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3)
먹구름이 끼어 교단 안은 어두컴컴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기도실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 지긋한 고위 사제가 견습 사제를 데리고 기도실로 들어왔다.
“진실한 기도는 신에게 다가가는 지름길입니다. 모쪼록 마음을 경건히 하소서.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고위 사제가 축언을 읊고 나갔다. 견습 사제는 기도단을 사이에 두고 마그달리사 공작의 건너편에 앉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신 아래에서 우리 모두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지위 고하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 기도하십시오.”
견습 사제의 말투와 음색은 연극이라도 하는 듯 과장되어 있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사제 행세가 완전히 몸에 붙으셨군요.”
“이곳은 열린 공간입니다. 신께서도 듣고 계시고요. 말을 조심하시길.”
‘대화의 방’과 다르게 남이 들을 가능성이 있어서 주의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제님. 올페마에서는 언제 떠나실 예정입니까?”
“마수 토벌 행사가 끝날 때쯤에는 가겠지요.”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시는군요.”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억지를 부려 이동한 보람이 없는 여행이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 신의 뜻이겠지요.”
사제는 성의 없이 추임새를 넣은 후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합시다. 마수 토벌 행사 당일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그 말에 마그달리사 공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사제님은 무엇을 바라십니까?”
“자그마한 여흥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공에게 보내 놓은 그 아이의 실력이라면 휘젓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으니까요.”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저쪽이 경계하게 될 텐데요.”
“이 이상 나를 지루하게 만들지 마세요.”
사제가 풍기던 느슨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자, 그럼. 즐거운 토끼몰이 사냥을 만들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토끼가 제 발로 덫에 들어가서 발버둥 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지요.”
사제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시종 유쾌한 목소리였다.
“사제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러 돌아가야겠군요.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비가 어느샌가 소리를 내며 창을 치고 있었다.
내일 있을 행사에 불길한 기색을 더하는 듯한 소리였다.
***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추적추적 땅을 적셨다. 평소라면 봄을 알리는 비가 반가웠겠지만, 아무래도 야외 행사가 있는 날이다 보니 기쁜 일은 아니었다.
“행사를 중지할 정도의 양은 아니군요. 슬슬 그칠 기색이기도 하고요.”
가이가 창 너머로 기세가 수그러들고 있는 빗발을 보며 말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라 바깥은 어두컴컴했다.
“네, 제가 보았던 미래에서도 루베인이 마수들에게 당할 때 비가 오지는 않았어요. 날이 흐렸던 것 같기는 하지만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실 행사를 아예 중단하는 것도 생각했었지만요.”
“왕자님께서도 참석하는 행사인데, 중단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네, 그것도 포함해서 이래저래 중단하는 건 리스크가 큰지라. 봉쇄된 마수 서식지 입구를 나중에 다시 열기도 어렵고요. 뭐, 루베인 님만 오늘을 무사히 넘긴다면 문제없겠죠. 엘피 님을 믿습니다.”
“맡겨 주세요.”
엘피는 하녀복으로 갈아입은 후 온몸을 감싸는 레인코트를 걸쳤다. 마지막으로 트론에게 인사하기 위해 방문을 노크했다.
“전하, 저는 이제 출발할까 합니다.”
“……응. 잠깐 들어와.”
트론도 사냥용 튜닉으로 갈아입고 오늘 행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산뜻한 감색 옷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바빠서 트론의 옷시중을 자신이 들어주지 못한 것이 섭섭하기도 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절대 무리하지는 말도록. 만에 하나의 사태가 발생하면 맞춰서 움직일 테니까, 아일란으로 연락하도록 해.”
“네, 전하. 헤럴드 전하 쪽에서는 별 움직임 없었죠……?”
“일단은 그렇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하도 본인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주세요.”
“응.”
엘피가 따스하게 웃으며 팔을 벌려 트론을 꼭 안았다. 어딘지 모르게 안 좋은 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 무척 안심이 되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살며시 엘피의 등을 두드렸다.
“이따 봐, 누나.”
“다녀올게, 론.”
짧은 배웅 인사를 마치고 엘피는 방을 나섰다.
***
아침이 되어도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그치지 않았다. 트론은 튜닉의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마수 토벌 행사가 진행되는 장소는 르터바이스 산맥에서 가장 험한 협곡이라, 마차가 더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트론의 옆으로 따라 내리며 가이가 우산을 펼쳤다. 그는 트론에게 우산을 씌워 주려 했으나, 본인이 사양했다.
가이는 불만을 표출하듯 손잡이를 잡고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사방으로 물방울을 튕겼다.
“군신 사이에 오붓하게 한 우산쯤 쓸 수 있지, 전하께서 너무 박하시네요.”
“그대는 대체 군신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뭐더라, 예전 고사에 보면 얄파나 왕이 으뜸가는 충신이랑 자기 사이를 연인으로 비유하지 않았던가요?”
“실제로 그는 얄파나 왕의 정부였을 텐데.”
“그거 야사 아니었어요?”
“왕궁의 극비 사료를 보면 십중팔구는 맞을 듯하군.”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이 늘었네요.”
농담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좁은 숲을 헤쳐 나갔다. 이윽고 오늘 행사가 시작되는 공터에 도착했다.
숲 안의 탁 트인 공터는 파티 회장보다 약간 작은 넓이였다.
이미 도착해 있던 기사들이 트론과 가이를 보자마자 재빨리 인사를 했다.
가이는 손을 들어 편하게 있으라는 표시를 대신한 후 우산을 접었다. 손가락을 들어 공중에 빛을 그려 내자, 가이의 우산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트라이던트로 바뀌었다.
“그대도 무기를 다룰 줄 알았군?”
“그야, 집안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재능은 별로 없었습니다만.”
가이가 지팡이처럼 트라이던트로 땅을 쿡 찍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어릴 땐 별소리를 다 들었어요. 각하께서도 저 같은 얼치기를 후계자 삼지 말고 애를 하나 더 낳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것으로 알고요.”
“가문의 수장이 꼭 무예의 극에 달한 자일 필요는 없을 텐데. 과거에는 르터바이스가 마수를 몸 바쳐 막아야 했지만, 이제 시대가 다르지 않은가.”
“그놈의 전통 때문에요. 오늘 제가 굳이 무기를 들고 온 것도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법은 마수를 상대로 상성이 나쁘니까요. 행사의 주최자가 마수한테 맥을 못 추는 면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거죠. 정작 주최자는 입구에서 자리나 지키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마법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은 물론, 아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학문이다.
하지만 약점 또한 존재했다. 한 사람의 상상력과 마법 계산력, 마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가령 10톤쯤 되는 바위가 몸을 덮쳐 온다면, 마법사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어벽을 만들어 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으로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방어벽을 견고하게 만들어 낼 수 없다.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의 이론과 구조를 응용하여 마법식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아무리 천재 마법사라고 해도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구성을 이해하여 마법식에 순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마법은 물리 공격과 방어에 취약한 편이었다.
마수는 대표적으로 물리적인 힘만으로 인간을 몰아붙이는 생물이었고, 그런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무력으로 맞서거나, 혹은 주술을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물론 주술은 주술대로 발동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약점이 있는 편이었다.
둘 다 초월적인 힘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
“뭐, 전하야 검도 능숙하시고 주술로 커버도 하실 수 있으니 별일 없겠지만요. 제가 무능해서 죄송할 따름이네요.”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은 없다. 모든 일에는 적재적소가 있지 않은가.”
“와, 전하. 저 위로해 주시려는 거예요? 어쩜 이렇게 다정하실까! 제가 그렇게나 쓸모 있게 느껴지셨다니!”
트론은 도끼눈을 떴다. 하여간 조금만 칭찬해 줘도 바로 매를 버는 것이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라는 인간이었다.
“자꾸 그러면 폐기 처분할 거다.”
“히잉. 엘피 님한테 일러 버릴 거예요!”
그 이름을 듣고 트론이 걱정되는 얼굴을 했다.
“……시녀장은 잘해 주고 있겠지.”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개회식이 끝나는 대로 사먼과 함께 마수의 협곡으로 돌입하겠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중간 연락은 맡기도록 하지.”
“네엡.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그래.”
***
엘피는 호텔에서 약간 떨어진 골목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렸다. 미리 이야기를 해 놓아서, 별문제 없이 호텔 종업원들이 오고 가는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르터바이스 가문을 통해 말을 전해 놓은 지배인은 모르는 척 엘피에게 루베인의 방 열쇠를 넘겼다.
업무표도 조정했으니 시간에 맞춰 왜건을 끌고 루베인의 방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엘피는 아침 식사까지 시간을 헤아렸다. 앞으로 약 30분 동안 호텔 종업원들 사이에 섞여야 했다.
남들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눈으로 하녀들의 움직임을 체크하여 흉내를 내려니, 수석 하녀로 보이는 이가 엘피를 불렀다.
“거기, 너! 금발!”
“아…… 네.”
엘피는 흠칫하여 수석 하녀에게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얼마 전에 한꺼번에 들어온 신참 중 하나인가?”
“네, 네에. 그렇습니다.”
“이름이 뭐지?”
“……엘입니다.”
“그런 애가 있었던가? 뭐, 평범한 이름이니 내가 헷갈렸을 수도 있고.”
그녀는 차트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아무튼, 견습은 세탁물 수거부터 해야 해. 여기, 체크아웃한 방 목록이니까 3층부터 쭉 돌면서 빈 방에 들어가서 침대 시트를 벗겨 와.”
“알겠습니다.”
엘피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차트를 받았다. 트론과 도망치던 시절에는 온갖 궂은일을 했지만, 최근에는 직접 허드렛일을 한 적이 없었기에 무척 오랜만에 가사노동을 하게 된 셈이었다.
어차피 아침 식사를 내갈 때까지 수상하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으므로, 엘피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시트와 베갯잇을 벗겨 세탁실로 운반하는 과정을 몇 번 왕복하다 보니, 어느샌가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엘피는 시계를 확인한 후 땀을 닦아 내고 허리를 폈다. 1층으로 돌아가 보니 귀빈용 아침 식사가 왜건에 올려져 있었다.
이제 이걸 가지고 루베인의 방에 가면 된다.
엘피는 조심스레 왜건을 끌고 본관을 빠져나갔다.
루베인의 방은 호텔에서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 별채에 위치했다.
별채는 호텔 본관과 부속 건물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있는 구조였다. 아마 도망치기 어렵게 하려고 루베인을 이곳에 연금한 모양이었다.
별채의 마법 승강기를 타고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복도는 조용했다. 아마 별채에 있는 모든 방을 빌린 듯했다.
가장 걱정한 것은 방 앞을 지키고 있는 감시자였는데, 다행히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피가 안심하며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루베인의 건너편 방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먼지떨이를 들고 있는 수석 하녀였다.
“어라? 야, 너.”
“……!”
“견습 하녀가 왜 이런 데에 있는 거야! 이곳은 귀빈을 모시는 데야. 너같이 경험 없는 애가 올 곳이 아니라고!”
난처한 상황이었다. 엘피는 왜건 손잡이를 놓지 않고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