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존중과 넘어갈 수 없는 선 (1)
트론은 회귀 전에 가끔 1∼2주 정도 집을 비우고 어딘가 다녀올 때가 있었다.
엘피는 당시에 그가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다녀온다는 말에 크게 의문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의문을 느끼지 못한 것도 트론의 주술에 의한 암시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한 번은 트론이 거의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웠다.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얼굴을 못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엘피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누나, 다녀왔어.”
“……론!”
엘피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현관으로 뛰어갔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전보다 마른 것 같았다.
식욕이 희박한 편이니,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끼니를 거른 것은 아닐까. 한참 얼굴을 보지 못한 서러움이 더해져 마음이 북받쳤다.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내가 항상 잘 챙겨 먹고 다니랬는데.”
“잘 챙겨 먹었어.”
“거짓말쟁이!”
그녀는 트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는 엘피를 달래듯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제야 엘피는 주먹을 멈추고 코를 훌쩍였다.
“……쓸쓸했어.”
“응. 보고 싶었어, 누나.”
“나도…….”
트론은 살짝 흘러나온 그녀의 눈물을 입술로 조심스럽게 훑었다. 이어서 엘피의 콧등과 뺨에 입 맞추었다가 몸을 떼었다.
엘피는 간지러운 듯 눈을 찡그렸다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이젠 론이 나보다 한참 커서 발돋움을 해도 얼굴이 안 닿아.”
엘피의 투정을 듣고 트론이 작게 웃으며 몸을 숙여 주었다. 엘피는 트론의 이마에 키스한 다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힘들었지? 푹 쉬어.”
“괜찮아. 누나 얼굴 보니까 피로가 다 풀린 것 같아.”
“그런 게 어딨어. 얼른 자.”
트론은 그 말을 무시하듯 가볍게 엘피를 안아 올렸다.
“피곤한 애가 왜 무거운 짐을 들고 그래!”
“괜찮다니까.”
그는 엘피를 안고 그녀의 침실에 도착해서야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트론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엘피가 팔을 뻗어 그의 볼을 꼬집었다.
“하여간 말 안 들어.”
“엘이야말로 내가 괜찮다는 말 안 믿잖아.”
트론은 엘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박았다.
엘피가 툴툴거리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와 이렇게 아이처럼 장난치는 시간이 행복했다. 한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오랜만에 닿는 트론의 온기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론이 부족했나 봐.”
트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부족하다고?”
“한 달이나 얼굴 못 봤잖아.”
엘피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트론 특유의 청량한 향이 한가득 퍼졌다. 그것만으로 무척 안심이 되었다.
“……난 떨어져 있지 않아도 항상 엘이 부족한데.”
“우리 론이 너무 어리광쟁이라 누나가 걱정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엘피는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순간순간이 기뻤다.
처음에 그와 도망치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지만, 그녀의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서로의 온기에 의지하여 여유롭지는 않지만 소박한 삶을 보내는 현재가 더없이 행복했다.
엘피가 몸을 밀착하며 꽉 안자, 어째서인지 트론이 움찔하고 굳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곤 엘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누나야말로 푹 자.”
“벌써 가는 거야?”
“나 보고 얼른 자라며.”
“같이 잘래?”
엘피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비어 있는 침대 옆을 두드렸다.
“…….”
트론의 얼굴에 굉장히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이윽고 돌아온 건 커다란 한숨이었다.
“……?”
“누나한테는 내가 정말 가족이구나.”
“당연하지!”
이나드 자작가의 가족들이 사라진 그녀에게 있어, 트론은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 남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시작했던 남매 행세는 어느샌가 진실인 것처럼 변해 갔다.
엘피는 사려 깊고 다정한 그가 좋았다. 가족답게 가까운 거리를 공유하는 이런 시간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맞닿아 있는 온기가 떨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호, 혹시 론은 안 그래……? 나한테 억지로 맞춰 주고 있는 거야?”
그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어쩌나, 덜컥 무서워졌다.
트론은 엘피의 걱정 가득한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엘이 정말 소중해. 가족으로 생각해 주는 것도 기뻐. 하지만…….”
“……?”
“……아냐, 아무것도. 주무시기나 하세요. 좁은 침대에서 둘이 어떻게 같이 자.”
“알았어. 잘 자, 론.”
“응. 잘 자. ……누나.”
그가 불을 끄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엘피는 눈을 감았다.
트론이 마지막으로 하려다 만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내일 물어보면 될까.
다음 날 아침 물어보려 했으나, 어느샌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의문이 날아가 있었다.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아침이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피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꿈을 되새기며 작게 웅얼거렸다.
“……론.”
오랜만에 꾸는 회귀 전의 꿈이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무척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트론이 서로 절도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한 이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직접 닿지 못하는 것뿐, 트론은 둘이 있을 때 다정하게 자신을 누나라고 불러 주었다. 엘피도 그를 걱정하며 챙기는 것은 변함없었다. 스킨십이 없는 것 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바뀐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아침에 일어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제 트론을 깨우는 것도, 아침에 시중을 드는 것도 자신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우울해졌다.
트론이 잠투정을 부리지는 않을까. 다른 하녀가 잠이 덜 깬 그 애의 얼굴을 보는 걸까. 그 생각을 하니 또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신은 생각 이상으로 그의 품에 꽉 안겨, 청량한 향에 둘러싸이는 시간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지금 상태를 따지자면, 아마도 ‘트론 부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 듯했다.
“……나도 참.”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주제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엘피는 자신의 생각에 실소하며 몸을 일으켰다. 트론의 방에는 가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시녀장인 엘피가 할 일은 쌓여 있었다. 올페마에 다녀오느라 왕궁을 비웠기에 그동안 쌓인 일도 많았다.
“됐어. 일하자, 일.”
엘피는 자신을 격려하듯 중얼거리며 침대를 나섰다.
***
[전하께서 짐작하신 것처럼 솔피시언과 마그달리사가 손을 잡았습니다. 말러 전하나 세틱스 전하를 숨겨 두고 있는 것도 확실해 보입니다만, 그 부분은 아직 추적 중입니다.]
가이가 조사 결과를 정리하여 트론에게 전했다. 트론은 서류를 넘기며 끄덕였다.
“그쪽도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형님들의 행방은 계속 조사를 진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 솔피시언과 마그달리사는 그대로 두시나요?]
“아마 그쪽은 내가 암살 시도를 할 거라고 예측할 거다. 저번 일의 앙갚음을 하려고.”
[네, 솔직히 저도 마수 토벌 때의 일은 분하고, 갚아 주고 싶긴 합니다.]
가이의 목소리가 드물게 가라앉아 있었다. 트론은 아나이테의 반투명한 정수리를 쓰다듬듯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른 쪽을 노리도록 하지.”
[다른 쪽이요?]
“돈줄에 타격을 주는 방법이다. 물론 표면적인 사업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그대도 알겠지.”
[……아, 솔피시언이 지하 경제에 손대고 있는 부분 말씀이군요.]
“응. 그걸 위해 조만간 솔피시언의 중심 도시인 치롤헷에 갈까 한다.”
[그럼 저도 동행하지요. 이제 슬슬 저희 각하도 업무에 복귀하고 계시니까, 제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자세한 사안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
[네. ……마그달리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동안은 두고 보겠다.”
트론의 답변을 듣고 가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트론 전하께서 자신의 딸을 거절한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아요.]
“딱히 마그달리사 영애에게 문제가 있어서 거절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래서 공작은 전하를 배신한 것에 스스로 당위를 부여한 모양입니다. 뭐, 당장 처필하고도 자존심 싸움으로 기를 세우던 사람이니까요.]
“배신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으니. 마그달리사는 그저 계산하다가 상대방에게 붙었을 뿐이야.”
[그렇긴 하죠……. 이제 루베인 님은 어쩌실 겁니까?]
애매한 중립 상태를 표방하던 마그달리사는 이제 완전히 트론의 적으로 돌아섰다.
이전에는 루베인이 비공식적으로 트론과 왕래하며 그의 일을 도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베인 개인의 심정과 무관하게 그녀의 가문은 트론과 적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어차피 그녀와는 처음부터 시한부 협력이었다. 그녀가 가족 때문에 나를 더 돕지 않겠다고 해도 그뿐인 이야기지.”
[……혹시 혼담을 거절한 일 때문에 부채감을 느끼고 계신가요?]
“그녀 본인이 혼담 건을 알았다면 펄펄 뛰며 먼저 거절했을 일 아닌가. 부채감이랄 것도 없다.”
[으음.]
가이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루베인 님에게 연락이 오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마그달리사 공작이라면 그녀 본인이 모르는 새에 도청 장치 같은 것을 달아 뒀을 가능성도 있다.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유념하도록.”
[네네. 지시 사항은 그 정도이실까요?]
“응. 수고했다. 들어가 봐.”
[아뇨, 다른 이야기 하려고요. 엘피 님 생일, 내일이죠?]
엘피의 생일은 5월 13일이었다. 5월 초에 있었던 마수 토벌을 끝내고 데니옴 왕궁으로 돌아오고 나니 어느샌가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있었다.
[전 올페마에서 생일 선물 미리 드렸는데, 전하께서는 뭐 생각하고 계세요?]
“글쎄……. 매년 뭘 줘도 기쁘다는 반응이라서. 일단 예년처럼 액세서리는 준비했지만, 썩 마음에 차지는 않는군.”
지난 3년간 트론은 가이의 도움을 받아서 엘피에게 보석이나 액세서리같이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것들을 골라서 주었다.
엘피는 선물들을 받고 항상 기뻐했으나, 정작 아낀다고 보관해 두기만 했다.
그녀 나름대로는 소중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 테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매번 선물이 비슷비슷했으니, 좀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때요!]
“다른 쪽?”
[네. 이제 왕자님도 성인이잖아요. 슬슬 마음을 정하실 때 아닌가 싶은데.]
“마음?”
[엘피 님의 열아홉 생일에 맞춰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한다거나?]
“…….”
트론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이는 언제나 농담 삼아 둘의 사이를 가지고 장난을 치곤 했지만, 이제는 웃어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는 그런 이야기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녀에게 실례다.”
[……어라? 전하, 엘피 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런 것 없다. 내 위치에서 그런 소리는 농담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소백작.”
[잠깐만요, 전하 그…….]
트론은 가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연락을 끊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