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1)
“……헛소리를.”
“헛소리라니,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충정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충정으로 자신의 딸을 팔아 치운다니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였다.
“성인도 되셨으니 슬슬 반려를 생각하실 때가 아니신지요.”
“나는 혼인할 생각이 없다.”
“기반이 잡힌 후에 혼인하고 싶으신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약혼을 먼저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앞으로도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눌 이유는 없는 것 같군.”
미소 짓던 마그달리사 공작의 얼굴이 점차 서늘해졌다.
“전하께서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나도 나지만, 마그달리사 영애 본인도 기꺼워하지 않을 거다.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혼인을 추진해서 무엇이 남는가.”
“굳건한 동맹과 막대한 이득이 남겠지요.”
“…….”
“전하.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은 마그달리사의 힘 하나만이 아닙니다. 저는 그간 많은 것을 준비해 왔습니다.”
트론은 무표정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셈법이지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의 옆자리는 좋은 곳이 아니야. 그대의 딸을 불행하게 만들지 마.”
“공작가의 딸로 태어난 아이가 겨우 남녀 간의 사랑을 갈구하겠습니까.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감정에 들뜨는 것은 이해합니다.”
“뭐?”
“총애하는 아랫것이 있으시다고요. 아비 된 자로서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정부 한둘 들이시는 것쯤이야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 계집을 비로 삼지는 못하실 것 아닙니까.”
“…….”
트론의 안광이 형형했다. 당장이라도 눈에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할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정부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분별없는 짓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왕자님 본인께서 그 폐해를 체험하셨으니까요. ……설마, 아랫것을 정말로 비로 삼겠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트론은 난간을 쾅 내리쳤다. 공작이 누구를 두고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허술함에 환멸이 들었다.
“왕족에 대한 무례한 언사가 도를 지나쳤다, 마그달리사 공작.”
“……송구합니다, 전하.”
공작이 가증스럽게 눈을 내리깔았으나, 그 사과에는 조금의 진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대는 집안의 가신과 그대를 붙여 추잡스러운 뒷소문을 지껄이면 기쁘게 받아들일 텐가?”
“…….”
“돌아가도록 해. 아무래도 그대의 딸을 개인으로서 존중하라는 내 충고는 다 잊은 모양이군.”
트론의 말이 완벽한 거절을 뜻한다는 것을 마그달리사 공작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트론 스레데니옴은 기울어진 입지에서 시작하여 그동안 완벽하게 정치적 난관을 돌파해 왔다.
그랬던 그가,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면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 패를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혼인이라는 절차에 사랑이라느니 진심이라느니 하는 치기 어린 꿈이라도 꾸고 계시는 겁니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그달리사 공.”
르터바이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에 트론의 망토가 흔들렸다. 그의 눈빛만은 마그달리사 공작을 향해 얼어붙은 듯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옆자리에 누구를 앉혀 두든 불쾌할 뿐이야.”
“…….”
“따라서, 혼인 같은 소름 끼치는 짓을 할 생각이 없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역시 나와의 혼인 따위 불쾌하기만 하겠지. 자신의 딸로 거래하려 들지 마.”
“겨우 그런 감정적인 이유로 일을 그르치는 분이셨습니까. 제 눈도 흐려졌나 보군요.”
마그달리사 공작은 비소하며 파티 회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트론의 말도 안 되는 변 따위는 믿지 않았다. 후사를 낳아야 하는 왕이 혼인을 하지 않겠다니, 대체 누가 믿을 말인가.
분명 자신의 딸이 마음에 차지 않아 돌려 거절하는 것이리라. 공작은 극심한 모멸감을 삼켰다.
“몇 번 도움을 받았던 의리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당신은 그만큼 확실하고도 견고한 패를 집어던졌습니다.”
“…….”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지요.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
“루베인, 돌아가자꾸나.”
마그달리사 공작은 곧바로 자신의 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루베인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가 마그달리사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자제하고 있는 건지 아시나요?”
“무슨 소리지?”
“각하.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멋대로 상품으로 걸지 마세요.”
루베인의 말을 듣고 공작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개인으로서 존중해 달라느니,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를 할 셈이냐? 그런 소리를 또 듣게 되다니 피곤하구나. 나는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여유가 없어.”
마그달리사 공작은 바로 보좌관에게 눈짓을 했다.
보좌관과 호위들이 재빨리 루베인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녀가 무언가 소리치는 것보다 그들이 루베인의 입을 막는 게 먼저였다.
그들은 주변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루베인을 둘러싼 후 억지로 끌고 갔다.
이어서 마그달리사 공작도 회장을 나섰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엘피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가이를 돌아보았다.
“왕자님과 얘기가 잘 안 된 걸까요?”
“그랬을 것 같네요. 대충 무슨 이야기를 꺼냈을지도 짐작 가고요.”
“어떤 이야기요?”
가이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제 입으로 말씀드리는 건 좀 그러네요. 이젠 농담으로 넘어가기 어려워졌으니까요.”
“……?”
“아, 왕자님도 나오시네요. 아마 제 예상대로라면 전하께서도 바로 돌아가실 것 같지만요.”
그 말대로 트론이 테라스에서 나와 가이와 엘피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 얼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가 오간 것일까 걱정하며 엘피는 손을 모았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시녀장. 나는 먼저 처소로 돌아가겠다.”
“아…… 그럼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주최자인 소백작의 파트너가 없어서야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신경 쓰지 말도록.”
트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압적이었다. 엘피는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는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바로 회장을 나갔다.
순식간에 파티장에서 가장 주목을 받던 이들이 빠져나가자 회장의 분위기가 다소 썰렁해졌다.
가이는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엘피를 향해 양해를 구했다.
“아무래도 회장 분위기를 띄우려면 여기저기 얼굴을 좀 비춰야 할 것 같습니다. 피곤하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네,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왕자님께는 그것만 끝나고 가 보셔도 된답니다.”
“……아.”
그녀는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은 마그달리사 공작과 트론이 신경 쓰였지만, 우선 그 의문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
가이를 따라 인사 순회를 마친 후, 엘피는 바로 회장을 빠져나와 별채로 향했다. 르터바이스에 머무는 동안 트론이 쓰는 처소였다.
어두운 별채에서 유일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곳은 집무실이었다. 이럴 때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점이 무척 트론다웠다.
“왕자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엘피?”
보통 때라면 바로 허락이 떨어졌을 텐데,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 사실에 의문을 느낄 무렵, “들어와.”라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파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망토와 상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은 트론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겉옷만 대충 벗은 듯 셔츠 차림이었다.
“시종이라도 불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시고요.”
“혼자 있고 싶어서.”
트론이 심기가 불편했던 적은 많았지만, 지금까지 봐 왔던 중에서도 가장 안 좋아 보였다.
그와 마그달리사 공작 사이에 있었던 일이 궁금한 것보다 먼저, 그 기분을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엘피는 흐트러진 옷들을 집어 정리한 후 트론이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론. 일단,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옷시중 내가 도울게.”
엘피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트론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그녀는 트론의 기색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편이었지만, 이렇게 때때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싫어?”
“……글쎄.”
“잠깐, 손 잡아도 될까?”
엘피는 비장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트론은 언제나 스킨십을 하면 마음을 풀어 주었으니까.
그런데 트론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고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론……?”
“엘피. 안아 봐도 될까?”
“응, 얼마든지.”
엘피가 안기 편하게 팔을 벌리자, 트론은 그녀를 감싸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한가 보구나.”
“…….”
“역시 일은 그만하고 자는 게 좋겠어. 침실로 돌아가자. 내가 얼른 잠옷으로 갈아입혀 줄게.”
그 순간, 트론이 잠깐 몸을 떼어 냈다 싶더니 엘피를 안아서 들어 올렸다.
“로, 론! 피곤한 사람이 무슨 짓이야. 내 발로 걸을게!”
“괜찮아.”
“무겁잖아! 얼른 내려 줘!”
“음……. 안 무겁다고 하면 된다고 했던가?”
“지금 그걸 기억해 줘도 안 기뻐!”
버둥거리며 내려 달라고 항의했지만 엘피를 안고 있는 트론의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트론이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을 때까지 엘피는 바닥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정말, 왜 심술이야.”
“심술인가?”
엘피의 옆에 앉으며 트론은 다시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엘피는 침대에 푹 쓰러졌다. 머리핀이 머리를 찔러서 엘피가 무의식중에 눈을 찡그리자, 트론이 그 머리핀을 풀어 주었다.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이 금사처럼 침대보 위에 흩어졌다.
“나보다 엘피 옷차림이 더 불편할 것 같은데.”
“그야 회장에서 바로 왔으니까 그렇지.”
트론은 자신의 품 안에 누워 있는 엘피를 내려다보았다.
빈틈없이 꾸민 회장에서의 모습과 달리, 그녀는 어딘지 풀어진 분위기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목 안이 뜨거웠다. 정확히는 온몸이 뜨거웠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엘피는 간지러운 듯 몸을 움츠리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마그달리사 공작이 안 좋은 소리 했어?”
그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트론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허술함에 화가 났던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인데, 이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소중한 가신이자 유일한 라이샤, 또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였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언급한 것처럼 지저분한 오해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나는.”
“응?”
트론을 따라 엘피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내가 빨리 왕이 되는 걸 원하겠지?”
“으음, 꼭 빨리…… 라기보다는. 위험하고 힘든 일 없이 무사히 왕좌에 앉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그래. 그럼 내가 안정적으로 왕이 될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걸 어리석다고 생각하겠네.”
엘피는 순간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트론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듯 쥐었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딸과의 혼인을 제안했거든. 동맹을 조건으로.”
엘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