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7)
트론은 본인이 말한 대로 엘피의 드레스를 맞춰 주기 위해 올페마의 중심가로 향했다. 엘피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가이가 희희낙락하여 예약한 ‘부티크 클로와’에 가기 위해서였다.
클로와는 올페마에서 가장 큰 곳으로, 현재 수도에서 가장 예약 열기가 뜨거운 부티크의 수석 디자이너의 제자가 차린 가게였다.
올페마의 상업 단지는 이전보다 번성해 있었다. 고아원 건축 과정에서 발견된 마법 유전 덕에 르터바이스 영지는 역대 최고로 부흥기를 맞이했다. 최북단이라는 위치적 리스크가 문제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마법 유전은 의미가 컸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품질 좋고 귀중한 것들이 모인다. 예술적인 영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에는 올페마가 수도에 버금가는 패션의 중심지가 되지 않겠느냐는 예측도 심심치 않게 돌고 있었다.
그런 최근의 전성기를 나타내는 듯, 최고급 크리스털로 빛을 돋보이게 연출한 클로와의 쇼윈도에는 수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멋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엘피는 마차에서 내린 후 상상 이상으로 화려한 가게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로와라고 합니다.”
가게 주인인 그녀가 일부러 직접 문밖까지 나와 두 사람을 환영했다. 지배인과 시종들이 정중하게 트론과 엘피를 귀빈실로 모셨다.
“조금 더 시간을 주셨다면 새로운 옷을 디자인했을 터인데, 시한이 촉박하여 레디메이드뿐인 것이 장인으로서 아쉽습니다. 러플이나 리본의 위치 변경 등, 간단한 수정은 가능합니다.”
“그대의 솜씨를 믿도록 하지.”
트론의 말을 듣고 클로와는 반색했다.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해 영애에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전하께서는 옷을 새로 맞추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미안하지만 내가 입을 옷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그도 그렇겠군요. 모쪼록 언젠가 전하께 어울리는 옷을 지을 기회를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자, 영애는 이쪽으로…….”
엘피는 우물쭈물하다가 트론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후 직원들을 따라갔다. 그 표정은 지금부터 화려하게 변신하는 걸 기뻐한다기보다는, 장시간의 노동을 각오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트론의 옷을 고를 때는 들떠서 야단스러운 주제에, 정작 자신을 꾸미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트론은 엘피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예 대기할 걸 생각해서 일거리를 가져온 트론은 서류를 넘기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
‘역시 힘들어…….’
엘피는 기진맥진하여 몇 번째인지 모를 드레스를 몸에 걸쳤다.
부티크의 직원들은 엘피를 피팅룸으로 데려가자마자 치수를 잰 다음 그녀의 피부 톤이나 체형 등을 고려하여 어울리는 스타일과 색깔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잠시 그 모습을 남 일처럼 구경하는 것도 잠시, 엘피 본인의 취향을 질문받았다. 기세에 눌려 “아무거나요…….”라고 답한 것이 실수였다. 끝없이 실어 나르는 드레스의 향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드레스 스타일을 하나로 지정할 걸 그랬어.’
옷을 자주 맞추어서 요령이 있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나, 엘피는 드레스에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없기도 했고, 평소 일할 때 입는 수수한 드레스 외에는 화려한 옷이 필요할 일도 없었다.
패션에 아예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가끔 카탈로그를 구경하며 눈이 즐거운 정도로 만족했다.
‘으음, 앞으로도 그냥 루베인 같은 미인이 걸친 옷을 보는 것으로 끝내자.’
그렇게 자신을 꾸밀 의욕이 점차 사그라드는 와중, 엘피는 즐거운 생각을 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나라 최고 미인은 왕자님지만 말이야. 이젠 커 버려서 드레스 입어도 안 어울리시겠지. 아니야, 체형을 커버하는 드레스면 키 큰 미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어릴 때 화려한 드레스를 트론에게 입혀 보지 못한 원통함을 망상으로 풀기 시작했다. 현실도피라고도 할 수 있었다.
‘……으음. 그래도 역시 왕자님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게 제일 멋있으니까. 이번 파티 때 입으실 옷도 기대된다.’
트론의 의상은 은사로 섬세한 무늬를 아로새긴 상의에, 마치 휘장처럼 겹겹이 천을 덧대고 사이사이에 루비를 흩뿌린 화려한 옷이었다.
연미복을 차려입은 트론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절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클로와가 베일을 대며 색깔을 보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드레스 완성되는 거 상상하셨나요?”
“아…… 아뇨. 전하께서 파티 때 입을 의상을 생각했어요.”
엘피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차 싶었다. 트론의 의상은 이 부티크에서 맞춘 것이 아닌데 실례되는 소리였을까. 그러나 클로와는 별로 기분 상한 기색 없이 웃었다.
“아아, 그랬군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중요하겠네요.”
“……?”
“전하가 파티 때 입으실 의상은 색상이 어떻게 되죠?”
“어, 바탕은 검은색이고, 은사와 루비를 장식했어요.”
“흠, 알겠습니다.”
무언가 고민하던 클로와가 직원에게 몇몇 샘플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엘피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클로와는 눈웃음치며 엘피의 어깨를 감쌌다.
“걱정하지 마세요. 파티에서 누구보다 돋보이도록! 전하와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이도록! 힘쓸 테니까요.”
“네?”
엘피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자신과 트론의 사이를 오해한 것 같았다.
“저, 저기. 무언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전하의 시녀장이고, 보좌하러 파티에 참석하는 것뿐이에요.”
“아아,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알겠습니다. 노골적으로 티가 안 나는 방향 말씀이지요.”
“정말로 오해이십니다.”
클로와는 “네, 네.” 하고 대답했지만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엘피는 난처해졌다. 이대로는 정색하고 따져 봤자, 정곡이 찔려서 그러는 거라고 느껴질 상황이었다.
이어서 직원들이 덧대는 천들도 트론 의상의 포인트 컬러를 의식한 것인지 붉은색이 많았다. 이대로는 정말 커플룩이 될지도 모른다. 엘피는 정신을 차리고 제지했다.
“붉은색 드레스는 피해 주세요.”
“어머나. 후후. 그럼 장식이나 리본에 포인트 컬러로 넣어서 가볍게 통일성을 줄까요?”
“붉은색은 일절 빼 주셨으면 해요.”
클로와는 무척 귀여운 걸 보는 듯한 눈으로 엘피를 바라봤다가 알겠다고 답했다. 오해는 풀리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파티에서 괜한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파티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있어야겠어.’
엘피는 그렇게 홀로 결심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끝에 드레스 후보는 열 종류로 좁혀졌다.
클로와는 엘피에게 그중 하나를 입히고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는 바로 트론이 있는 귀빈실로 엘피를 데려갔다.
“전하, 많이 기다리셨죠. 지금부터 골라 온 드레스를 보여드릴 테니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엘피가 입은 드레스는 연한 옥색 천을 섬세한 레이스로 감싼 품위 있는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화려한 디자인과 붉은색을 피했기에 파티 드레스로는 다소 심심한 감이 있었으나, 퍽 잘 어울렸다.
트론은 고개를 들고 엘피를 바라보았다가 옅게 웃었다. 뒤에 있던 클로와가 입을 가리며 보이지 않게 감탄했다. 냉랭한 분위기의 절세 미남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제법 파괴력이 컸다.
“그대가 고른 거지?”
“네. 앞으로 아홉 벌 더 있지만요…….”
“응. 그럼 됐다. 그 드레스들 전부 가봉해서 르터바이스 본저로 배달하도록.”
엘피는 경악했다. 이곳의 드레스 한 벌만 해도 자신이 궁내부에서 받는 연봉의 반은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엘피가 채 반응할 새도 없이 클로와가 장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색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원하신다면 드레스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다루는 가게도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트론은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은 샘플을 가지고 르터바이스 본저로 와 줬으면 하는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괜찮으신 시간 말씀해 주시면 바로 방문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알았다.”
“왕자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엘피가 당황하여 말리려 했으나, 트론은 단호했다.
“내 부탁이라고 해도?”
“…….”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칙이었다. 엘피는 결국 눈을 내리깔며 항복했다.
그렇게 트론은 부티크의 매상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엘피와 함께 르터바이스 본저로 돌아갔다.
***
“어머, 마그달리사 공작님. 예약 시간보다 빨리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트론과 교대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마그달리사 공작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클로와가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녀는 노련한 솜씨로 이번 파티에서 공작이 입기로 한 옷의 마지막 시착 및 가봉 확인을 진행했다.
“저희가 보내드린 후보 중 따님의 의상은 결정되셨나요?”
“거의 고른 것으로 알고 있다. 내일이나 모레쯤 호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겠습니다.”
“음. 그나저나 가게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 같은데……?”
클로와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방금 큰 손님이 다녀가셔서, 가봉할 분량이 많은지라 다들 분주하답니다.”
“트론 전하인가 보군.”
“어머, 아셨군요.”
마그달리사 공작은 마무리된 재킷을 벗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에게 큰 손님이라고 말할 정도면 그분 정도밖에 없겠지.”
“제가 어리석은 소리를 했네요.”
“흠. 그런데 전하께서 이렇게 늦게 옷을 결정하셨나?”
“아, 그게…….”
손님의 개인 정보이기에 대답하는 것을 꺼리는 와중, 밖에서 뛰어다니던 직원 한 명이 클로와를 불렀다.
“수석님, 급하게 죄송합니다. 방금 오신 손님의 드레스에 쓰일 레이스를 확인해야…….”
“어디 감히 귀빈실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니. 썩 물러가.”
“죄, 죄송합니다!”
직원이 화들짝 놀라 사과하고 나갔다. 클로와는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불쾌하게 만든 점을 사과했다.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장갑을 꼈다.
“됐다, 거의 끝나기도 했고.”
“정말 송구합니다.”
“그건 그렇고, 과연. 전하께서 계집에게 옷을 선물한 모양이군.”
클로와는 대답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런 얼굴 할 건 없다. 어차피 왕족들이 혼외 관계를 만드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지. 수치스러운 일이긴 하다만.”
“공작께서는 부부 사이가 각별하시니 더 그렇게 느끼시겠습니다.”
“흠, 쓸데없는 소리가 길었군. 그럼 루베인의 의상 마무리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음 행선지는 어디신가요? 그에 맞춰 의상을 다시 다듬어 드리겠습니다.”
공작이라면 굳이 부티크에 들를 것도 없이 호텔로 직원을 불러 옷을 마무리하면 그만이다. 다른 곳에 가는 김에 겸사겸사 일을 처리하려고 이곳에 들렀으리라 클로와는 짐작했다.
그러나 마그달리사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모자를 썼다.
“교단에 가는 길이다. 딱히 옷에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것 같군.”
“괜한 참견 죄송합니다. 살펴서 들어가십시오.”
오늘의 두 번째 큰 손님을 배웅하고 클로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단에 예배가 없는 날일 텐데? 기도라도 하러 가시는 건가.’
하지만 가벼운 의문은 곧 그녀의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지금 당장 가봉할 드레스들이 산더미였다. 그녀는 바로 귀빈실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