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연모와 소년기의 끝자락 (1)
봄을 맞이한 하븐은 꽃의 도시답게 곳곳에 꽃이 만개했다.
특히 하븐에 있는 국내 최대의 식물원은 제철을 맞이하여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북적이는 식물원 부지의 한편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구역이 있었다. 꽃의 품종 개량과 대량 재배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 연구동 안에서 백금발의 중년 남성, 칼퍼 마그달리사 공작이 꽃을 꺾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군요. 처음 보는 품종 같은데요?”
그의 옆에 있던 보랏빛 머리의 청년이 묻자, 마그달리사 공작이 끄덕였다.
“맞소이다. 마수들의 서식지에서만 사는 달물결 꽃을 개량하여 키우는 연구였지요.”
“굉장하군요. 달물결 꽃이라면 귀한 약재로 쓰이지 않나요?”
“그랬지요. 다만…… 개량된 이 꽃은 약 성분이 없습니다. 관상용 외에는 의미가 없을 것 같군요.”
“저런, 아쉬우시겠습니다.”
“원래 연구라는 것이 100번 시도하여 단 하나의 보물을 찾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마그달리사 공작은 달물결 꽃의 줄기를 잡아 칭칭 묶어 작은 꽃다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꽃다발을 눈앞의 청년, 렌포우 솔피시언 공작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관상용으로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될 것 같소이다. 기념으로 이번에 가장 먼저 시장에 출고될 이 꽃을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시들지 않으면 좋겠네요.”
“그 꽃의 장점 중 하나가 관리만 잘하면 2주까지 거뜬하다는 것입니다. 관리 요령은 가르쳐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장식용 꽃으로 손색이 없군요. 모쪼록 좋은 상품이 되길 빌겠습니다.”
“고맙소.”
마그달리사 공작은 꽃을 꺾느라 손에 묻은 풀물을 닦아 냈다.
솔피시언 공작은 꽃다발을 이리저리 돌리며 모양새를 구경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트론 전하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더군요.”
“그렇지요. 수도의 백성들은 거의 트론 전하를 왕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수도뿐이겠습니까. 저희 영지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븐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유리 저편을 바라보며 마그달리사 공작이 중얼거렸다.
“다만, 혼외자라는 것은 계속 트론 전하의 장애물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당장 교단에서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을 테니까요.”
“‘신의 보증’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현재로서는 교단의 압박이 유명무실하지 않소이까.”
스레데니옴의 건국과 맞닿아 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과거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왕위를 계승할 때 신이 선택한 정당한 왕이라는 것을 교단이 보증하는 의식인 ‘신의 보증’, 왕이 배우자를 맞이했을 때 그 혼인을 신 앞에 축복하는 의식인 ‘신의 축복’은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교단의 권위가 가장 컸던 시대에는, 왕위를 물려받는 쪽이 신의 보증을 받지 못할까 봐 교단장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신비는 점차 묻혀 갔다. 사람들은 점차 신탁금을 내지 않아도 신이 천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50년 전 마지막 라이샤의 등장 이후 왕실과 사이가 나빠지는 바람에 탄압을 받아 교단의 세력이 더 줄어든 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현재에 이르러서 교단은 교인들이 모이는 친목의 장이자 형식적인 행사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금도 ‘신의 보증’과 ‘신의 축복’ 의식은 이어지고 있지만, 형식에 불과할 뿐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유명무실한 것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의 힘이지요.”
솔피시언 공작이 연남색의 꽃잎을 어루만지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마그달리사 공. 이렇게 멋진 꽃을 키워 내신 것처럼, 그대들의 자식들도 훌륭하게 키워 내셨지요. 그런 당신을 믿습니다.”
“글쎄요, 자식 둘 다 부족할 따름이지요.”
“겸손하시기는. 그럼 다음에 다시 뵙지요. 그때가 되면 서로 바빠지겠군요.”
“그렇겠지요. 그때 뵙겠소이다. 조심해서 들어가시오.”
솔피시언 공작이 가볍게 눈으로 인사한 후 출구를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달물결 꽃 관리 요령은 어떻게 되지요?”
“아아…….”
마그달리사 공작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꽃다발에서 가장 시들시들한 꽃송이를 물에 집어넣으세요. 그 영양분을 먹으면 다른 꽃들이 생생해진답니다. 마지막으로 한 송이가 남을 때까지 반복하면 됩니다.”
“과연. 마수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꽃답군요.”
만족한 듯 웃음을 터뜨리고 솔피시언 공작은 온실을 뒤로했다.
***
엘피는 왕자궁의 회랑을 종종걸음으로 가로질렀다. 들이치는 아침 햇살에 그녀의 금발이 빛을 반사하여 반짝였다.
왕자궁으로 복귀하고 약 3년.
계속 기르고 있던 머리칼은 어깨를 넘어 찰랑찰랑하게 윤기가 났다. 갈색으로 물들였던 염색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곧 열아홉 살 생일을 맞이하는 엘피는 이제 소녀라기보다 성숙한 여인에 가까웠다.
동글동글했던 얼굴선은 가늘어졌고, 상냥해 보이는 눈매도 어린 티가 많이 가셨다. 점차 회귀 전 그 시기의 외견에 가까워져 갔다.
그녀는 왕자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전하.”
“응. 좋은 아침.”
트론은 침대 머리에 기댄 채 책을 읽다가 엘피를 향해 옅게 웃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후 트론에게 다가갔다. 책을 덮어 옆으로 치우며 트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이야, 누나?”
“……요즘 아침에 깨우러 오면 론이 거의 일어나 있잖아. 재미가 없어.”
“내가 자는 얼굴이 재밌어?”
“그것보단, 잠이 덜 깬 론이 재밌어.”
그 말을 듣자마자 트론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러고는 엘피를 와락 끌어안아 침대로 쓰러뜨렸다.
“아하하, 론, 간지러워! 관둬!”
“잠에 덜 깬 게 재미있다며.”
트론은 곧잘 깨우러 온 엘피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고 다시 잠들곤 했다.
“정확히는 잠에 취해서 어리광부리는 게 귀엽단 말이야.”
“……내가 언제?”
“와, 기억 못 하는 척한다.”
엘피는 머리칼을 헤집으며 그의 정수리에 뺨을 비볐다.
“이렇게 딱 붙어서 고양이처럼 굴기도 하고, ‘5분만 더……’ 하면서 칭얼거리기도 하고. 얼마나 귀여운데.”
“…….”
트론은 엘피가 자신을 어린아이 대하듯 만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몸을 떼었다.
“이렇게 큰 고양이가 있어?”
“글쎄, 맹수 중에도 고양이 과가 있으니까 비슷한 거 아닐까?”
“어흥.”
성의 없는 맹수 흉내를 내며 트론이 엘피의 손가락을 잘근 씹었다.
엘피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잠에서 깬 론도 재밌다고 인정해 줄게.”
“안 기쁜데.”
“에이, 삐치지 마.”
트론은 대꾸하지 않고 누워 있는 그녀를 꼭 안았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에 닿아 간질거렸다.
‘후후, 귀여워. 이제 다 컸으니 누나한테서 졸업해야 할 때인데 말이야.’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엘피는 새삼 트론의 성장을 실감했다.
어릴 때는 껴안으면 트론이 자신의 품에 묻혔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트론의 품에 완전히 묻힌다.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미성이지만 톤이 낮아졌다. 오래된 상처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어 볼 때마다 속상하긴 하지만,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몸은 예술품에 가까웠다.
그가 점점 성인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큰 행복이었다.
‘그래도 아직 열여섯인걸. 우리 왕자님은 어릴 때 어리광도 못 부렸으니까, 그만큼 내가 대신 받아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겨도 엘피의 눈에는 여전히 귀엽고 어린 동생이었다.
“전하, 오늘 바쁘다고 하셨잖아요. 그만 일어나세요.”
“……으음.”
트론이 아쉬운 듯 엘피를 다시 한번 꽉 안았다가 풀어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엘피의 재촉에 욕실로 들어갔다.
***
트론은 최근 엘피와 닿을 때마다 느끼는 정체불명의 열기가 곤혹스러웠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의지대로 제어하는 편이었으며, 모든 일을 이성적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엘피를 상대로는 날뛰는 감정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감정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는 포기했으나, 그래도 내색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행동이 충동에 순응했다.
기회가 있으면 엘피를 만지고 싶었다. 품에 안았을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금발이 사르륵 손에 닿았다가 흩어지는 느낌, 그가 아는 어떤 꽃보다도 매혹적인 향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후각이 멀쩡한 걸 감사해야 할까.’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사라진 미각이 아쉬워졌다. 그녀의 손가락을 물었을 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척 달콤할 것 같은데.
다시 몸이, 또한 마음이 뜨거워졌다. 트론은 애써 머릿속에서 엘피를 몰아내며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올렸다.
한참 일을 해서 머리를 식히고 있으려니, 갑자기 공중에서 푸드덕 소리를 내며 반투명한 비둘기가 나타났다.
“아나이테?”
아나이테는 얼른 트론의 정수리에 올라앉아 청년의 목소리를 전했다.
[전하, 오랜만이에요! 저 보고 싶으셨죠? 어서 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세요.]
“……용건은?”
[히잉.]
여느 때처럼 차갑게 대꾸했지만, 트론의 표정은 이전보다 따스했다.
“그리고 오랜만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대가 데니옴에서 떠난 게 한 달 전이니.”
[한 달도 충분히 길거든요! 전하께서는 정말 정이 없으세요, 흥, 칫, 핏!]
“용건.”
마치 가이의 실망한 기색을 전달하는 것처럼 아나이테가 힘없이 날갯짓하여 책상에 내려와 트론과 마주 보았다.
[알겠습니다아……. 일단 처필은 지난번 벌인 사업을 끔찍하게 말아먹어서 요즘 곤란한 상황 같습니다. 데하스는 관망하고 있는 것 같고요. 특별한 움직임은 없네요.]
“처필이 계속 실책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커버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
[저쪽이 공멸해 주면 저희로서는 반갑지만요. 그 외에는, 솔피시언 공이 비밀리에 하븐을 방문했습니다. 루베인 님 정보예요. 마그달리사 공을 만난 것 같다고 합니다.]
“솔피시언…….”
트론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기색을 살피는 것처럼 가이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솔피시언이 계속 꺼림칙하신 거죠?]
“선왕비의 본가라는 것도 있고……. 데니옴 회의 이후 지나치게 움직임이 적어 형님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나 계속 의심했지만,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만큼 철저하게 감췄을 가능성이 크지요.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흔적이 안 나올 정도면, 행동을 꽤 조심하고 있나 봐요.]
“말러 형님은 몰라도 세틱스 형님이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지내는 건 신기한데…….”
[아니면, 예전의 왕자님처럼 여장이라도 하신 거 아닐까요?]
“…….”
트론이 도끼눈을 뜨고 아나이테를 노려보았다.
그에 위압된 것처럼 아나이테가 휙 날아올라 트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엘피 님하고는 어떠세요. 좋은 시간 보내고 계세요?]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지내고 있다.”
[그러신가요. 동생은 언제 졸업할 것 같으세요?]
“……계속 그녀의 동생일 텐데 졸업할 일이 있나?”
[하이고.]
가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뱉었다.
[이래서 아이한테 정서 교육이 중요한 거네요. 대체 몇 년째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한데.”
[아뇨……. 예민한 시기니까 저도 그만 건드릴게요. 전하는 뭔가 용건 없으세요?]
“음, 그렇잖아도 조만간 연락할 생각이었다.”
트론이 손가락을 얽어 턱을 괴었다.
“르터바이스 영지에 방문할까 해.”
[어, 그야 환영이긴 한데요. 무슨 일이세요?]
“그대의 부친이 와 달라고 하던데.”
[……그 사람은 왜 저도 안 통하고 전하한테 직접 건방진 소리를 한답니까?]
부자 사이는 여전히 안 좋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