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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68화 (68/132)

68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4)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당황한 엘피의 반응을 다른 이유로 오해한 것인지, 하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엘피는 마른침을 삼킨 후 답했다.

“저어, 다들 바쁘셔서 저한테 운반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정말 요즘 호텔 기강이 해이하네! 알았어. 방에 계시는 아가씨한테는 내가 음식을 갖다 드릴 테니, 넌 돌아가서 아까 시킨 세탁물 수거나 마저 해.”

“…….”

여기서 귀족패를 보이는 게 좋을까 잠시 망설였다가 참았다. 하녀의 입을 막을 수 없는 이상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겨우 이런 일로 트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잠자코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엘피는 얼른 문으로 다가갔다.

“바, 방의 아가씨에게 전언도 있어서요. 일단 같이 음식을 나르죠.”

“얘가 건방지게…….”

엘피는 씨근대는 하녀를 무시하고 재빨리 열쇠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님! 전언이 있습니다.”

목소리를 듣고 제발 눈치채 주기를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매질이라도 해야 정신을 차리겠니? 어느 안전이라고 건방지게…….”

하녀가 엘피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올렸다. 엘피는 눈을 질끈 감고 일단 한 대 맞아 주기로 했다.

“아침부터 시끄럽네.”

그 순간, 청명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끼어들어 하녀의 팔을 막았다.

엘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짧은 금발이 매력적인 미녀, 루베인이 엘피가 얻어맞는 것을 막아 주었다.

“죄, 죄송합……!”

하녀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몸을 떨었다. 루베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승강기를 향해 턱짓했다.

“바로 물러가. 아침 식사한 다음에 얘한테 시켜서 물릴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모, 모쪼록 자비를!”

아마 루베인이 호텔의 높은 사람에게 말해서 벌을 받을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루베인은 ‘에휴’ 하고 한숨만 내쉰 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용서의 뜻으로 받아들인 하녀는 재빠르게 승강기를 타고 사라졌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루베인은 바로 엘피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언니! 왜 이런 데에 있어. 게다가 웬 하녀복 차림까지 하고…….”

엘피는 문을 닫고 왜건을 방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루베인을 진정시키듯 소파에 앉힌 후 그 옆에 앉았다.

“파티에서 네가 끌려가듯이 퇴장했잖아. 그 이후로 가이 님을 통해서도 연락이 안 되고…….”

“내가 또 3년 전처럼 말썽을 피울까 봐 걱정되나 봐. 덕분에 이렇게 또 연금당한 신세야.”

루베인이 샐쭉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파티 때 일은, 나도 마그달리사 공작님이 너무했다고 생각해. 루베인 너한테 미리 말하지도 않고 그러신 거였지?”

“맞아. 사람이 아주 인형으로 보이나 봐.”

그때 일을 떠올리고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인지 루베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루베인. ……혹시, 행사장에 가고 나서 협곡에 들어가 달물결 꽃을 직접 따오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

“그건…….”

루베인이 부정하지 못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자신의 부친에게 반항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맞구나. 너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했어. 네 마음은 이해해. 나 같아도 정말 속상했을 거야. 하지만 루베인, 마수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언니, 나는…….”

“다 너를 생각해서 그래. 트론 전하도, 가이 님도 걱정하셨어.”

엘피는 루베인의 손을 꼭 쥐었다.

“있잖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 트러블은 내 힘으로 온전히 해결하고 싶다고. 그렇지만 루베인,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네 행동이 더 큰 트러블을 불러오지 않을까?”

“……언니. 나, 너무 속상해. 왜 이렇게 난 무력할까?”

루베인의 글썽이는 눈을 보고 엘피는 옮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우는 대신 그녀를 꽉 안았다.

“예전에 나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어. 왕자님한테. 그때 왕자님이 하셨던 말씀이 나한테는 무척 위로가 되었거든. 그러니까 루베인 너한테도 들려줄게.”

“……?”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해낼 수는 없어. 너도, 나도 사람이니까. 자책하지 마. 주변의 강압적인 상황을 해결할 힘이 없다고 해서 루베인 네가 부족한 사람인 건 아니야.”

“왕자님이, 그런 말씀을……?”

“응. 나도 모자란 점이 많지만, 루베인 너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

“당연하지!”

“그러니까 너도 마찬가지야. 루베인은 부족함 없는 내 친구야.”

루베인은 결국 울먹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엘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엘피는 타이르듯 말했다.

“마수 토벌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왕자님께서 따오시는 꽃은 변경백 각하의 약재로 쓸 거라, 아마 전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루베인 너의 상대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응…….”

마그달리사 공작이 약혼 동맹을 제안했다가 트론에게 거절당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루베인 본인은 모르는 듯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 들어 봤자 더 속상하기만 할 것이다.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방안을 이후에 같이 생각하자. 나는 머리가 좋지 않지만……. 왕자님이라면 분명히 진지하게 고민해 주실 거야.”

엘피는 루베인의 짤막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나랑 약속해. 절대로 위험한 행동하지 않겠다고.”

“응. 분하지만, 그렇게 할게. 대신 나중에 각하한테 꼭 갚아 줄 거야.”

“그래,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도와줄게.”

루베인의 등을 두드리고 엘피는 몸을 뗐다.

“곧 몸단장 도우러 하녀들이 오겠다. 나는 이만 돌아가 볼게.”

“알았어, 언니. 후야제 때 보자.”

“오늘 행사에 참석해서 꽃 받는 거 기분 좋진 않겠지만. 그래도 잘 끝내고 와.”

엘피는 그렇게 격려를 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아, 루베인. 아침은 먹는 게 좋겠어. 마그달리사 영애께서 식사를 끝내셔야 내가 왜건을 끌고 돌아갈 거 아니야.”

“아차, 그랬지. 잠깐만 기다려. 후딱 해치울게!”

영애치고 경박한 루베인의 답변에 엘피는 다시 웃었다.

***

“만년설의 가호를 받는 용사들이여. 하늘의 정기와 땅의 숨결이 그대들의 승리를 부르짖을 것이다. 용맹한 그 모습에 영광 있으라.”

가이가 전통에 따라 마수 토벌의 시작을 선포했다. 참가자들은 박수나 함성을 올리는 것으로 답했다.

평소에는 막아 두고 있던 입구의 봉인이 풀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수의 서식지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트론은 가이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파악해 둔 정보에 의하면, 바실리가 요구한 수준의 달물결 꽃은 협곡 입구에서도 200르티어(약 10km) 이상 들어간 지역에서 발견된 전례가 있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입구 근처에서부터 마수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트론은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전진했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사먼이 소리 없이 트론의 옆으로 다가왔다.

“엄호하겠습니다, 주군.”

“응. 바로 나타난 것 같다.”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트론과 사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어올라 바위 위에 착지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땅을 가르며 마치 거대한 지네와도 같은 마수가 머리를 내밀었다.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주술을!”

트론은 끄덕이며 주술식을 공중에 그려 나갔다.

사먼이 들고 있던 막대기 같은 것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숨겨져 있던 날이 막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마수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촉수를 갈랐다.

사먼이 들고 있는 무기는 커다란 낫의 모양이었다.

트론은 바위에서 뛰어내리며 마수의 등을 밟았다. 붉은색의 주술식이 완성되는 동시에, 딱딱한 마수의 몸 껍데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먼은 망설이지 않고 물컹해진 마수의 머리를 두 동강 냈다. 사방으로 검푸른 색의 체액이 튀기고, 불쾌한 냄새와 함께 마수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가 핵이겠지만, 혹시 재생할지 모르니 몸도 부숴 놓겠습니다.”

“그래.”

어딘지 얼이 빠진 것 같은 성격과 다르게, 사먼은 무척 뛰어난 전투 요원이기도 했다. 이 정도의 주술 실력과 무예 실력을 동시에 갖춘 이는 흔치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웰칸의 장로인 할리케가 나름대로 신경 써서 트론에게 인재를 붙여 줬다고 할 수 있었다.

마수의 시체를 갈가리 찢은 후 땅에 묻는 것으로 완전히 마무리하는 사먼을 바라보다가, 트론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대 정도의 실력이면 굳이 나에게 붙어서 험한 일을 자원할 건 없었을 텐데.”

“연합의 숙원을 위한 일 아닙니까! 주군께서 주술사 동지들이 억압받지 않도록 힘써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보답은 없습니다.”

“…….”

자신이 왕좌에 오른 후 사먼이 바라는 눈부신 이상이 이루어질지, 트론은 장담할 수 없었다.

스레데니옴 왕국이라는 지금 이 나라가 무너지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 역시 결국은 같은 사람의 집합이다. 주술사에 대한 편견이나 현재의 위치가 그렇게 쉽게 바뀔 리는 없다.

할리케, 그리고 웰칸의 원로회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합리보다는 복수인가.’

원수나 다름없는 이 나라가 무너지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가장 큰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해하기는 어려운 감정이었다.

그러나 증오에 빠진 그들과 달리 사먼의 바람은 무척 올곧고 순수했다. 어째서 웰칸 연합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단순히 보람을 찾기 위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텐데. 그대의 전임자가 사라진 이유를 그대도 알 것 아닌가.”

“당연히 각오한 바입니다!”

굳이 사먼에게 다시 물을 필요도 없는 소리였다. 어차피 그는 트론에게 있어서 도구였다. 무언가 마음 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트론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물러졌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엘피를 만난 이후부터였다.

더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문제였다. 트론은 억지로 사고를 끊고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군. 바로 출발하지.”

“넵!”

이제 비는 거의 그쳤다. 진창이 된 땅을 밟아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트론은 주변을 살폈다.

‘……비 때문에 지면이 젖었어. 아까 그 지네나 지렁이 같은 마수들이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잔뜩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가이가 공유했던 자료에 의하면 땅 밑에 사는 마수들은 위험성이 높은 축에 속했다. 그 마수들이 나타나는 족족 상대하다가는 소모전이 될 뿐이었다.

치유 주술이 아니더라도 주술은 조금씩 생명력을 소진하기 때문에, 소모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목적하는 물건만 빠르게 챙기고 협곡을 벗어나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순간, 트론의 생각을 비웃듯이 지면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보다 땅울림이 엄청났다.

“……주군! 아무래도 아까 그놈의 동료들이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트론은 눈을 찡그렸다. 타깃으로 찍혔다면 도망간다고 해도 계속 쫓아올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 마수들은 생김새와 다르게 민첩했다.

“사먼. 나보다는 그대가 도주와 따돌리기에 익숙하니, 여기서는 미끼 역을 맡기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따돌리고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합류 지점은 어디로 할까요?”

“사전에 확인했던 지점 중 두 번째 갈림길로.”

“넵! 맡겨만 주십쇼, 주군!”

사먼은 크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낫을 크게 휘둘러 땅을 찍었다. 정확하게 땅 아래에 있는 마수의 머리에 날이 닿아 검푸른 체액이 튀었다.

트론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먼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땅 아래의 마수들은 사먼에게 먼저 기습을 당한 것에 당황했는지 바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간격을 두지 않고 재빠르게 낫을 휘두른 다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일부러 크게 목청을 올려 도발했다.

“자, 더러운 마수들! 너희들 상대는 나다!”

마수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먼을 향해 재빠르게 이동했다.

그는 간격을 정확하게 재면서 트론과 반대 방향으로 마수들을 유인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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