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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75화 (75/132)

75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3)

그녀에게 안기자마자 달콤한 엘피 특유의 체향이 훅 느껴졌다.

엘피가 그를 향해 무게를 실어 기댈수록, 완연히 여인이 된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몸에 닿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온몸의 신경이 엘피를 향해 쏠려 있었다. 더 만지고 싶어지는 것을 참는 게 고작이었다.

엘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잠꼬대를 약간 더 웅얼거리다가, 이윽고 숨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천천히 몸을 떼어 보니, 그 얼굴은 무언가 만족한 듯 평안해 보였다.

트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 사방으로 흩어진 서류를 주워 올려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엘피의 어깨까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뜻하지 않은 기습 때문에 온몸이 뜨거워졌지만, 어떻게든 억누를 수 있었다.

엘피가 무방비한 상태로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가 조금 가슴 아프기도 했다.

그녀는 트론 때문에 해를 입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을 동생으로서 편히 생각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맙고 애틋한 동시에 무척 미안했다.

자신의 감정은 이미 엘피와 동일하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새카만 충동이 그녀를 덮칠지도 모른다.

“……잘 자, 누나.”

그런 심정을 갈무리하듯 일부러 소리 내어 누나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후, 그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정작 트론 본인은 바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

“……어, 라?”

새벽에 애매하게 일어난 엘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류를 보면서 일을 한 게 마지막인데, 어째서인지 담요를 덮고 푹 자고 있었다.

머리맡의 등불을 켜 보니, 보고 있던 서류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잠결에 정리했나?”

기억을 더듬던 엘피는 그러고 보니 트론이 나오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트론을 안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꽉 껴안은 채 그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엘피는 사색이 되었다.

“……서, 설마. 왕자님이 오셨었나?”

자신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걱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트론의 저녁을 챙겼어야 했는데, 깜빡 잠이 들어 버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르터바이스 영지에서 데니옴으로 돌아온 후 쌓여 있던 일을 처리하느라 무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피로가 누적되었던 모양이었다.

트론이 실망하지는 않았을까. 물론 그는 항상 자상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무능하다거나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는 않았다.

‘전하께서 주의도 주셨는데 껴안기나 하고……!’

잠결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라 화끈거렸다.

엘피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또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트론과 닿았는데 정작 제대로 기억을 못 하는 게 아쉽기도 했다.

‘……회귀 전에는 론이 삐칠 때마다 스킨십을 하면 마음을 풀어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더 좋아했나 봐.’

잠결에 잠깐 안은 것으로는 부족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차피 저질러 버린 거, 1시간 정도 아무것도 안 하고 트론을 꼭 껴안을 걸 그랬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트론이 절도를 지키자고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왕자님도 이제 성인이니까……. 곧 혼인도 하실 테고.’

엘피는 언뜻 들리는 자신의 뒷소문을 알고 있었다. 신분이 낮은 주제에 시녀장 자리를 꿰찬 이유가 트론의 정부이기 때문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본인이 떳떳하고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론에게 폐가 간다면 그건 다른 문제였다.

차라리 정말로 친남매였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뭔가 마음속에서 딱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인 론이 아니라, 존경하는 주군인 트론 스레데니옴의 면모 역시 좋았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지만, 트론은 훌륭하게 성장했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엘피에게는 트론이 더없이 소중했다.

회귀 전에 남매처럼 친근하게 지내던 시절이 길어서 너무 격의 없는 태도를 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트론은 엘피만의 동생보다는 스레데니옴 왕국의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 원래대로라면 범접하기도 힘들었을 그의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닐까.

‘……처음에 갓 회귀했을 때는 미움 받아도 괜찮다고 했던 주제에. 욕심이 커졌나 봐.’

엘피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으며 베개에서 얼굴을 뗐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어제 확인하지 못했던 서류나 읽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공중에서 연분홍색의 전서구가 나타나 바쁘게 엘피의 근처를 빙빙 돌았다.

“아일란? 왜 그래?”

아일란은 엘피를 책망하듯 그녀의 어깨에 앉아 볼을 부리로 콕콕 찍었다.

아일란의 주변을 보니 연보라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체가 여러 개 붙어 있었다. 엘피는 화들짝 놀라 그 구체를 건드렸다.

[……엘. 연락 못 받는 상황인가? 확인하는 대로 연락해 줘.]

엘피가 잠들어 있는 동안 아나이테를 통해 트론이 남겨 놓은 음성이었다.

엘피는 어쩔 줄 몰라 트론이 남긴 다른 음성들을 들었다. 점차 목소리에 걱정이 깊어지는 것 같더니, 찾으러 가겠다는 짤막한 메시지로 이어졌다.

“아, 진짜 죄송해서 어떡해.”

엘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일란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그녀를 재촉했다. 엘피는 조심스럽게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 음성을 들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푹 자고 일어나면 언제든지 연락해.]

아마도 방에 와서 엘피가 자는 걸 확인한 다음에 남긴 모양이었다.

엘피는 열없는 마음에 애꿎은 아일란을 붙들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아일란이 불만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항의해서 바로 놓아주었다.

“……왕자님, 주무시겠지.”

언제든지 연락하라곤 했지만, 이런 새벽에 깨울 수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아침에 약한 사람인데 잠을 설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엘피는 한숨을 폭 내쉬고 방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가 등불을 켰다. 아일란이 마치 ‘연락 안 할 거야?’라고 묻는 것처럼 엘피의 주변을 빙글빙글 날았다.

“들어가, 아일란. 왕자님한테 방해가 될 거야.”

실망한 듯한 소리를 내며 아일란이 공중으로 녹아 들어갔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엘피 본인이 가장 아쉬웠다. 예전처럼 트론의 아침 담당이 자신이었다면 가장 먼저 그의 얼굴을 보러 가기라도 할 텐데 이제 그럴 수도 없었다.

그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도 아니건만, 무척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허전했다.

***

“전하,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트론의 오전 회의가 끝나는 것에 맞춰 그를 맞이한 엘피가 우물쭈물 사과했다. 집무실 책상에 앉으며 트론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죄송할 일이 있는가?”

“그게, 전하께서 부르셨는데 듣지도 못하고 쿨쿨 잠이나 자고……. 게다가 걱정하셔서 일부러 와 주셨는데, 저기…….”

그것도 모자라 멋대로 트론을 껴안기까지 했다. 하지만 쑥스러운 마음에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아픈 건 아니지? 많이 피곤했던 것 같은데, 푹 쉬었나?”

“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앞으로 왕자님을 보좌할 때 그렇게 미숙한 모습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전하의 신하인걸요.”

엘피가 각오를 담아 딱딱하게 말하자 트론이 조금 서글픈 듯 웃었다.

“응, 무리하지는 말고.”

“……?”

르터바이스 영지에서 돌아온 뒤로 트론의 표정이 쓸쓸해 보일 때가 많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미세한 차이겠지만, 엘피에게는 그게 느껴졌다.

뭔가 트론이 고민거리를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나중에 사먼에게 트론이 뒤에서 진행하는 일이 없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보다…… 르터바이스에 다녀오느라 고생했는데, 미안하게 됐군. 6월에 또 이동해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나요?”

“솔피시언의 치롤헷으로.”

엘피는 퍼뜩 고개를 들며 자세를 바로 했다.

“혹시, 세틱스 전하와 관련해서 뭔가 나왔나요?”

“그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지난번 마수 토벌과 관련된 사고의 배후에 마그달리사뿐만 아니라 솔피시언도 있었던 것 같다. 뒤를 캐볼 겸, 그때의 빚을 갚아 줄까 하고.”

엘피는 굳게 끄덕였다. 원작에서 솔피시언은 세틱스의 배후에 있다가 트론에게 일찍 처단당한 단역이었지만,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가 트론을 방해하기 시작했다면, 엘피도 라이샤로서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내야 했다.

‘……지난번처럼 존재가 사라지는 패널티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왕자님이 우선이야.’

엘피는 손을 꽉 쥐며 다시금 속으로 다짐했다. 솔피시언이나 세틱스와 관련하여 잊은 부분이 없는지 원작 내용을 적은 수첩도 다시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더 지시하실 일 있으실까요?”

“지시는 아니고……. 누나.”

친근해진 그의 음성에 엘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살며시 미소했다.

“응, 론.”

“오늘 누나 생일이잖아.”

“아, 그랬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

“……그런 건 잊지 마.”

“후후, 괜찮아. 론의 생일은 절대 안 잊으니까!”

트론은 엘피의 반응에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왕궁에서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크게 무언가 해 주지 못하는 거 미안해. 대신 치롤헷에 가면 정찬 자리 마련할게. 르터바이스 소백작도 온다고 했고.”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론도 참 세심해.”

“그렇진 않아. 누나야말로 매년 내 생일 챙긴다고 항상 난리잖아. 그 정도는 하게 해 줘.”

“응, 알았어. 고마워.”

트론은 눈매를 부드럽게 하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 얼굴을 보고 마음이 따스해졌지만, 한편으로 이전 같았으면 그가 자신을 쓰다듬거나 안아 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스쳤다.

그래도 닿지 못하는 것뿐, 그는 여전히 엘피에게 다정한 동생이었다. 냉철하고 엄격한 군주의 모습 이면의 상냥한 면모를 접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그 사실에 조금 우월감이 느껴졌다.

“생일 축하해. 이건, 선물.”

트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벨벳 천으로 감싼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엘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상자를 받아 들었다.

“열어 봐도 돼?”

“응. 매번 신통치 못한 물건이라 미안하지만.”

“전혀 안 그래!”

뚜껑을 열어 보니 루비가 달린 고급스러운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루비 자체의 높은 퀄리티를 살린 심플하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얼마 전에 드레스도 잔뜩 받아서, 또 이렇게 과분한 선물 받는 건 사치 같은데.”

“역시 별로야……?”

트론이 드물게 풀죽은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엘피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트론에게 받는 것이라면 길가의 돌멩이라고 해도 기뻤다. 그저, 매번 값비싼 물건을 받는 것이 미안했을 따름이다.

“전혀 안 그래! 그냥, 매번 너무 비싼 걸 받으니까 미안해서.”

“값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누나가 좋아할 만한 걸 주고 싶어. 어렵네.”

잠시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하던 트론은 천천히 엘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식 선물은 이거 말고, 다른 것으로 할래.”

“으응? 이것만으로 충분한데?”

“내가 성에 안 차서.”

트론은 버릇처럼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려다가 순간 깨닫고 손을 내렸다.

“엘이 바라는 걸 뭐든 말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게.”

“어어……?”

그 말에 엘피는 기시감이 들었다. 회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터바이스 본저에서 사용인으로 위장하던 시절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트론은 그녀에게 보수를 주지 못한 것 같다며, 엘피가 바라는 걸 들어주겠다고 했다.

“내 생일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것처럼, 그러지 말고. 정말로 엘이 바라는 걸 말해 줬으면 해. 물건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들어줄 거니까.”

엘피의 생각을 먼저 가로채듯 트론이 잘라 말했다. 아무래도 그때 생일을 물었던 것도 딱히 바라는 걸 들어준 축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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