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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71화 (71/132)

71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7)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다. 생물인 이상,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살아남기 위해 적응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트론 스레데니옴이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감정을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편했다. 분노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다. 기뻐할 것도 없고, 즐거워할 것도 없다. 정해진 목표를 위해 할당된 작업을 수행한다. 인간의 형태를 한 기계 장치는 마모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감정을 버린 이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엘피 이나드가 이 세상에서 없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지금까지 트론이 느끼던 ‘엘피가 곁에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은 어렴풋한 잔상 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보고 싶다거나, 맞닿아 있으면 안심이 된다거나 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였다.

언젠가 때가 되면 엘피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신의 곁이 아니더라도 엘피가 어딘가에서 그녀답게 살아가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기반했다.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황을 트론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모친은 죽었으며, 사먼 이전에 존재하던 연락책이자 인간 병기들은 장로의 명령으로 목숨과 맞바꾸어 트론을 지켰다.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밟고 서 있는 존재였다.

타인의 죽음도, 또한 자신의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엘피가 사라진다면. 제대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엘피!”

트론은 두려움에 고개를 들었다. 사방은 새카맸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가운데에서 걷잡을 수 없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트론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저 멀리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 나왔다.

이전에도 같은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왕자님, 저는 여기 있어요.”

청아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엘피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의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팔을 벌리며 다정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트론은 망설이지 않고 엘피에게 달려갔다. 이곳에 존재하는 그녀를 당장 실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숨이 찰 정도로 갈망해도 둘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가 절망을 느끼며 멈춰 섰을 때, 엘피는 실망한 듯한 얼굴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트론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뒤에서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문을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문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트론은 필사적으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왕자님.”

하얀색 휘장이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렴풋이 엘피의 모습이 휘장 너머 실루엣으로 보였다.

트론은 하얀 천을 헤치고 침대 위에 올랐다.

엘피의 긴 금발이 침대보 위를 수놓듯이 찰랑거렸다. 어딘지 달뜬 얼굴에서 입술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얇은 은색 드레스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윤곽을 가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누워 있는 엘피를 보자마자, 트론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워 보이는 살갗을 만지고 싶었다. 그 머리칼을 쥐어 입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좀 더…….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엘피가 입을 벌렸다.

“전하 뜻대로 하셔도 돼요.”

입술 사이에서 엿보이는 혀가 지나치게 붉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죄스러운 느낌이 들어 트론은 시선을 피하려 했다.

그 순간, 엘피가 팔을 뻗어 트론의 어깨를 붙잡았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론이 바라는 건, 뭐든지 해 줄게.”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트론은 생각을 놓았다.

초식동물의 목을 무는 맹수처럼 그녀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다리 선을 더듬으며 방해가 되는 천을 벗겼다.

열기와 탐욕만이 공간을 채웠다. 입술을 뗄 때마다 들리는 그녀의 밭은 소리가 지금까지 느낀 적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언제까지고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

“전하. 전하, 일어나세요.”

다정하고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피로에 젖어 눈을 뜰 수 없었지만, 바로 엘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트론은 무의식중에 팔을 뻗었다. 엘피가 그의 손을 깍지 끼어 쥐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잡아당겼다.

달콤한 체향과 함께 그녀의 몸이 품에 들어왔다.

엘피는 쿡쿡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를 꽉 안자,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트론의 뺨을 비볐다. 그에 답하듯 등을 어루만졌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그는 욕망에 따라 닿아 있는 목덜미를 입술로 훑어내리다 어깨를 살며시 깨물었다. “론, 장난 그만치고 일어나!”라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항다운 저항은 돌아오지 않았다.

입을 벌려 깨물었던 자리를 핥자, 간지러움을 참는 것처럼 엘피가 몸을 굳혔다. 트론은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칼을 쥐며 이름을 불렀다.

“……엘.”

“응, 론. 덜 깬 건 알겠으니까 정신 차려.”

지나치게 선명한 그녀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빛이 눈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많이 피곤했지? 더 자게 해 주고 싶은데, 오늘 일정 많잖아.”

꿈의 경계에서 시야가 선명해졌을 때, 눈 앞에 들어온 것은 어딘지 흐트러진 모습을 한 엘피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드레스 상의는 흘러내려가 있었다. 어깨 위에는 자신이 남긴 것이 분명한 붉은 자국이 있었다.

드레스의 얇은 천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가슴 위에 걸쳐 있었지만, 몸이 그리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리지는 못했다.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폭력적인 충동이 심장을 죄었다. 언제나 엘피는 그의 앞에서 무방비했다.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이대로, 좀 더.’

열기에 휩쓸리면 그녀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무척 손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트론을 현실로 데려온 것은 그녀의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론? 혹시 어디 아픈 거야? 그럼 더 자도 돼. 일정 미루자고 가이 님에게 말해 둘게.”

엘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딘지 멍해 보이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트론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누…… 나.”

“응. 아파……?”

트론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엘피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잠이 덜 깨서 그래. 씻으러 갈게. 누나는 방에 돌아가 있어.”

“아냐, 씻고 나오는 대로 내가 옷시중…….”

“괜찮아. 그러지 마. 이따 회의 소집할 때 보자. 바로 나가 줘.”

“……?”

엘피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나 그것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트론은 욕지기를 참으며 욕실로 들어가 거칠게 문을 닫았다. 잠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찬물을 끼얹었다.

“어째서…….”

의문이 되지 않는 의문을 입 밖으로 뱉었다.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이미 깨달아 버렸다.

트론 스레데니옴은 엘피 이나드에게 욕정하고 있다. 그녀를 욕망하고 있다.

계속 모르는 척해 왔을 따름이다. 가짜 가족으로 허락되는 범위에서 그녀에게 닿으며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그녀를 기만해 왔다.

자신은 엘피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도 알았다.

절대적인 우위에서 그녀를 취하려 했다. 꿈속에서 그 근원에 있는 욕망을 토해 냈다. 그토록 혐오하던 부친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과 닮지 않은 게 유일한 자랑이었는데, 소용없었군요. 폐하.”

어느새 수도에서 흘러나온 찬물이 욕조에 가득 찼다.

트론은 그대로 생각을 단절하는 것처럼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친 앞에서는 순종적인 양 연기하다가도 삭이지 못한 증오를 트론에게 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머니를 위해 그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트론이 기억하는 모친은 언제나 울분에 찬 사람이었지만, 할리케가 말하는 자신의 언니는 이지적이고 다정하며 빛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어떤 것을 계기로 변하고 만다.

자신의 욕망 역시 엘피를 망쳐 놓을 것이다.

언제나 부드럽게 웃어 주던 그녀가 트론을 마주할 때마다 공포에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의 안위를 걱정하던 시선은 사라지고 그 눈빛에 혐오만이 담길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이 세상에서 그녀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만큼.

***

마수 소환 주술식, 그리고 마법 방해를 한 장본인을 추적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했다.

마그달리사 공작과 관련되었으리라는 심증은 있었으나, 심증만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가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추적은 막혔지만, 이번에 대대적으로 소란을 피워 준 덕에 상대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며 그로서는 드물게 진지하게 반응했다.

트론은 이번 사태를 불러온 것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과 실책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수하들을 탓하지 않았다.

사먼은 거의 엉엉 울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트론은 오히려 다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그에게 미안했다.

여러 가지로 뒤끝이 나쁜 결과가 되었으나, 그래도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치료를 위한 달물결 꽃의 확보였다.

꽃이 시들기 전에 서둘러 치료가 시행되었다. 약 이틀 동안 트론과 바실리는 변경백의 곁에 붙어 주술과 마법을 동원하여 장시간의 수술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고생 끝에 약재를 가져온 보람이 있었는지,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변경백이 치료를 받고 종일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엘피는 서둘러 안채로 들어갔다.

밤을 새서 트론과 바실리를 돕느라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이가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가이 님! 변경백 각하께서 쾌차하셨다면서요.”

“네, 엘피 님. 당분간 안정은 취하셔야겠지만,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기세예요. 얼른 들어가서 얼굴 보여드리세요.”

엘피는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바실리가 밀리엔을 꽉 껴안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밀리엔은 곤란한 얼굴로 자신의 남편을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바실리. 나는 괜찮아. 당신이 치료 잘 해 줬잖아. 이제 쌩쌩해.”

“……너무 길었다구요, 각하.”

“안다니까. 나도 미안해. 걱정 끼쳐서.”

트론은 그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중년의 닭살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피는 트론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었다. 부외자인 엘피는 치료 과정 내내 격리되어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치료 과정이 시작된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엘피가 살그머니 다가가 트론의 팔을 잡았다.

그가 흠칫했다가 “아…….” 하고 짧게 반응했다. 평소라면 미소 지으며 맞아주었을 텐데, 피곤한 것일까.

엘피는 나중에 트론에게 안마라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변경백의 침대에 다가갔다.

“각하, 이렇게 쾌차하셔서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이나드 영애. 나야말로 이렇게 부끄러운 꼴을 보여서 미안하오.”

밀리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비키라는 듯이 바실리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바실리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닙니다, 애정 가득하신 모습 보기 좋아요. 부군께서도 그간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두 분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좋게 봐주어 고맙습니다. 항상 마음 써 준 영애에게도 감사할 따름이오.”

잠시 엘피와 덕담을 주고받은 다음, 밀리엔은 트론을 향했다.

“전하.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떨까요? 저와는 또 나중에 이야기하시지요.”

“응. 부군과 그대의 건강 관리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어려울 것 같군. 나중에 시간을 잡지.”

“정말……. 못난 남편 놈 때문에 제가 부끄럽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럼 영애, 전하를 잘 모셔다 드리세요.”

밀리엔이 어딘지 마음을 쓰는 것처럼 엘피를 트론과 함께 보내려 했다. 하지만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시녀장, 변경백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나중에 보지.”

“앗…… 네.”

밀리엔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트론의 얼굴도 며칠 만에 보는 것이기에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트론이 일부러 신경 써서 말해 준 것을 거절하기도 곤란한 노릇이었다.

엘피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나중에 영양이 될 만한 음식을 챙겨서 따로 트론을 만나러 가자고 생각했다.

트론이 문을 닫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밀리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각하?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엘피의 질문에 밀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래 앓다 일어나서 제가 좀 신경이 과민한 것이겠지요.”

“속이 안 좋으신가요?”

“아닙니다. 그저…… 전하의 상태가 어쩐지 불안정해 보여서요.”

“……?”

“늙은이의 노파심이겠지요. 피곤해서 그러신 걸지도 모르고요. 나중에 영애께서 전하를 살펴봐 주세요.”

“네, 그야 물론입니다…….”

밀리엔의 말을 들으니 엘피 역시 아까 방에 들어와 트론과 마주했을 때의 반응이 떠올라 석연치 않았다. 애써 위화감을 가슴 아래로 묻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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