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6)
‘뭐, 나 때문에 끊어진 이야기는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알아서 하시겠지.’
가이는 여느 때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본제로 들어갔다. 트론이 약재가 되는 ‘달물결 꽃’을 구하기 위해 마수 토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행사의 절차가 그렇습니다. 참가자들이 마수를 잡고, 서식지에 있는 달물결 꽃을 꺾어 오게 되어 있지요. 일종의 관례라고 할까요. 이번에 전하께서 참석하시는 이유는 꽃이 주목적이지만요.”
엘피는 그 말을 듣자마자 트론이 위험에 빠질까 봐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변경백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한 일이다 보니 말리지는 못했다.
엘피와 달리 트론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르터바이스 가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이름이 ‘달 물결’이었지.”
“아아, 처음 올페마에 오셨을 때 두 분이랑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 말이군요. 그 꽃 이름에서 따온 것 맞습니다.”
“……특별한 꽃인 거죠?”
엘피가 조심스럽게 묻자, 가이는 흘러내려 온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답했다.
“대충 그렇죠? 마수가 서식하는 곳에서만 자라는 꽃이다 보니, 보기 드물어서요. 꽃의 성장 상태에 따라서 약효가 천차만별이기도 하고요. 레스토랑의 이름으로 딴 건 영지에 전해지는 설화 때문입니다만.”
“설화요?”
“별로 유명하진 않아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다느니 하는 우울한 내용이라서 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가이는 영양가 없는 잡담을 늘어놓은 후, 트론을 향했다.
“솔직히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데요, 전하. 문제는 아버님이 요구하는 수준의 꽃은 무척 찾아내기 까다롭다는 사실입니다.”
“응, 그럴 것 같았다.”
“그만큼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예요. 특히 봄에는 마수들의 움직임이 흉포하니,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엘피는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핏기가 사라져 그 손이 새하얘졌다.
“괜찮아. 혼자 가지는 않을 거고, 단신으로 마수 여럿에 덤빌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적당히 기척을 숨기며 목적한 물건만 가져올 생각이니 염려 말도록 해.”
“으음……. 그럼 무슨 일 생기시면 꼭 아나이테를 통해 저를 불러 주셔야 합니다. 바로 포털을 생성할 테니까요.”
“알았다.”
트론은 대답하며 흘끔 엘피 쪽을 훔쳐보았다. 그녀의 손뿐만 아니라 얼굴도 창백해져 있었다. 나중에 달래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화제를 넘겼다.
“전야제 쪽은 특별한 일 없나?”
“네, 일단 헤럴드 측의 끄나풀들은 참석자 명단에 없습니다. 우회적으로 들어올 가능성이야 있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뭔가를 꾸미는 기색은 없네요.”
“하긴, 오히려 마그달리사 공작이 파티에 참석하는 게 이례적인 일이지.”
“그렇죠. 굳이 따지자면 매년 열리는 지역 축제 같은 거라 주목할 만한 일도 아니고요. 전하께서 오신 걸 빼면 말이죠.”
가이는 부러 마음을 써서 엘피를 배려하는 말을 건넸다.
“엘피 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 호위는 충분히 붙일 거고, 당일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저도 잘 서포트할 겁니다. 그러니까 즐거운 이야기를 하죠. 파티 때 왕자님한테 어떤 의상을 입힐지 같은 거!”
여전히 엘피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가이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인지 “네…….” 하고 작게 답변했다.
“맞다, 그리고 엘피 님도 파티에 참석하시는 게 어때요?”
“저는 괜찮습니다.”
“에이, 빼지 마세요. 언뜻 듣기로 엘피 님, 수도에서 왕자님 시중만 들고 사신다면서요. 모처럼 멀리 왔으니 어깨에 힘 빼고 즐기세요.”
“말씀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녀는 단호했다. 가이는 이럴 줄 알았으면 파티 화제를 먼저 꺼낼 걸 하고 후회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두 사람이 풀어야 하는 문제 같았다. 가이는 이번 건에 한해서는 적극적으로 엘피의 편을 들기 어려웠다. 모친의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보니 트론이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약재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무튼, 마수 서식지 내부 지도라거나, 서식하는 마수 종류라거나, 필요한 것들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부탁할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
“응.”
“그럼 두 분 별채에서 쉬세요. 저녁 식사 때 다시 뵙죠.”
가이는 시종을 불러 두 사람을 별채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트론과 엘피가 나간 후 한숨을 폭 내쉰 가이는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부디 저녁은 우울한 분위기에서 먹지 않도록 엘피 님을 잘 달래 주세요, 왕자님.”
그렇게 본인에게 들리지 않을 응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
트론의 외출복을 벗기며 옷 시중을 드는 동안에도 엘피는 저기압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티가 나도록 토라진 경우는 십중팔구 트론이 자기 몸을 함부로 할 때였다.
“쉬십시오, 전하. 저녁 식사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말투 역시 노골적으로 평소보다 딱딱해졌다. 침대에 앉아 있던 트론은 나가려고 하는 엘피의 손목을 잡았다.
“누나.”
“…….”
“이쪽 봐 봐.”
마지못한 듯 엘피가 트론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짙은 하늘색 눈이 불안한 듯 떨렸다. 트론은 힘을 주어 엘피를 자신 쪽으로 당긴 후 무릎 위에 앉혔다.
“화났어?”
“아냐, 그런 거.”
“누나는 티가 잘 나니까,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어.”
트론은 왼팔로 엘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아프려고 하는 일도 아니고, 다치려고 하는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화 풀어.”
“론…….”
엘피의 긴 속눈썹이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는 망설이듯 트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트론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루베인이 마수 때문에 다치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불안해서. 물론 론이랑 루베인의 상황이 같지 않은 건 알아. 그래도 불안해.”
“응.”
“그리고 스스로가 못나게 느껴져.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검술이라도 열심히 배워 둘 걸 그랬나 봐.”
트론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만에 하나 그녀가 검을 쓸 줄 안다고 해도, 그는 엘피를 위험한 곳에 동반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달래듯이 엘피의 등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그녀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속물 같은 소리, 해도 돼?”
“해도 돼.”
“안 미워할 거야?”
“안 미워해.”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엘피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뗐다.
“낮에 변경백 각하를 만나 쾌차하기를 바란다고 그랬으면서 말이야……. 막상 론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다른 방법은 안 될까, 뒤로 미루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해 버렸어.”
“…….”
“……나한테는 론이 우선이니까. 그렇지만 신세를 진 좋은 분한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못됐잖아. 론이 알면 실망하겠지 싶어서, 더 우울해졌어. 론한테 화가 났다거나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트론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가슴이 들끓는 것 같기도 하고, 꽉 조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희열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가까웠다.
엘피가 우선하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그 말이 새삼스럽게 기뻤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소백작이나 르터바이스 부군도 나보다는 변경백을 우선시하지만, 그게 못된 건 아니잖아?”
“……응. 맞아.”
“그러니까 엘도 우울해하지 마.”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더 바싹 닿았다. 엘피는 다시 한번 트론의 심장 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들며 안심한 듯 웃었다.
“하긴, 그분들에게 변경백이 가족인 것처럼, 나한테는 론이 가족이니까. 당연한 거네.”
그 답변을 듣고, 트론은 순간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무척 괴로운 것 같기도 했다.
가족인 척 소꿉놀이를 하는 한, 엘피는 자신의 곁에 있어 줄 것이다. 여전히 그녀의 애정은 확고했고, 그렇다면 엘피의 말은 순수하게 기뻐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꾹 눌린 것처럼 답답했다.
“론?”
“……아니. 아무튼, 걱정하지 마. 누나.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응. 믿을게.”
긴장이 풀렸는지 엘피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트론은 이끌리듯 입술로 그 눈물을 훑었다. 뺨에 닿는 그의 감촉이 간지러운 듯 몸을 움츠렸다가, 엘피가 실소했다.
“나도 참, 눈물이 너무 많아진 것 같아.”
“누나는 원래 눈물이 많잖아.”
엘피를 안으며 트론은 다시 뺨에 키스했다.
“후후, 그래도 이제 멈췄어. 우리 어머님이 유모 시절에 이렇게 달래 준 거 떠올랐나 보구나. 고마워, 론.”
엘피는 보답하는 것처럼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비빈 후 몸을 떼었다.
“에이 참, 이렇게 나만 위로받아서야 시녀 실격이네. 이제 기운 낼게!”
온기가 떨어지는 것을 아쉽게 느끼며 트론은 엘피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옷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응?”
“파티에 정말 참석 안 할 거야?”
“응, 관심 없어서…….”
역시 엘피는 파티에 그다지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루베인이 착각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억지로 파티 참석을 권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한편으로, 눈부시게 꾸민 그녀를 보고 싶기도 했다.
“난, 누나랑 파티 가고 싶은데.”
트론은 침대에 앉은 채 조금 불쌍한 듯한 얼굴로 엘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엘피는 트론의 그런 얼굴에 약했다. 심지어 어릴 때처럼 올려다보는 것도 반칙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치사해.”
“싫어?”
“안 싫으니까 그러지…….”
트론 한정으로 무척 무른 엘피였다.
“알았어, 론이 원하는 거면 얼마든지 참석하고말고.”
“그럼 드레스 맞추러 가자.”
“응? 대충 가져온 옷 아무거나 입으면 돼.”
“맞추러 갈 거다. 그대도 자신의 위치에 합당한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야.”
어디서 스위치가 눌렸는지 갑자기 트론이 왕자님 모드로 돌아갔다. 엘피는 눈을 깜빡이다가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네,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어느 쪽이든, 엘피는 트론 한정으로 물렀다.
***
마그달리사 공작은 예정보다 빠르게 올페마에 도착했다.
루베인은 자신의 부친이 돌아올 때에 맞춰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이제 직접 눈에 보이게 반항하지 않을 정도로는 처세술이 몸에 익었다.
“오셨어요, 각하.”
“그래. 그동안 별 탈 없이 지냈느냐.”
“네, 물론이죠.”
시종과 시녀들 몰래 탈출해서 남장을 하고 돌아오는 바람에 다들 기겁하는 소소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몇 마디 환담을 나눈 후 루베인은 조심스럽게 마그달리사 공작에게 물었다.
“각하. 저, 일부러 르터바이스 영지에 온 이유를 아직도 듣지 못했습니다만.”
“아, 그랬지.”
공작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며 시종에게 지시한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나저나 루베인. 보나 마나 올페마에 와서도 트론 전하를 만나 뵙고 왔겠지?”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랬습니다.”
“아니, 혼내려는 건 아니다. 편한 대로 하려무나.”
그럼 굳이 트론에 대해 물은 이유는 무엇일까. 루베인은 새삼스레 위화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지난 3년 동안에도 마그달리사 공작은 딱히 그 일로 루베인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물론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난처해지는 일이 없도록, 트론과 교류하는 걸 남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소리 정도는 들었다.
부친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녀는 그 말을 지켰다. 그렇기에 트론이 시키는 일도 어디까지나 수면 아래에서 처리했다.
‘……각하도 은근히 왕자님한테 힘을 실어 줄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시종이 품에 한가득 꽃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연남색의 꽃잎과 노란빛의 꽃술이 어우러져 달이 떠 있는 어슴푸레한 새벽을 형상화한 듯한 꽃이었다.
“아, 이번에 상용화하는 달물결 꽃이군요. 그런데 이건 어째서…….”
마그달리사 공작은 그 꽃다발을 루베인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얼떨결에 받아 들자, 그가 흡족한 듯 끄덕였다.
“그래, 역시 내 딸이야. 잘 어울리는구나. 집사장, 루베인과 이 꽃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를 준비하도록 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루베인이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공작은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파티는 가장 유용한 홍보 수단 중 하나니까 말이다.”
그녀는 그제야 부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트론이 참석하여 주목도가 높아진 파티에 달물결 꽃을 장식한 루베인을 등장시켜 광고용으로 써먹을 모양이었다.
그런 면이 참으로 부친다워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