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3)
“다 됐다! 장하다, 나!”
엘피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을 칭찬했다.
아직 트론에게 직접 전달받은 것은 아니지만, 엘피도 그를 보좌하여 르터바이스 영지에 같이 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리를 비우는 사이의 일을 생각해서 미리 업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목을 돌리니 우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요즘 운동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내일부터는 산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가 서재를 노크했다.
“누구세요?”
“나다.”
“저, 전하?”
엘피는 깜짝 놀라 문으로 달려갔다. 트론이 어딘지 단정하지 못한 차림을 하고 서재에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풀려 있는 그의 셔츠 윗 단추를 채워 주며 엘피가 물었다.
“론, 무슨 일 있었어?”
“시녀장. 할 이야기가 있다.”
그녀의 친근한 질문을 트론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엘피는 동요했다. 그는 일 이야기를 꺼낼 때 딱딱하게 말하곤 하지만, 뉘앙스가 평소와 달랐다.
‘……화나신 것 같아.’
엘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무언가 실책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엘피는 황급히 트론에게서 손을 뗐다.
“마, 말씀하세요.”
“내가 없는 곳에서 아랫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나?”
“네……?”
엘피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트론의 질문을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시녀들이 그대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느냐고 묻는 거다.”
그녀는 다소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콕 집어서 문제가 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나 시종이 아닌 왕궁의 시녀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초기에는 헤럴드의 입김이 강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갔다.
후계 구도에서 트론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연줄을 댈 속셈으로 자신의 딸을 일부러 시녀로 보내는 귀족들도 여럿 존재했다.
그런 상황에서 트론의 시녀장인 엘피의 위치는 애매했다. 복권하지 않아 아무런 작위가 없는 준귀족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론에게 대놓고 지적을 당할 만큼 노골적인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시녀들은 엘피의 지시를 따랐고, 예의 없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형성하여 그 안에 엘피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을 뿐이다.
사적인 교우 관계야 개개인의 자유고, 종종 화제에서 따돌림당하거나 벽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어도, 그걸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려웠다.
“전하께서 염려하실 만한 문제는 없습니다. 시녀들 모두 왕자님께 충심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아. 그대를 업신여기는 일이 없는지 듣고 싶다.”
“그런 일 없었습니다.”
“내가 직접 들었다고 하는데도?”
“……전하께서요?”
“응.”
“저기……. 전하께서는 믿기 어려우실 수도 있지만, 정말 별일 없습니다. 으음, 굳이 따지자면 시녀들과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억지로 저와 친하게 지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트론은 잠시 엘피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대로 책상에 앉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정말로?”
“정말로요. 혹시 시녀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이라도 들으셨나요? 그런 건 어쩔 수 없죠. 당사자 몰래 불만을 말하는 거야 자유잖아요. 그것까지 막는 건 부당한 처사입니다.”
“…….”
그녀는 무언가 숨기는 걸 못 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말하는 바로 미루어 보건대, 시녀들과 개인적인 교류만 없을 뿐, 업무적으로 무시를 받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시녀에게 들었던 말을 굳이 엘피에게 들려줄 이유는 없었다. 모르던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속상해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트론의 손길이 살며시 엘피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여전히 의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역시, 그대가 복권하는 게 좋았을까.”
“그 이야기는 한참 전에 끝났잖아요, 전하. 저는 영지를 다스릴 생각이 없어요. 앞으로도 계속 전하 곁에 있고 싶으니까요.”
트론은 자신의 곁에 있는 미래를 말하는 그녀를 보며 안심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을 강제한 까닭에 그녀가 업신여김을 받거나,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시녀들을 모조리 잘라 버리고 싶었지만, 일하던 사람들이 나가고 공백이 생겨 새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오히려 엘피를 고생시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 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 해도 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아니면 작위를 줄 테니, 영지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대는 내 곁에 있어도 돼.”
“그건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저는 지금 영지를 맡길 만한 다른 가족도 없는걸요. 뭐, 결혼해서 남편에게 맡기는 방법은 있겠네요.”
엘피는 농담 삼아서 한 소리였지만, 트론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
“전하?”
“결혼하고 싶나?”
“네에? 에이, 왜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세요. 함부로 농담도 못 하겠어요.”
“하지만…….”
트론은 아까 그 건방진 시녀가 입에 담았던 말을 떠올렸다.
“시, 시녀장님이……. 요, 요즘 친밀히 만나는 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엘피가 누구와 어떻게 지낸다 해도 그녀의 자유였다. 그에 토를 달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 시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그 말이 떠오르는 순간, 트론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엘피와 외부를 잇는 모든 연결 고리를 끊고 싶어지는, 폭력적인 충동이었다.
“……결혼할 생각이면 미리 말해 줘. 누나.”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로 튀는 거야! 난 결혼할 생각 없어!”
“그래도 언젠가, 그런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전혀 안 그래. 만약에 결혼하더라도 론이 결혼한 다음이겠지.”
트론은 말없이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하고 박았다. 엘피가 장난치듯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는 왕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파멸이 예정된 왕의 옆자리에 누군가를 앉히는 것은 같이 죽어 달라는 소리와 같았다. 굳이 동반 자살자를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정말 그것뿐인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엘피를 만난 이후로 그는 자신의 낯선 감정과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엘피도 아무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꽉 닫힌 아늑한 공간에 그저 그녀와 둘이서만 있고 싶었다.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런 꿈같은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 망상을 하는 동시에 그는 미래의 일을 계산하고 있었다.
트론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듯 엘피를 끌어안았다.
어릴 때는 올려다보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보다 훨씬 작아졌다. 품 안에 완전히 가둬 둘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때처럼 거리낌 없이 트론을 쓰다듬으며 동생처럼 애정을 주었다.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엘피의 귀가 부드러워 보였다. 트론은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
“잠깐, 간지러워!”
“어흥.”
“그만하세요, 맹수님.”
엘피가 그의 몸을 밀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론이 걱정하는 건 알겠어. 나도 시녀장이니까……. 권위 없이 굴지는 않을 거야. 내가 무시당하는 건 론이 무시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인걸.”
“…….”
“괜찮아, 그래서 일 열심히 하고 있어! 신분이 낮은 직장 상사보다는 일 못 하는 상사가 꼴사납잖아. 앞으로도 노력할게.”
그녀가 바삐 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트론은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엘피 역시 자신이 헤집어 놓은 트론의 머리를 정돈해 준 다음 책상에서 내려왔다.
“하실 말씀은 그것뿐인가요, 왕자님?”
“아……. 아니다.”
트론은 어딘지 달뜬 기분을 누르며 침착하게 고했다.
“곧 르터바이스 영지에 방문할 생각이니 그대도 준비하도록 해.”
엘피가 예측한 그대로의 명이었다.
***
엘피는 자기 전에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왕자님께서 르터바이스령에서 또 무모한 일을 벌이시는 것 아닌지 걱정돼. 왕자님의 힘이 되고 싶어. 알고 싶어…….’
그녀가 조사한 내용과 실제로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해 보자면, 라이샤의 힘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으로 발휘되었다.
다만, 엘피는 여전히 라이샤의 힘을 발동하는 리스크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 제시드는 6년간 모습을 감췄다. 그 후 나타나서 루베인을 위해 자신의 힘을 완전히 써 버리고 소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잔류 사념’이라느니 ‘나의 이야기는 실패했다’느니 하는 의문투성이의 말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근대에 등장한 2명의 라이샤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크니 제쳐 두고, 그 전에 존재했던 4명의 라이샤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 모두 공백 기간이 있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년 단위로 라이샤에 대한 기록이 없는 시기가 존재했다. 우연으로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공통점이었다.
‘……역시 라이샤의 힘을 써서 중간에 사라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엘피는 웬만해서 라이샤의 힘을 남발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트론이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병을 고치려다 무모하게 생명력을 깎지 않을지 염려되었다. 그렇게 트론을 걱정하다가 그녀는 어느 순간 잠에 빠졌다.
사방이 어두웠다. 엘피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샤로서 보는 꿈의 시작은 항상 꿈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주변이 밝아지며 배경이 바뀌었다. 아직 겨울의 기색이 남아 있는 깊은 숲이었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긁는 듯한 기분 나쁜 마찰음이 울렸다. 쇠붙이가 챙챙 부딪히는 소리도 이어졌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엘피는 헉, 하는 소리를 냈다.
루베인이 마수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몸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메뚜기 같은 마수가 그녀의 등을 후려쳤다. 큰 상처를 입은 루베인이 저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부딪혀 몇 번 꿈틀대던 루베인이 맥없이 손발을 축 늘어뜨렸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꽉 쥐었다.
‘루베인이 또 위험한 거야……?’
엘피는 3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루베인이 독 때문에 죽는 것을 꿈으로 보았다. 가슴이 기분 나쁠 정도로 쿵쾅댔다.
사방이 다시 검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점차 의식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