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9)
엘피는 본궁에서 테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사먼에게 전해 듣고 마음을 추스르기까지 한참의 시간을 들였다.
결과적으로 트론도 가이도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위험이 도사리는 트론의 처지를 생각하면 심장이 꽉 눌리는 것만 같았다.
‘……왕자님께 티 낼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또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미래를 보는 것뿐이었다.
아직 자신이 라이샤가 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라이샤에 대해 조사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응접실에서 같이 기다리던 루베인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엘피는 트론이 걱정되는 마음에 잠기운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기다리다가, 새벽 1시가 넘어서 겨우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왕자님, 가이 님! 다녀오셨어요!”
엘피는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궁에 들어온 트론이 놀란 얼굴을 했다.
“왜 이 시각까지……?”
“두 분 기다리느라고요.”
“그러다 건강 해치세요, 엘피 님. 먼저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누워 봤자 잠도 안 왔을 거예요. 회의는 잘…… 마치신 거죠?”
트론이 표정 없이 끄덕였다. 옆에서 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염려해 주신 덕에 모두 의도대로 풀렸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명실공히 국왕 권한 대행이에요. 반쪽짜리긴 하지만.”
“정말 잘 됐어요! 아, 그나저나. 붙잡아서 죄송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두 분 다 얼른 쉬세요.”
“네에. 하아, 정말 지쳤어요.”
가이는 일부러 과장되게 삭신이 쑤신다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그래. 그대도 고생 많았다.”
“앗, 왕자님이 웬일로 순순하셔! 그럼 고생했다는 뜻으로 한번 안아 주실래요?”
트론은 가이를 껴안는 대신 그의 옆구리를 쳤다.
그 순간, 가이가 평소와 다르게 ‘윽’ 하는 소리를 내더니 풀썩 주저앉았다. 엘피가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하려 했다.
“가, 가이 님? 어디 아프세요?”
“아닙니다. 꾀병…… 꾀병이라고 치죠.”
한 손을 들어 엘피의 부축을 거절했으나, 그는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애매하게 앞으로 엎드린 채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소백작.”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가이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 전에 트론이 그의 팔을 덥석 붙들었다.
트론은 그대로 가이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전하, 엘피 님 앞인데요!”
“시끄럽다.”
이윽고 정복 사이에서 가이의 복부가 드러났다. 엄청난 피멍이 들어 있었다.
트론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심기 불편한 목소리를 냈다.
“……설명해.”
“진짜 별거 아닌데요.”
가이는 마지못해 설명을 시작했다. 구체로 만들어 낸 마법 보호막이 물리적인 타격을 완전히 흡수하는 것은 아니라서, 일부 충격을 몸으로 받았다는 모양이었다.
“그 말은, 물리적인 타격이 더 컸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긴 하죠?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저도 좀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여유가 있었으면 더 튼튼한 마법을 발동했을 텐데, 마법식을 구상할 시간이 부족해서요.”
여느 때처럼 기름칠을 한 듯 가이의 입은 잘 돌아갔지만, 정말로 아픈 것은 맞는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가이를 침대로 옮겨 놓은 후에도 트론의 표정은 언짢아 보였다. 엘피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가이에게 물었다.
“응급 처치라도 할까요? 깊은 밤이라 당장 주술사를 부르긴 힘들지만, 약 정도는 있으니까요.”
“됐어. 내가 하겠다.”
트론이 공중에 문양을 만들기 시작하자 가이가 손을 파닥거렸다.
“관두세요! 지금 전하도 무지하게 피곤하실 텐데 본인 목숨 깎아서 저 치료하시게요? 하룻밤 참는다고 저 안 죽어요.”
그 말을 듣고 엘피도 트론의 팔을 잡아서 말렸다. 그의 얼굴이 더욱 뚱해졌다.
“……앞으로 이런 거 하지 마.”
“이런 거요?”
“죽을 각오로 날 지킨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그대답지도 않아.”
“우와. 저 지금 충신 같지 않아요? 그쵸, 엘피 님?”
엘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무사하신 건 다행이지만……. 몸 상하시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두 분 다요.”
“아하하.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가이 님은 앞으로도 저랑 같이 오래오래 전하를 보좌하셔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본인 몸도 챙기세요.”
“뭔가 제가 그런 소리 듣는 거 신선하네요.”
가이가 키들키들 웃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웃는 것으로도 다친 부분에 무리가 가는 모양이었다.
“바르는 약이랑 진통제 챙겨 올게요. 잠시 계세요.”
엘피가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트론은 잠시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이가 누워 있는 머리맡에 풀썩 앉았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변경백을 볼 낯이 없어. 그러지 마.”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제가 즐겁고 좋은 일을 해요. 이 일도 제 의지입니다, 전하. 물론 죽을 생각은 없지만요. 엘피 님이랑 오래오래 전하 곁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트론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그대가 대가를 받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곁에 있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안다. 그걸로 괜찮아. 그러니까 죽지 말고 대가를 잘 받아서 떠나도록 해.”
“전하도 참…….”
가이가 잠깐 말문이 막힌 듯 끙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트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에 언제나 말로 매를 벌며 트론에게 지근거렸어도, 이런 식으로 먼저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트론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그 손을 막지는 않았다.
“이제 좀 엘피 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네요. 전하는 기본적으로 착해 빠졌습니다.”
“뭐?”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전하만큼 정직하게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도 없을걸요. 정직한 정도인가요, 아예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기까지 하죠.”
“필요한 일이라서 하는 것뿐이야.”
“하하. 전에 저희 각하가 그러셨거든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게 왕자님의 긍지일 거라고. 하지만 으음, 그렇게 피곤하게 사시지 마세요. 진짜로.”
트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마구 쓰다듬은 다음, 가이는 손을 뗐다.
“대가 같은 게 없어도 계속 곁에 있으라 그러세요. 협박이나 매수라도 하시고요. 안 되면 울면서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붙잡기라도 하세요.”
“무슨…….”
“불안하신 거죠? 저야 대가를 받을 때까지는 곁에 있겠지만, 엘피 님한테는 원하는 걸 돌려줄 수 없어서.”
트론이 숨을 삼켰다. 가이는 안경을 벗으며 히죽 웃었다.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어도 함께 지옥에서 살자고 협박 정도는 해야 폭군답지 않겠습니까.”
“…….”
“이상, 쾌락주의자 충신의 충언이었습니다아.”
길게 말끝을 늘이며 가이가 제 할 말을 마쳤다.
“아, 그리고 저한테는 하나만 해 주시면 계속 곁에 있어 드릴게요.”
“……?”
“형이라고 불러 주세요!”
“시끄럽다.”
“히잉.”
우는 시늉을 하던 가이가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를 부드럽게 하며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은 변경백과 똑 닮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는 르터바이스가 맞는가 봅니다, 나의 주군. 마지막까지 함께해 드릴 테니, 모쪼록 본인이 즐거우신 길을 찾으시기를.”
“…….”
트론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만 지켰다.
이윽고 엘피가 돌아와 물과 진통제를 챙겨 주고 가이의 상처를 치료했다. 병구완까지는 필요 없다며 가이는 손사래를 쳤다.
“그럼, 푹 주무세요. 가이 님. 내일 아침에 바로 치유 주술사를 부르겠습니다.”
“네에. 엘피 님도 늦게까지 감사했습니다. 푹 쉬세요.”
엘피가 먼저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트론은 침대 옆에 서서 가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은발을 꾹 잡아당겼다.
“……빨리 나아서 내일부터 일해. 소백작.”
“여기서는 형이라고 부르셔야 감동적인 대목인데요.”
“잠이나 자.”
트론이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가이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이렇게 말한다 해도 너무 많은 것에 짓눌려 온 저 소년이 바로 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모든 것을 의심하며, 모든 것에 공평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소녀 덕에 서서히 변해 왔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으음, 그래도 언젠가는 형이라고 불러 주세요. 전하…….”
그렇게 누적된 원한을 새로이 적립하며 가이는 잠에 빠졌다.
***
“전하도 얼른 주무세요. 많이 피곤하시죠?”
엘피가 트론이 입은 정복의 장식을 떼어 내며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지그시 엘피를 쳐다보았다.
“누나야말로.”
“아, 아냐. 오히려 저번에 마그달리사 공작이랑 회동 때 마중 못 해서 아쉬웠어. 그래서 오늘은 꼭 깨어 있으려고 한 거고.”
엘피는 얼른 무거운 망토와 복잡한 구조의 정복을 벗겼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트론의 옷시중은 대부분 그녀가 담당하고 있었다.
잠옷 셔츠의 단추를 채운 후 엘피는 그를 침대에 눕혔다. 트론은 그런 그녀의 목을 꽉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론?”
“잠시만…….”
그가 작게 속삭이며 엘피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정쩡한 자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엘피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누웠다.
“피곤해?”
“조금.”
“오늘 회의 잘 풀려서 그나마 다행이야. 위험한 일 당했다는 소리 듣고 진짜 심장이 덜컥했지만. 앞으로 그런 일 없으면 좋겠어.”
“응. 그래도 누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보단 나아.”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엉엉 울 거야.”
트론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가이 님한테도 한 소리지만, 론도 마찬가지야. 몸 상하는 일 없어야지.”
“응…….”
“그래야 곁에 있는 나도 계속 안심할 수 있어.”
엘피의 말은 끝없는 애정과 신뢰를 담고 있었다. 트론은 깊게 숨을 삼켰다.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어도 함께 지옥에서 살자고 협박 정도는 해야 폭군답지 않겠습니까.”
가이가 했던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트론은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긍지를 몰랐다.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온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근원적인 올곧음이 그가 살아온 궤도를 떠받쳤다. 그 또한 어떤 형태의 긍지였다.
“있잖아, 누나.”
트론은 팔로 몸을 지탱하며 누워 있는 엘피를 향해 몸을 숙였다. 숨이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고 해도 돼?”
부탁도 강요도 협박도 아닌, 확인에 가까운 말이었다.
“……?”
엘피는 그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트론의 곁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선택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이샤라는 거짓말이 진실로 바뀌었어도 그를 기만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트론에게 밝히지 못하는 비밀은 잔뜩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벌을 준다면 달게 받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정말로 만약에.
그가 모든 것을 알고 나서도 괜찮다고 한다면, 뻔뻔하게 계속 곁에 있고 싶었다. 그가 행복해질 미래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나중에 내가 쓸모없어져도, 무언가 잘못해도, 론의 곁에 있어도 될까?”
엘피가 되묻자, 그는 어딘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답했다.
“응.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줘.”
“그럼 론이 바라는 한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안심한 듯 작게 숨소리를 내며 트론이 다시 엘피를 껴안았다. 꽉 눌리는 그의 무게가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애틋했다.
맞닿아 있는 온도가 그저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도 살아 숨 쉬는 트론 스레데니옴이 미래를 그려 나갈 것이다.
유일한 가족, 생명의 은인, 충정을 바칠 주군. 존경하고 사모하는 그가 나아갈 길에 아주 작게나마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족했다.
그것만으로 가슴이 벅찼던 엘피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과 닿아 있는 소년이 품고 있는 감정이 그녀와 다른 열기를 품기 시작했음을.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경계선에서.
계절이 바뀌고, 풍경이 바뀌는 것처럼.
트론이 그 감정을 완전히 자각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마그달리사 공작이 열여섯 살이 된 트론에게 자신의 딸을 왕자비로 맞이할 것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