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8)
“전하. 저 왔습니다.”
트론의 집무실에 못마땅한 얼굴로 들어온 것은, 변경백의 부군인 바실리였다. 트론은 끄덕이며 자리를 권했다.
“변경백과 애정 확인은 충분히 했나.”
“충분하진 않지만, 뭐 됐습니다. 밀리엔의 건강 관리 이야기라면 중요하니까요.”
“응, 그래.”
트론은 바실리와 전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몸속의 중요 기관을 마법으로 대체했으나 당분간 주시하여 기능이 폭주하는 경우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거나, 정기적인 검사 결과를 트론에게도 공유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대략적인 정리를 마치고 트론의 이야기를 메모해 둔 바실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밀리엔에게 가보지요.”
바실리는 한시가 아까운 양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그대는 참으로 변경백을 아끼는군.”
“네. 사랑하고 있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즉답이 튀어나왔다.
“예전에 그대의 아들이 그랬거든. 변경백이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 같다고.”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트론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상한 데에서 장단이 잘 맞는 부자였다.
“부부 두 사람의 성격이 무척 다른데 사이가 좋아서, 나도 신기하긴 해.”
“저로서는 밀리엔의 남자 보는 눈이 없는 점에 감사하고 있지만요. 그나저나 잡담이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명령입니까?”
“……아니. 붙잡아서 미안했다. 나중에 데니옴에 돌아가기 전에 잠깐 인사라도 하지. 돌아가도록 해.”
“으음.”
바실리는 색소가 옅은 자신의 갈색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동작이 묘하게 가이와 닮아 있었다.
“전하께서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건 알겠습니다. 도움을 받았으니 잠깐 시간을 내드리지 못할 것도 없지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왕자를 상대로 굉장히 거만하게 들렸으나, 트론은 그가 호의에서 꺼낸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저,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부부 관계가 되어 긴 시간을 함께 사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을 따름이다.”
“전하도 결혼하시게요?”
“나는 혼인 생각이 없다.”
“흐응.”
바실리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겁니다.”
“운?”
“네. 그럭저럭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난 덕에 후계자가 되지 않고 정략결혼으로 팔려갈 수 있었고, 운 좋게도 그 상대가 밀리엔이었으니까요. 세상에 다시없을 행운이죠.”
“정혼자가 아니라 다른 관계로 만날 수도 있었지 않은가.”
“그럼 밀리엔은 아마 다른 정혼자랑 또 성실하게 관계를 쌓았겠죠? 하지만 저는 나중에라도 밀리엔을 발견해서 사랑에 빠졌을 것 같습니다.”
무척 로맨틱하게 들렸지만, 이어진 바실리의 말은 어딘지 차가웠다.
“정혼자가 아닌 저를 밀리엔이 거들떠보았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럼 저는 본인이 바라지도 않는데 그녀에게 달려들다가, 글쎄요, 변경백 후계자를 능욕한 죄로 목이라도 잘렸겠지요.”
“…….”
“전하께서 무엇을 고민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없습니다. 혼인하시지 않겠다는 것도 무언가 고민해서 내리신 선택이겠죠. 저라면 상대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옆에 앉혀 두었겠지만요.”
“변경백을?”
“밀리엔에게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저, 과거의 저라면 그랬을 거라는 겁니다.”
바실리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말끔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바로 그게 제가 운이 좋았던 증거입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응.”
바실리가 나가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트론은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실 창문으로 다가갔다. 봄비가 온 후 눈에 띄게 푸르러진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엘피의 목소리였다. 트론은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래. 들어와.”
이미 결론은 나왔다. 실행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는 고요한 결심과 함께 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
“이번 일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세틱스 전하는 무척 모시기 힘든 주군이었지요?”
보랏빛 머리의 청년, 솔피시언 공작이 요염한 눈을 가늘게 뜨며 친근하게 물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실 만한 명령이었지요. 전하께서는 다시 솔피시언 영지 내의 교단으로 돌아가셨습니까?”
“네. 앞으로도 말러 전하나 세틱스 전하의 행방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솔피시언은 교단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있으니까요. 교단장은 은덕을 모르는 이가 아닙니다.”
“은신으로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설마 두 분 전하께서 교단에서 사제로 일하고 계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말러 전하는 오히려 적성에 맞아 보이시지만요. 뭐, 본인이 왕이 되는 걸 동생에게 양보할 정도로 심약한 분이시니. 다만, 세틱스 전하가 곧잘 지루해하셔서 달래는 것이 큰일입니다. 이번에 굳이 위험하게 올페마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신 것도 그렇고요.”
“거사를 위해 인내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세틱스 전하께서도 알아주실 겁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처음부터 명확하게 운신을 정하지 않고 있었다. 트론에게도, 또한 세틱스를 숨기고 있는 솔피시언 쪽에도 협력하는 것처럼 여지를 둔 채 줄타기를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루베인과 트론의 정혼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세틱스 본인의 됨됨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름 아닌 트론이 그 제안을 걷어찼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트론이 자신에게 협력해 주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솔피시언 쪽을 오가며 얻었던 정보를 모두 전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했다면 숨어 있는 세틱스를 찾아내서 뒤를 치고, 이제 기세가 죽은 헤럴드를 떨구어 내는 일은 쉬웠을 것이다.
그토록 합리적이고 최선의 길을, 그는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내 딸을 거절한 원한은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트론 전하.’
그것은 마그달리사 공작 나름대로의 딸을 향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형태가 일그러져 있을지언정.
“아무튼 이번 일로 트론 전하도 저희를 경계하기 시작할 겁니다. 아마 그분이라면 이번 공격이 헤럴드 측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라는 걸 눈치챘을 가능성도 크지요.”
마그달리사 공작의 말에 솔피시언 공작이 은은하게 웃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각하께서도 이번에 경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의 능력을. 본인이 힘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여 만능은 아닙니다만, 웬만한 주술사나 마법사가 범접할 수준의 능력은 아니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조금 두려울 정도더군요. 솔피시언 가문의 방계 아이라고 했던가요?”
“네, 맞습니다. 처음에 가문에서는 수치로 여겼지요. 백치처럼 사람의 말을 하지 못했거든요. 마치 혼백이 없는 짐승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년 전, 돌연히 지성이 돌아왔지요.”
“정말 신기한 일이군요.”
“심지어 그게 세틱스 전하가 몸을 숨기기 위해 그 가문에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하니. 운명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마치 라이샤와 왕의 만남 같지요.”
마그달리사 공작은 라이샤 설화를 그다지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마법사와 주술사의 소양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각 분야에서 최고의 영역을 이미 한없이 초월한 괴물. 그런 이를 수하로 데리고 있는 한, 세틱스 전하께서 패배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네, 그렇겠지요.”
마그달리사 공작 역시 그 때문에 마지막까지 트론과 세틱스 사이에서 고민했다. 종국에는 좀 더 왕의 재목 같았던 트론을 택했다.
트론과 손을 잡는다면, 본인이 올페마에서 잠시 맡아 두던 그 ‘괴물’을 방심하는 사이에 바로 제거할 생각이었다. 이미 물거품이 된 과거의 일이지만.
“세틱스 전하의 치세가 곧 찾아올 겁니다. 공의 따님은 왕비가 되어 가장 영광된 자리에 앉겠지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때 응접실 안으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저입니다.”
어딘지 심약한 듯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왔구나. 들어와. 그렇잖아도 네가 이번 일을 잘 해내 준 걸 칭찬하고 있었단다.”
허락이 떨어지자 열대여섯 살 정도의 소년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머리에 금색 눈을 한, 어딘지 순한 강아지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실례합니다, 각하.”
“그래, 어서 오렴. 네가 큰일을 해내 주어서 세틱스 전하도 기뻐하신다. 집사에게 말해서 상을 내리마.”
“……아닙니다. 전생의 이름밖에 기억이 없는 반푼이 같은 저를 믿어 주셔서 저야말로 항상 감사합니다.”
솔피시언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을 흘렸다.
“너의 능력을 보고 무엇을 믿지 못하겠느냐. ‘제시드’.”
언젠가 엘피의 앞에서 사라졌던 청년과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그 소년의 이름은, ‘제시드’였다.
***
“전하, 주무시지 않고요.”
“……응. 슬슬 들어가서 쉴까 했어.”
엘피는 종종걸음으로 트론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어딘지 까칠해 보였다.
밀리엔을 치료하느라 정작 본인이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바로 침실로 가자, 론. 배고프지는 않아? 혹시나 해서 지금 바깥에 음식을 준비시켜 두긴 했어.”
“별로 식욕이 없어서.”
“……배고픈데 그냥 참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
“그래, 그러자.”
그녀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그의 손을 잡아끌고 가려고 했다.
그 순간, 트론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론?”
엘피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잡은 손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트론은 어딘지 쓸쓸한 표정으로 엘피에게 잡혀 있던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여느 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누나도 그렇지만, 나도 성인이잖아.”
“응, 그렇지.”
“주변에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서로 절도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아.”
엘피는 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방금 트론과 손을 잡은 행위와 절도를 지킨다는 표현을 바로 연결하지 못했다.
“……가족끼리도, 나이가 들면 어릴 때처럼 부대끼지는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내가 손…… 잡는 거 싫었어?”
아주 잠깐, 트론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내가 누나한테 너무 거리낌 없이 굴었지. 성인으로서 자각이 부족한 행동이었던 것 같아.”
“…….”
엘피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완전한 성인 남성이었다. 그녀 안에서는 아직 어리고 귀여운 동생 같아도, 주변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트론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거리낌 없이 서로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는 것은 절도가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지도 모르고, 성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무척 섭섭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티 낼 수는 없었다.
“아침에도 깨우러 오지 않아도 돼. 엘 상대면 내가 너무 풀어지는 것 같으니까…….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그…… 렇구나.”
트론은 그녀의 기운 없는 반응에 숨을 삼켰다.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간신히 참아 냈다.
“……그럼, 자러 갈게. 누나.”
“저기,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지……?”
그녀가 간절한 얼굴을 했다. 트론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평소처럼 엘피의 어깨를 위로하듯 감싸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전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 혼자 반성한 거야. 누나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엘피는 폐가 아니라고 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꾸로 그런 행동이 트론에게 폐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트론이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침실을 나설 때까지, 엘피는 결국 복잡한 심경을 털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
엘피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트론은 눈을 감았다.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지금 한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뱉어내고 싶었다. 그 뺨을 쓰다듬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안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꿈속의 소년이 했던 말을 이제야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꿉놀이는 어린아이의 전유물이다. 자신이 무엇을 탐하고 무엇을 욕망하며 그녀를 만지고 싶은지 깨달아 버렸다. 알아버린 이상 그녀와 닿는 것은 예전과 같은 무게가 아니었다.
자신의 추한 속내를 입 밖으로 내기는 쉬웠다. 그녀는 주군인 트론의 말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를 자신의 모친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부친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이 아니다. 연모조차 아니다. 그런 아름답고 향기 나는 말로 이 감정을 포장할 수는 없다.
허락되지 않은 욕망은 관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깊이 묻어 버려야 마땅했다.
감정을 죽이며 살아가는 것은 이미 생활의 일부였다. 고통을 못 느끼는 척 감내하는 것 역시 특기였다.
이 추잡하고도 너저분한 욕망으로 결코 그녀를 더럽히지 않을 테니, 부디.
엘피 이나드의 옆에 있는 것만은, 허락해 주기를 바랐다.
“론은 오래오래 살아서 행복해야 해.”
행복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라건대.
엘피야말로 그 어떤 어둠도 추악함도 모른 채, 오래오래 살아서 행복하기를.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