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2)
“루베인…… 하고?”
“그래. 거절했지만.”
“어째서? 루베인은 좋은 애인데. 거기다가 트론 말대로 안정적으로 왕이 될 방법이기도 하잖아.”
트론은 엘피의 머리칼을 쓸었다.
“결혼할 생각 같은 거 없으니까. 아마 마그달리사 영애 본인도 나만큼 생각이 없지 않을까.”
“그랬구나…….”
엘피는 3년 전 데니옴 회의 전에 가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트론이라면 자신의 감정보다 정치적 이득을 중시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건 싫다고 답했을 때, 그가 다짐이라도 시키듯 물었었다.
“엘피 님은 왕자님께서 꼭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도록 힘쓰실 거라는 거죠?”
“네.”
“그 말씀, 잊지 마시기예요?”
하지만 그 다짐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트론 본인이 마음 없는 결혼을 거절했다지 않은가.
엘피는 조금 안심했다. 트론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불행을 감내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실망했어?”
트론이 그녀의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눈을 들여다보았다.
“실망이랄 게 있나?”
“왕으로서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니까.”
“난 정치 같은 건 잘 몰라서, 그 제안을 거절한 게 얼마나 엄청난 손실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 하지만…….”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이제는 자신보다 한참 위에 있는 트론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결혼은 일생을 통틀어서도 중요한 문제잖아. 론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결혼했으면 좋겠어.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서, 마음에 없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야.”
“…….”
트론이 루베인과의 결혼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파멸의 길에 동반자를 추가할 생각은 없고, 루베인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가까운 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것이 불쾌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그런 낭만적인 이유조차 아니었다. 만에 하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 해도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왕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그 생각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신하로서는 너무 물렁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론의 누나니까.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인걸.”
“그런가…….”
“응! 반대로, 론도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억지로 끌려가서 결혼한다고 하면 싫을 거잖아?”
“책임지고 상대방을 죽여줄게.”
“아하하, 농담도 참!”
딱히 농담은 아니었지만, 트론은 굳이 엘피의 생각을 정정하지 않으며 그녀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아무튼, 시녀장.”
그가 말투를 바꾸자 엘피는 자세를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마그달리사 공작의 제안을 거절한 일도 그렇고, 그대의 예언도 있으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기정사실일 거다. 우선 내일 아침에 바로 소백작과 함께 이후 일을 논의하도록 하지.”
“네, 전하.”
“그럼 돌아가 봐. 옷은 나 혼자 갈아입을 수 있으니, 나보다는 그대야말로 편하게 갈아입고 쉬도록 해.”
“싫어요, 옷시중은 들고 갈 거예요!”
트론은 볼을 부풀리며 고집을 부리는 엘피가 귀여워서 다시 한번 꽉 안아 주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정치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을 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이상할 정도로 그의 기분은 개운했다.
마그달리사 공작과 대면 후 끔찍할 정도로 가라앉았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분명히 엘피 덕분이리라 생각하며 트론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
사방이 어두웠다. 트론은 어슴푸레한 공간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을 더듬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의문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윽고 빛의 근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가느다란 빛은 그 문의 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려니, 문 앞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풍성한 금발, 둥글고 다정한 푸른 눈. 그가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다.
“엘피.”
“왕자님, 어서 오세요.”
엘피가 웃으며 손짓했다. 트론은 다시 발을 떼었다. 그녀는 잡힐 것처럼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나 엘피를 향해 걸어가는 길이 이상할 정도로 멀었다. 걸어도 걸어도 그녀가 서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윽고 더 기다려 주기 힘들다는 듯 그녀가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 기세에 그녀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얗고 가녀린 어깨와 깊게 파인 등이 그대로 드러났다.
트론은 바람에 날려 온 숄을 잡으면서도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피는 문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문은 여전히 조금 열린 채,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엘피가 간간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 발을 내디딘 끝에 트론은 문 앞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하게 될 거야.”
트론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어린 소년이었다. 새카만 머리칼과 눈, 무뚝뚝한 표정.
열두 살 남짓한 과거의 자신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회한다고?”
“응. 그 문을 열어서는 안 돼.”
“어째서?”
소년은 서글프게 웃었다.
“깨닫게 되거든. 외면해 왔던 사실을.”
“……?”
“하지만 새삼스럽긴 하네. 언젠가 끝이 온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나는 이제 소년이 아니니까.”
눈 깜짝할 새 소년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 자신과 똑 닮은 청년이 손을 뻗어 트론의 눈을 가렸다.
“그래도 잠시나마 그 무지를 즐기도록 해.”
서서히 사방이 밝아졌다. 아, 꿈이었구나. 점차 깨어나는 걸 느끼며 트론은 숨을 뱉었다.
희미하게 꿈의 자취가 사라져 가는 중에도, 아쉬움을 느꼈다.
역시 문을 열고 엘피가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
“으음, 예상은 했습니다만. 역시 마그달리사 공의 혼인 동맹 제안을 거절하셨군요.”
가이가 반짝이는 은발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씁쓸하게 말했다.
“상담하지 않고 거절했다고 비난하나?”
“아뇨, 어디까지나 주군의 선택인걸요. 제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요.”
“그런 것 치고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위기인데.”
“신하 된 자로서 객관적으로 잃은 것에 대해 얼마든지 잔소리야 할 수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그걸 모르고 결정하신 것도 아닌데 말해 봤자 무엇하겠습니까.”
엘피는 두 손을 모으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가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트론이 선택한 길이 편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말해도 괜찮다.”
“됐습니다아. 솔직히 정치적인 계산을 다 빼고 순수하게 제 마음만 따지자면, 거절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다행이라고?”
“전하 같은 사람하고 정략결혼을 할 영애가 가여우니까요. 뭐, 그 이야기는 이쯤 하죠. 어차피 이제 와서 마그달리사 공에게 어제 했던 말이 농담이라고 물릴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행히 가이도 더 문제 삼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트론이 결혼 상대로 좋지 않다는 것처럼 들려서 엘피는 약간 샐쭉해졌다.
“음, 그래.”
하지만 트론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소파의 팔받이를 두드렸다.
“이제 중요한 건 내일 있을 마수 토벌 행사 문제다. 시녀장의 예언도 있고, 어젯밤 일로 보아 마그달리사 영애가 폭발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방어망을 뚫고 몰래 루베인 님한테 마법 전보를 보낼 수 있나 확인했는데, 어려워 보입니다. 예전과 다르게 마법 방어막이 무척 견고하거든요.”
“그대가 앓는 소리를 낼 정도면 수준급인가 보군.”
“자존심 상하지만, 솔직히 손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라면 이름이 알려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고요. 계속 추적은 해 보겠습니다.”
“……그래.”
트론은 잠시 눈을 내리떴다. 마그달리사 공작은 많은 것을 준비했다고 했고,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이 마그달리사의 힘 하나만은 아니라고 했다. 마법사 역시 그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이번 선택으로 잃게 된 것이 막대하다는 것을 트론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선택을 무를 생각이 없는 이상, 할 일은 남아 있는 수를 검토하는 것뿐이었다.
엘피가 고개를 들며 다음 안건을 이야기했다.
“루베인의 성격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물결 꽃을 따기 위해 도망칠 겁니다. 저희가 모르는 새에 마수가 있는 위험한 구역으로 가면 큰일이에요.”
그녀가 제 아비의 말대로 얌전히 드레스를 입고 트로피 역할을 할 리가 없다. 부친의 눈을 피해 행사장에서 마수 토벌이 벌어지는 협곡으로 진입할 가능성이 컸다.
혹은, 아예 호텔에서 탈출하여 바로 마수 서식지인 협곡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겠군.”
“선수요?”
“그녀가 위험한 행동을 하기 전에 접촉하는 거다.”
가이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퍼졌다.
“호텔에 잠입하는 건가요! 뭔가 옛날 스파이 소설 같아서 두근두근하는데요.”
“재미를 따질 문제인가?”
가이는 트론의 면박에도 굴하지 않고 손을 펼쳤다.
“어디 보자, 그 호텔이라면 저희 가문 쪽에서도 연줄을 댈 수 있으니까요. 흠……. 역시 호텔 직원으로 가장하고 몰래 들어가는 방법이 좋겠네요!”
엘피가 손을 들며 나섰다.
“그렇다면 그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두 분은 바쁘시기도 하고, 얼굴도 많이 알려졌으니까요. 보안상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고요.”
“엘피 님도 아름다워서 눈에 띄지만…… 뭐, 머리를 올리고 모자를 푹 눌러쓰면 인상이 바뀔 테니 괜찮으려나요.”
트론은 잠시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그 제안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사먼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이번 마수 토벌 때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사먼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엘피가 잠입에 실패하여 그쪽에 붙들린다고 해도, 신분을 밝힌다면 신변에 큰 위험이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엘피는 루베인의 친구였고,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되어서 몰래 들어왔다는 핑계라도 대면 그만이니까.
마그달리사 공작 쪽에서 트론에게 싫은 소리 정도는 할지 모르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부탁하기로 하지.”
“네, 왕자님! 맡겨 주세요.”
“문제는, 그 후에 루베인 님을 붙들어 놓는 거겠네요. 빠져나가려고 막무가내로 굴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물론 루베인이 쉽게 납득할 것 같진 않지만, 제가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제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마수가 있는 곳에 가지는 않을 것 같고요.”
“그 부분은 그대를 믿겠다.”
“네!”
가이는 바로 호텔을 통해 잠입할 수 있도록 연락을 하겠다며 집무실을 나섰다.
“혹시 중간에 들킬 것 같으면 그냥 귀족패를 보이고 신분을 밝히도록 해. 내 이름을 말해도 되고.”
“왕자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할게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상황을 봐서 난처한 일이 생기면 아일란을 통해서 르터바이스 소백작과 상담하는 것도 괜찮을 거다.”
“네, 그럴게요. 전하야말로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 있으면 아나이테로 가이 님에게 연락 꼭 하셔야 해요.”
“그래, 알겠다.”
엘피는 그제야 안심한 듯 살포시 웃었다. 트론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려고 팔을 올렸다가 바로 자제했다.
“……?”
“아니, 아무것도. 내일에 앞서 검토할 것들이 있으니 이만 물러나도 좋다.”
“알겠습니다. 저도 소백작님 오시는 대로 준비할게요.”
이후 가이가 계획을 정리해 왔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미리 호텔 측에 전달해 놓은 스케줄에 따르면, 공작은 점심쯤 느지막하게 마수 토벌 행사장인 협곡 입구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마 트론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개회식을 보지 않고 늦게 참석한 후 형식적으로 상품만 전달할 생각인 듯했다.
한편, 루베인은 현재 호텔 별채에 연금당하여 식사를 따로 챙겨서 들여보낸다는 모양이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루베인을 대동하여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나면 그녀의 움직임을 제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엘피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이 출발하기 전에 루베인에게 접촉하는 것이었다.
하녀로 가장해 아침을 가져다주는 척 접촉하는 방법이 최선으로 보였다.
“엘피 님이 입을 호텔의 하녀복은 미리 챙겨 둘게요. 와, 벌써부터 두근두근하네요!”
“……저는 다른 의미로 두근두근하지만요. 그래도 루베인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잘 설득할게요.”
“네, 옥새 때도 잘해 주셨는걸요. 엘피 님을 믿습니다.”
별일 없을 것이다. 루베인도 트론도 무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마치 불길한 예감이 스미는 것처럼.
엘피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