을 미리 메우기 위해 다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렇게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느샌가 출발하는 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확인할 서류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 앞으로 온 우편을 발견했다.
이나드 자작가의 몰락으로 인해 연고가 없기에, 그녀가 외부에서 받을 만한 우편이라고는 공무 안내 같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봉투를 확인해 보니 개인이 보낸 편지인 듯했다. 소인은 마그달리사 영지의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엘피는 서둘러 봉투를 열었다.
예상대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루베인이었다.
「언니, 잘 지내? 난 별로 못 지내. 숨 쉬는 것도 각하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지금 이 편지도 평소에 잘 대해 주던 하녀한테 부탁한 건데, 중간에 압수당할지도 몰라. 그래서 특별한 이야기는 못 쓸 것 같아.」
루베인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는 문면으로도 느껴졌지만, 그 내용은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엘피는 울적한 기분으로 이어서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본문은 트론과 가이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현재 삼엄한 감시하에 반쯤 연금당한 상태고, 정보가 통제되어 정확한 주변 상황은 파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트론에게 지시받은 일을 중간에 버려 둔 형태가 되어 미안하다며, 자기 대신 고아원을 챙겨 달라고 부탁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엘피는 루베인의 편지를 읽고 죄책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올페마의 호텔에서 루베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무언가 해 줄 것처럼 이야기했던 주제에 정작 자기 일에 치여서 그녀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의 혼담 제안을 거절한 일로, 이제 마그달리사 가문과 트론은 사이가 갈라지게 되었다. 엘피로서는 트론을 위험에 빠뜨린 마그달리사 공작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루베인은 달랐다. 그녀 개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저 공작의 딸이라는 이유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혼담의 도구로서 이용당했을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도 마그달리사 공작은 루베인을 멋대로 또 이용할지 모른다. 그녀가 당했던 취급을 자신의 부친에게 갚아 줄 틈도 없이.
엘피는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가 내려놨다가를 반복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뛰어난 머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트론이라면, 루베인의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트론이 선물로 준 ‘무엇이든 해 주겠다’라는 말을, 루베인을 위해 쓰기로 했다.
***
트론은 담담히 루베인의 편지를 읽은 후 엘피에게 돌려주었다. 엘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무른 생각인 것은 압니다. 이제 마그달리사 공은 전하의 적이 되었고, 루베인과도 관계를 끊으시는 게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는 것도요. 그래도 그 아이를 돕고 싶습니다.”
“…….”
“어려우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저에게는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그 때문에 루베인을 포기하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엘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트론은 찬찬히 그녀를 살폈다.
중요한 순간에, 그녀는 트론의 선의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나약한 일인 양 고뇌하곤 했다. 이전에는 그녀의 선의가 눈부시고도 낯설었지만,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인 것은 맞았다. 언젠가 루베인에게도 했던 이야기지만, 효율적인 방법과 옳은 방법은 동의어가 아니다. 일부러 정치적 리스크를 짊어지고 마그달리사 공작을 섣불리 자극하는 일을 할 메리트는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예전처럼 거북하게 느끼지는 않는다고 하나 루베인은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의 정적이 될 가능성이 큰 이였다. 그런 상대를 굳이 구해 줄 이유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굳이 생일 선물로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트론 역시 루베인을 돕고 싶었다.
그 때문에 루베인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가이의 질문에 애매하게 대답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수하로서 충실하게 일했고, 엘피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랬던 그녀가 혈연에 붙들려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트론 안에서도 무언가가 서서히 변했다.
그것은 분명히, 엘피 덕분이었다.
트론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생일 선물로 쓰는 건 넣어 두고 나중에 더 고민해서 말하도록 해.”
트론의 말을 거절로 받아들인 것인지, 엘피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그는 짧게 덧붙였다.
“마그달리사 영애의 일은 그런 부탁이 아니더라도 내가 어떻게든 하겠다. 어찌 되었거나, 현재 그녀가 그렇게 된 원인에는 내가 보탠 부분도 있으니.”
“왕자님……!”
엘피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트론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피시언 영지로 출발하기 전에 이것저것 미리 준비해야 할 듯하군. 바빠질 것 같지만, 그대에게도 부탁하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시켜만 주세요.”
“응.”
살짝 눈물이 고여 있던 엘피의 얼굴에 어느샌가 해맑은 웃음이 번졌다. 그 뺨에 입 맞추고 눈물을 훔쳐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거리감을 매 순간 자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루베인 일로 마음 아파하던 엘피의 표정이 밝아져서 다행이었다. 그것만은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
보통 각 영지의 중심 도시는 그 영지의 중앙에 위치하게 마련이나, 솔피시언의 중심 도시인 치롤헷은 영지에서도 가장 남부의 바닷가에 인접한 도시였다.
솔피시언은 따뜻한 기후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했지만, 뛰어난 자연 풍경을 위시하여 관광업이 발달한 곳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휴양지인 치롤헷은 6월 중순쯤 된 현재, 벌써 한여름 같은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얀 백사장, 흰 벽돌과 푸른 지붕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조경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번에 트론과 엘피는 르터바이스 가문 소유의 별저에서 지내게 되었다.
가이의 설명에 의하면 최남단인 이곳까지 관광 삼아 가볍게 놀러 가기는 부담스러워서, 정작 가문에서 활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모양이다.
실제로 이동 시간 때문에 가이가 치롤헷에 도착하는 것도 두 사람보다 늦어질 예정이니, 편하게 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르터바이스 별저는 본채와 별채로 나뉘어 있었다. 본채에서 마차를 타고 5분 정도 해변 정원을 가로질러 이동한 곳에 아담한 별채가 위치했다.
별채 앞쪽은 프라이빗 비치가 펼쳐져 있어서, 원할 때 언제든 해수욕을 하러 갈 수 있는 구조였다.
“두 분의 방은 안쪽에 준비했습니다. 모쪼록 편안한 시간 되시길.”
별저를 관리하는 집사가 공손하게 인사한 후 별채에서 물러났다.
엘피는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별저를 보고 감탄했다.
“와, 바다가 한눈에 보여요. 왕자님!”
“응.”
“이렇게 멋진 별저를 놀려 두었다니 정말 아깝네요.”
“……글쎄, 르터바이스에서 관리하는 사람에게 돈은 주고 있을 테니 일자리는 창출되었겠군.”
“왕자님도 차암…….”
엘피는 여느 때처럼 트론의 감흥 없는 대답에 볼을 부풀렸다. 트론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것보다, 먼 거리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쉬어. 누나.”
“으, 응! 이번에는 일정이 좀 느슨한 거였지?”
“응. 마그달리사 공작가를 초청하느라 예정에 없는 파티를 주최하게 되었지만, 그 준비는 르터바이스 쪽에서 진행해 주고 있으니까.”
자세한 계획은 가이가 오면 다시 논의할 예정이지만, 이번에 솔피시언의 지하 경제 루트를 파헤치는 것과 더불어 루베인에게 활약의 장을 만들어 줄 계획이었다.
이후 대대적으로 루베인을 세간에 노출시켜 마그달리사 공작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루베인. 그때 이야기했던 것 꼭 들어줄게.’
수첩으로 확인한 솔피시언 공작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라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아직은 예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때가 오면 제 역할을 해내야겠다고, 엘피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아, 여기가 론의 방인가 봐!”
엘피가 별채의 가장 안쪽에 테라스가 딸린 전망 좋은 방을 가리켰다.
방 안으로 들어선 트론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엘피는 방의 인테리어를 보며 그도 그렇겠구나 생각했다. 커다란 침대에는 공주님 침대처럼 레이스가 달린 천개가 나풀거렸고, 사방에는 생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청소부터 내장까지 무척 신경을 쓴 태가 났지만, 어딜 봐도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침대보랑 이불이라도 교체하라고 지시할까요?”
엘피가 눈치를 보며 묻자, 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런 것으로 번거롭게 할 건 없지. 그대도 들어가서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 있으면 바로 부르시고요.”
“응.”
엘피는 방에서 나온 후 건너편에 있는 문을 열어 보았다. 서재였다. 그 외 차례대로 눈에 보이는 문들을 열었으나 다용도실, 응접실, 티룸, 욕실과 통해 있는 투왈렛룸이었다.
“……어, 어라?”
트론의 방 외에는 별채 안에 침실이라고 할 만한 방이 없었다.
그러면 미리 부쳐놓은 자신의 짐은 어디 있는 것일까. 본채의 사용인 거처로 가야 하나.
엘피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으려니, 바깥의 부산한 낌새를 이상하게 여긴 듯 트론이 복도로 나왔다.
“왜 그러지?”
“어……. 전하, 별채 안에 제 방이 없어요. 본채에서 지내야 하나 봐요. 그렇지만 전하의 시중을 들기에는 너무 먼데…….”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히 아까 물러난 집사는 ‘두 사람의 방’을 안쪽에 준비했다고 말했다.
순간, 짐작 가는 것이 있어 트론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붙어 있는 드레스룸 겸 창고를 열었다.
“…….”
트론의 짐과 더불어 엘피의 짐이 가지런히 수납되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부부 침실 같은 분위기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십중팔구, 가이가 사용인들에게 두 사람의 숙소를 한 방에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