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2)
아나이테가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걱정된다는 듯 부리로 트론의 손등을 콕콕 찍었다.
전서구의 목깃을 쓰다듬으며 트론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왕궁 내의 엘피에 대한 평판을 모은 내용이었다.
그동안은 중요한 정보가 아니라 트론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뿐, 왕궁 내에서도 추잡한 뜬소문이 있었다.
엘피를 두고 쉬쉬하며 트론의 비공식적인 정부라느니, 베갯머리송사를 한다느니 떠드는 소리였다. 아마도 자신의 무의식적인 태도가 그런 오해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엘피는 그저 열심히 자기 일을 하며 나를 동생으로 아껴 주는 것뿐인데.’
낮은 신분 때문에 무시당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그녀의 성실함에 자신이 먹칠을 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트론은 서류를 가루로 만든 후 책상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아침 시중을 드는 시종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탓에 잠이 부족했다.
아나이테가 꾸르륵 소리를 내며 트론의 뺨에 몸을 비볐다.
반투명한 새의 깃이 부드러웠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자신을 걱정할 때마다 뺨을 쓸어 주던 엘피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 감촉마저 점차 잊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끔찍한 기분을 맛보았다.
“……선물, 뭐가 좋을까. 아나이테.”
당연하게도 의견을 낼 수 없는 아나이테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트론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잡아당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나무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짙은 남색의 통장갑이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손보다 한참 작아져서 낄 수 없지만, 엘피와 맞이했던 첫 번째 생일에 받은 선물이었다. 그때의 기뻤던 기분이 아직도 선명했다. 자신도 그만큼 그녀가 기뻐할 만한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통장갑의 질 좋은 가죽은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광택이 반지르르했다.
나중에 가이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엘피는 이 선물을 위해 당시의 전 재산을 털어 넣었다는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에게 받은 것들을 갚을 수 없었다.
트론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잠깐 고민하는 시간도 사치였다. 이제 곧 내무부 회의가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을 불렀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시 전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떠나야 했다.
‘전하, 이기고 오셔야 해요!’ 같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그를 격려하던 엘피가 옆에 없는 상황에서, 기운을 끌어내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
스레데니옴 왕국은 내무부와 외무부로 관료 체계가 나뉜다.
왕국의 내치는 공작을 위시한 각 영지가 지방 자치 체계를 구축하고 있기는 하나, 공통적인 법과 치안으로 묶인 이상 내무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무척 많았다.
관료는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후계자 외의 귀족 자녀들이 목표로 하는 자리였다. 세습은 되지 않지만 ‘중앙 귀족’으로 수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전하.”
재상이 서류를 넘기며 트론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재상은 특히 중앙 귀족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지위 중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였다.
현 재상인 헤즐 아크발은 3년 전 ‘데니옴 회의’ 이후 새로 발탁된 재상이었다. 트론이 일부러 힘써서 헤럴드의 입김이 닿지 않는 인물을 골라 위로 올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능력과 중립적인 태도를 높게 산 인선이었을 뿐, 내무부를 마음대로 장악하려는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라블미를 위시한 헤럴드 측에서 그걸 두고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트론의 의도는 맞아떨어져, 현재 관료는 중립적으로 나라의 행정을 굴리는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왕이 존재하지 않는 비상 체계에서 안정적으로 국정 운영이 이루어지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다.
국왕 권한 대행은 트론과 헤럴드 두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 세부적인 국정을 돌보는 것은 트론 한 사람의 몫이었다.
헤럴드는 본인의 이권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고집을 부리거나 트집을 잡곤 했으나, 그 외에 복잡하고 자잘한 일들은 모두 트론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관료들은 실질적인 상사를 트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무척 성실하고 똑똑한 상사였으나,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토목 공사 수주 대금에서 인건비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어 있는데.”
“전하, 이는 기존의 공사를 살펴봐도 평균적인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그전에도 인력을 쥐어짰다는 이야기겠지?”
트론은 본인이 따로 작성해 온 서류를 재상 쪽으로 넘겼다.
“실제 인원수와 투입될 시간을 계산하면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터무니없을 정도야. 예산을 아끼는 것에 대해 토를 다는 것이 아니다. 아껴야 할 곳과 아끼지 말아야 할 곳에 구분을 두자는 것이다. 인력을 쥐어짜서 나올 건 부실한 결과물뿐이다. 그대가 말하는 평균적인 인건비를 사용한 공사들 역시 사고나 부실시공이 많았어.”
“하오나…….”
“부자재 공급 예산 중 수입 물품으로 인한 예산 초과가 지나치게 많아 보이더군. 공급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공정성이 의심된다. 중간에 예산을 가로챈 자가 없는지 조사해. 거기서 예산이 확보된 만큼 인건비를 늘리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트론에게 올린 안건 중 허술한 부분이 있으면 득달같이 지적이 날아왔다. 그는 모든 안건을 허투루 보는 경우가 없이 모두 꼼꼼하게 검토했다. 거시적인 방향성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었으나, 이렇게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놓치는 점이 없었다.
실무진에게 트론의 존재는 오늘 또 무슨 일로 혼나게 될까 걱정이 되는 무서운 상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월에 솔피시언으로 시찰을 가실 계획이신지요, 전하.”
“그래. 바로 얼마 전에 최북단 르터바이스에 다녀왔으니, 남쪽도 가보는 것이 형평성에도 맞겠지.”
“르터바이스에서는 큰일 때문에 쉬시지도 못하셨으니까요. 솔피시언은 휴양지로도 이름 높은 곳이니, 시찰 겸 푹 쉬시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르터바이스에서 있었던 마수 토벌 사태는 밖으로 큰 소문이 돌지 않도록 무마했다.
‘비가 와서 산사태가 있었고 그 영향으로 마수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서 위험성을 생각하여 행사를 중지했다. 트론 전하와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슬기롭게 대처하여 큰일은 없었다’ 정도로 외부에 알려졌다.
솔피시언 영지에 한가하게 휴양을 겸한 시찰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자신을 생각해서 말해 주는 신하들에게 초를 칠 생각은 없었다.
트론은 건성으로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터바이스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리를 비우게 되어 미안하다. 부재중에 차질 없도록 필요한 안건은 모두 처리하고 갈 테니, 그전까지 상신하도록.”
트론이 솔피시언으로 떠나기 전까지 철야와 야근을 예감하며 관료들은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트론이 떠나 있는 동안은 몸과 마음이 편해지리라 위안 삼았다.
***
바쁜 일과를 끝내고 트론은 집무실로 돌아와 또 한참 서류를 검토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샌가 바깥이 캄캄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를 넘기고 있었다. 일하는 동안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더니, 시종들이 저녁을 드시겠느냐는 소리도 못 한 모양이었다.
일단 보고 있던 문건 하나가 일단락 났기에 트론은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도 간이식으로 대충 때웠고, 저녁까지 제대로 안 먹으면 분명히 엘피가 걱정할 것이다.
솔피시언의 중심 도시인 치롤헷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전해야 하니 저녁을 챙겨달라고 요청할 겸 그녀를 부르기로 했다.
“……아나이테. 아일란을 불러 줘.”
연보라색 전서구가 파닥이며 트론의 명령을 수행하려 했다. 하지만 몇 번 공중을 빙빙 돌던 아나이테가 포기한 듯 트론의 어깨에 앉았다.
“답변이 없나?”
다른 일을 하고 있나 싶어서 시간 간격을 두고 몇 번 더 불러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엘피는 언제나 트론의 호출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했다. 왕자궁 안의 보안은 철저하게 챙기고 있으므로 만일의 사태는 없겠지만, 그래도 답변을 못 하는 상황에 처한 것 아닌지 불안해졌다. 르터바이스 협곡에서 그녀가 갑자기 사라졌던 일이 그의 불안을 더했다.
트론은 바쁜 걸음으로 엘피가 업무용으로 주로 쓰는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시종들에게 엘피의 행방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일부러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엘피의 방으로 갔다. 노크를 했지만 역시 답변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트론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엘피가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침대 위에 서류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아일란이 엘피의 근처를 안절부절못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까 트론의 호출 때문에 나타났다가 엘피가 잠들어 있어 갈피를 못 잡은 모양이었다.
아일란은 트론을 발견하자마자 날아와 그의 정수리에 앉았다. 트론은 전서구를 붙잡아 품에 안은 후 달래듯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일란은 구구 소리를 낸 후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라졌다.
“……저렇게 자면 불편할 텐데.”
엘피에게 무슨 일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나가면 그만일 텐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트론은 지금과는 반대의 상황이었지만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가 밤새워 일하다가 소파에서 잠들었을 때, 엘피가 낑낑거리며 그의 자세를 바꾸려다가 실패했다던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정작 트론 본인은 열에 취해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엘피와 다르게 얼마든지 그녀를 들어 올릴 수도 있고, 자세를 바꿔서 편하게 해 줄 수도 있지만, 허락 없이 닿는 것은 꺼려졌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소리를 죽여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자세를 숙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금빛의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 뺨과 목덜미에 걸쳐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엘피의 얼굴은 평소보다 앳돼 보였다. 옅은 핑크빛이 도는 뺨이 부드러워 보였다.
시선으로 그녀를 훑다가 살며시 벌리고 있는 입술에 닿았을 때 트론은 눈을 돌렸다.
역시 오랜 시간 그녀의 방에 머물러 있을수록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심 없이 침대에 눕혀만 준 후 곧장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트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을 받치고 다른 팔로 무릎 뒤를 받친 뒤 침대에 바로 눕게 해 주었다.
자세만 바꿔 주고 팔을 빼려고 했을 때, 엘피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론?”
“아…….”
트론은 당황하여 몸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트론을 안았다.
“론이다……!”
잠이 덜 깼는지 어딘지 어눌한 말투로 외치고는 트론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트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완전히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