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2)
루베인은 현재까지도 직속령과 작위를 물려받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성인이 되기 전에 작위를 물려받고 마그달리사의 방계가 되면서 새로운 성을 부여받아야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마그달리사 영애’로서 남아 있었다.
처음에 작위를 거부했던 것은 고아원 설립을 위한 치기 어린 투정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루베인은 귀족이라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가족에게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면 아무런 작위를 받지 않은 준귀족으로 독립하여 혼자서 생활을 꾸려 나갈 예정이었다. 귀족이라는 체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선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그달리사 공작이 루베인에게 작위를 빨리 물려받으라는 잔소리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작위는 언제 받겠느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루베인이 얼버무려도 크게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친이 조용한 것이 불안하기도 했다.
루베인은 트론의 명으로 마그달리사 영지 내의 정치적 움직임을 트론에게 전하는 한편, 복지 분야에 대한 기획 및 시행도 담당하고 있었다.
루베인 본인이 가장 관심이 큰 분야이기도 하니 적재적소의 배치라고 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행정관 시험 칠 거야.’
지금은 다소 편법적으로 정식 직위 없이 트론을 돕고 있지만, 역시 자신의 힘으로 아래에서부터 올라가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름대로의 미래 계획을 설계하고 있었다.
오늘도 루베인은 고아원을 시찰하러 나갔다가 기분 좋게 하븐의 본가로 돌아왔다.
교외에서부터 말을 타고 들어온 그녀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을 향했다.
흙먼지가 온몸에 묻어 지저분했지만, 그녀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했다. 기르지 않고 계속 짧게 쳐서 단발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은 중성적인 분위기의 루베인에게 꼭 어울렸다. 이제 소녀라기보다는 성인 여성에 가까워졌지만, 생기 넘치는 소년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루베인.”
루베인이 안채로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어머님.”
“……또 이상한 곳에 갔다 온 거니.”
“이상한 곳이 아니라, 고아원이요. 어머님, 일단 저 씻고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옷 갈아입으면 티룸으로 오렴.”
“네.”
루베인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짧게 답했다.
샤워를 끝내고 티룸으로 가 보니, 삼 단 트레이에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어차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형식을 따지는 게 마그달리사 공작부인다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좋게도 나쁘게도 귀족적인 사람이었다. 내성적이라서 바깥 교류를 피하고 있을 뿐,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예상한 대로 공작부인은 루베인의 옷차림을 보고 정색했다.
“루베인. 아무리 조촐한 티타임이라지만, 그런 옷차림은 무례하단다.”
루베인의 옷은 방 안에서만 입는 슈미즈 드레스였다.
“으음, 저는 그냥 잠시 이야기만 나누는 건 줄 알고요.”
“후우. 다음부터 주의하렴. 일단 앉거라.”
“네.”
차를 마시며 몇 마디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마그달리사 부인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루베인. 내일 올페마로 떠나야 할 것 같다.”
“네? 르터바이스 영지로요?”
“그래.”
루베인은 당황했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중간 소식통인 가이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때 딱히 르터바이스 영지로 와 달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어째서죠?”
“각하의 분부란다.”
“각하께서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우선 너를 보내고 나중에 가실 것 같다고 하는구나.”
“혹시 이유는 들으셨나요?”
“글쎄,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다른 부분을 신신당부하셨지.”
“다른 부분이요?”
마그달리사 공작부인은 뺨에 손을 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짐을 철저하게 챙겨서 사내놈 같은 옷은 절대 넣지 말고 잘 꾸며서 보내라고.”
“…….”
절대 좋은 의미로 르터바이스 영지에 가는 것이 아니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왕자님은 요즘 어떠신가요?”
엘피가 찻잔을 감싸며 질문했다. 물론 트론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는 엘피가 트론의 일반적인 안부를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수면 아래’에서 트론에게 무슨 일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녀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푸른 머리의 청년, 사먼이 성실하게 답했다.
“요즘은 별일 없습니다. 엘피 님도 아시는 것처럼 데니옴 회의 이후로는 주군을 향한 공격이 표면으로 올라왔으니까요. 물론 계속 주술이나 독살 위험이 없도록 저희 쪽에서도 방비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정치 안건에서 부딪치거나 공격당하는 일이 잦네요.”
“저한테 숨기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네, 믿고 있어요.”
엘피가 안심한 듯 온화하게 웃었다.
“계속 이러면 좋을 텐데요. 무사히 전하께서 왕좌에 앉으실 때까지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게 저희 연합의 숙원이기도 하고요.”
“이 나라에서 주술사의 권리를 되찾는 것이었던가요.”
“네.”
사먼이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는데, 사먼은 그렇게 되면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여동생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싶네요.”
“…….”
엘피는 눈을 내리깔았다.
주술사는 묘지에 안치될 수 없었다. 교단은 주술사라는 존재를 신에게 저주받은 가엾은 생명체 정도로 규정하고 있었다. 죽은 후에 그 몸은 땅을 오염시키니 묻지 말고 화장하라고 가르쳤다.
이 악습은 여전히 남아, 주술사는 무덤으로 쓸 땅을 법적으로 얻을 수 없었다.
“뼛가루를 묻어 봤자 무슨 의미인가 싶긴 하지만요. 교전에 의하면 그 몸이 땅으로 돌아가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모양이니까요. 제 여동생은 환생하지 못하겠죠?”
“……아녜요. 분명히 다시 태어나서 행복해질 거예요.”
그녀는 라이샤면서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신비를 직접 체험했는데도 그러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신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교단에서 설파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자애롭게 굽어살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신을 믿고 섬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신은 그렇게 그녀 안에서 모호한 존재였다.
엘피는 환생했고, 회귀했으며, 꿈으로 미래를 보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그러나 환생 이후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아픔을 교훈 삼아 회귀 후에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다.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사람의 힘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주술사라는 존재는 다시 태어나지 말라고 막는 신이라면, 이쪽이 사양하고 싶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여동생도 기뻐할 거예요.”
“……네.”
“아, 그리고 이건 어차피 전하께서도 엘피 님에게 말씀하실 것 같긴 한데요. 조만간 주군께서 르터바이스 영지로 가실 것 같습니다.”
“어머. 무슨 일 있나요?”
“일단 제가 알기로는,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병환을 치유하는 주술 연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자, 잠깐만요!”
엘피가 사먼의 말을 가로막았다.
“치유 주술은 본인 목숨이랑 맞바꿔야 하지 않나요? 설마, 전하께서 본인 수명을 깎으시려는 거예요?”
“저도 치유 주술은 전문이 아니라서, 자세한 건 잘 모르겠네요…….”
“…….”
엘피는 미간을 찌푸렸다. 르터바이스 변경백이 쾌차하기를 그녀 역시 항상 빌고 있었지만, 트론이 자신을 희생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
그날 업무를 마친 트론은 빠른 걸음으로 왕자궁에 돌아왔다.
시종과 시녀들이 고개를 숙여 그를 맞이했다. 먼 과거에 천덕꾸러기로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격차였다.
왕자궁 내부는 항상 반짝반짝 손질되었고, 수많은 사용인이 궁의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트론은 기본적으로 실용적인 걸 중시하는 성미였기에 권위를 과시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대외적으로 얕보이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시녀장은?”
“서재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마무리되는 대로 전하께 얼굴 비추시겠다고 합니다.”
“알겠다.”
엘피는 궁내부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왕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궁 내부에서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왕궁을 오가는 사용인을 부리는 것이나 행사의 진행 등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왕비가 총책임자를 담당하겠지만, 왕궁에서 왕을 대리하고 있는 트론은 아직 비가 없다. 그래서 그의 시녀장인 엘피가 그 일을 대신했다.
트론은 그녀가 고생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엘피는 ‘전하야말로 과로하지 마세요……’라며 어이없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르터바이스 가문을 통하여 유능하고 믿을 만한 이들을 엘피의 곁에 여럿 붙였으니 괜찮을 것이다.
‘서로 바빠서 얼굴 보는 시간이 줄어들긴 했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트론이 방문을 열고 처소로 들어가자, 뒤에서 시녀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뭐지.”
“옷시중 들어드리겠습니다, 전하.”
요즘 들어 묘하게 얼굴을 자주 보던 시녀였다.
그녀는 기회만 있으면 트론에게 가까이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괜찮다.”
트론의 거절에도 시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시, 시녀장님께서 바쁘니 대신 전하를 보필하라 일렀습니다.”
“…….”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뚱해졌지만, 엘피가 아니면 알아보기 어려운 변화였다.
“알았다.”
짧게 허락하고 트론은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서로 다망해진 이후, 옷시중을 다른 사람이 맡는 경우가 잦아졌다.
옷매무새를 마무리해 주는 시녀의 손길이 어딘지 떨리는 것도 약간 짜증이 났다. 트론은 빨리 끝내고 엘피를 보러 가고 싶었다.
“다, 다 됐습니다. 전하.”
“수고했다.”
시녀의 얼굴이 붉었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드레스룸에서 나갔다.
“저, 전하!”
그러나 시녀가 바로 물러나지 않고 트론을 불렀다. 용무가 끝난 마당에 왜 그러나 하고 트론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그런 트론의 기세에 압도당할 만한데도, 그녀는 더듬어 가며 꿋꿋이 말했다.
“시, 시녀장님이……. 요, 요즘 친밀히 만나는 남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
“궁의 시종인지 외간 남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주, 주의를 주시는 게…….”
트론은 그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싸늘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일개 시녀가 시녀장의 처우를 논할 수 있게 됐지?”
“아…… 그게, 저는……. 레퀴 후작의 차녀입니다!”
“그래서?”
“다,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작위도 없는 몰락 가문의 딸을 시녀장으로 계속 삼고 계신 것이, 위아래가 없는 일이라고…….”
트론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가고 있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에 바빠서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가.”
“네?”
“짐을 싸서 그대의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궁내부에서 퇴직금은 따로 전달될 거다.”
“저, 전하……!”
“아니면 위병에게 끌려가고 싶나?”
그녀는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저은 다음 후들거리는 다리로 트론의 방을 나갔다.
트론은 그녀가 입혀 준 옷이 기분 나빠져서 주술로 가루를 내 버리고는 아무 옷이나 걸쳐 입었다. 그리고 빠르게 엘피가 있는 서재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