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8)
헤럴드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습니까.”
트론은 데하스 공작 쪽을 돌아보았다.
“데하스 공이라면 알지 않을까 싶은데.”
“…….”
그녀의 벌꿀빛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잠시 눈을 내리뜨던 데하스 공작은 생긋 웃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숙부님께 그 물건을 갖다 바친 자는 누구지?”
“일방적으로 전달받은 것뿐,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가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소했다.
“그럼 정체불명의 자가 보낸 아무 보증도 없는 물건을 ‘진짜 옥새’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옥새 위조에 관한 일은 셀토아 남작을 통하여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멜시아 꽃 재배로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했던 셀토아 남작은 가이에게 정보를 토해 냈다.
자신의 중계로 브요른 남작이 데하스 공작에게 위조 옥새 제작을 의뢰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데하스의 덜미를 잡기에는 부족했다. 그녀는 미소를 유지하며 받아쳤다.
“저도 옥새를 눈으로 본 적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트론 전하께서 가지고 있는 옥새도 마그달리사 공의 눈썰미 외에는 보증이 어려울 텐데요.”
트론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 옥새가 든 나무 상자를 앞에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반지 형태의 도장이 안에 들어 있었다.
매끄러운 금색의 반지 위를 커다란 붉은 보석이 장식했다. 보석에는 양각으로 스레데니옴 왕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옥새에 사용된 보석은 혈루석이지.”
극소량만 생산되는 무척 귀한 보석이었다. 이 보석은 루비와는 분위기가 다른 으스스한 핏빛 광택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의 중대한 특징이 있었다.
트론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냈다. 손톱 끝으로 상처를 짓이기자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테이블에 맺힌 핏방울에 옥새를 갖다 댔다. 혈루석은 게걸스럽게 그 핏방울을 흡수했다. 이내 테이블에는 피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처럼, 피를 흡수하는 보석이다. 데하스 공작. 숙부님의 옥새를 확인해도 되겠나?”
“전하의 손을 빌릴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녀는 시종관에게 페이퍼 나이프를 부탁했다. 그러고는 헤럴드의 앞에 있던 나무 상자에서 옥새를 꺼냈다. 트론의 것과 마찬가지로 붉은 보석이 달린 금색 반지였다.
데하스 공작은 페이퍼 나이프로 손바닥을 그은 후, 뚝뚝 흘러내리는 피에 옥새를 밀어 넣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흥건한 핏자국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
처음으로 데하스 공작의 얼굴에 동요가 보였다. 가이는 트론의 손가락을 마법으로 치유하다가 그 얼굴을 보고 옅게 웃었다.
헤럴드에게 넘어간 옥새에 쓰인 보석은 혈루석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데하스 공작은 위조 옥새의 보석에 쓰는 돈을 아끼는 머저리 같은 짓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가이가 셀토아 남작을 이용하여 틈새를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브요른 남작은 원래부터 옥새를 탈취해서 보험책으로 삼았을 정도로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인간이었다.
옥새를 만들 때 일부러 허술한 점을 남겨서 헤럴드의 약점을 쥐라는 셀토아 남작의 제안은 그에게 달콤했을 것이다.
처필과 데하스가 옥새의 진위 따위 물을 새도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트론을 눌러 버리는 상황이었다면 이런 퍼포먼스조차 필요 없었다.
그러나 처필은 자멸하여 불참했고, 데하스가 준비한 비장의 수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트론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데하스 공의 손도 치료해 줘.”
“네, 전하.”
트론은 다시 옥새를 나무 상자에 넣은 후 탁 소리를 내서 닫았다.
그의 시선은 헤럴드를 향했다. 헤럴드는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것만으로 고작인 듯했다. 목에 불거진 핏줄이 그의 분노를 말해 주고 있었다.
“옥새를 위조하여 숙부님을 욕보인 자가 존재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왕실을 욕보이는 것은 물론, 숙부님과 데하스 공까지 이렇게 놀아났으니 그 죄가 씻을 수 없이 깊군요.”
“…….”
“바로 범인을 찾아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데하스 공작이 분한 듯 입술을 꾹 씹었다.
“……그럼, 원래 안건으로 돌아갈까요.”
트론이 천진하게 웃으며 두 손을 깍지 꼈다.
“저는 형님들이 돌아올지 모르는 4년 반의 유예 기간 동안 위대한 군주 로라 2세의 전례에 따라…….”
공작들의 얼굴에, 또한 숙부의 얼굴에 천천히 시선을 보낸 그는 또렷하게 선언했다.
“숙부님께서 명예 대공직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회의는 밤늦게 겨우 끝이 났다. 그것도 정말 기본적인 사항만이 정해졌을 뿐, 실무로 이어지는 세부적인 내역은 앞으로도 꽤 긴 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데니옴 회의에서 크게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로라 2세의 전례를 참고하는 한편, 현재 상황에 맞춰 합의되었다.
첫째, 헤럴드 스레데니옴이 대공 자리를 맡는다. 영지가 존재하지 않는 한시적 명예직이나, 의전 및 처우는 공작 이상에 준한다.
둘째, 왕실이 결정해야 하는 모든 안건에 매번 공작 및 변경백이 협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서로 이해하고 인지한다.
셋째, 둘째 항에 따라 국군 통수권, 국가 긴급권, 작위 교지 등 왕실 고유 권한은 명예 대공인 헤럴드 스레데니옴과 왕자인 트론 스레데니옴 양측의 승인 후 진행한다.
넷째, 둘째 항에 따라 각 영지 간의 권익에 관련된 조정이 필요한 건을 제외한 행정 처리는 각 공작가의 고유 영역에 맡긴다.
다섯째, 비상 체계의 시행에 있어 이의 제기 및 분쟁 조정은 모든 이해 당사자가 성실한 자세로 임한다.
여섯째, 이상의 비상 체계는 왕세자 말러 스레데니옴 및 둘째 왕자 세틱스 스레데니옴의 실종 후 사망 선고 시한까지로 한다.
대략적인 틀은 이렇게 잡혔지만, 트론은 이 체계상에서 각 영지가 멋대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꾀하지 않도록 제어해야 했다.
헤럴드의 움직임 역시 그랬다. 이번 일로 한 풀 꺾긴 했지만, 전초전에 불과했다. 데하스와 처필의 세력도 여전히 건재했다.
하지만 트론은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목숨을 줄타기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비록 반쪽짜리라고는 하나 왕실의 권한을 쥐고 각 공작가를 제어하는 인물로서 대두한 것은 엄청난 도약이었다.
헤럴드는 당장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이 못마땅한 듯 보였지만, 명예 대공직 자체는 기껍게 받아들였다.
실제로 로라 2세는 대공직을 거쳐 왕이 되기도 했고, 왕에 버금가는 의전과 권한을 받을 수 있는 직책이라는 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략적인 논의가 끝나고 헤럴드와 각 공작들은 본궁에서 퇴장했다.
왕궁에 거처가 있는 트론이 가장 마지막으로 손님들을 배웅하듯 인사한 후 본궁에서 나왔다.
트론이 가이와 함께 서쪽에 있는 왕자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초록빛 머리의 화려한 차림을 한 중년 여성. 비에르카 라블미 백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론 전하.”
“……오랜만이군, 라블미 경.”
트론은 잠시 경계하면서도, 주변에 호위가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돌발적인 행동을 일으키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해 봤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을 것이고, 그가 아는 라블미 백작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잠시 내 스승과 이야기할 테니 떨어져 있도록.”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라블미 경도 나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겠지?”
“미천한 저의 마음을 바로 헤아려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과장된 감사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 준 후, 트론은 그녀와 함께 산책로를 걸었다.
휘영청 떠오른 달빛이 겨울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트론이 먼저 입을 뗐다.
“숙부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나?”
“당분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제 얼굴도 보지 않으시려 할 겁니다.”
“참모로서는 꽤 큰 실책이 이어졌는데, 신임을 잃을 것을 염려하지는 않는군.”
“데하스도 처필도, 헤럴드 전하를 믿는 게 아니라 저를 믿고 있으니까요.”
트론은 답하지 않고 쓰게 웃었다. 핏줄과 왕위 계승권 외에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인망이 없는 숙부의 처지가 조금 딱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웰칸을 생각하면 딱히 남의 일도 아닌가.’
그렇게 자조하고 있으려니, 라블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브요른과 셀토아는 처단했습니다.”
“빠르군.”
“협력에는 협력을, 배신에는 배신을 돌려주는 게 합리적인 방식 아니겠습니까.”
첫 수업 때 라블미는 트론에게 논리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며 저 말을 입에 담았었다.
의제가 담긴 카드를 서로 나눠 가진 후 그 패를 이용하여 의사 결정을 하는 놀이였다.
트론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룰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포기하고 직접적인 수업에서 손을 떼었다.
“제가 전하의 역량을 알아봤다면, 저희가 손을 잡을 기회가 있었을까요?”
“글쎄, 어떨까. 그대는 다루기 쉬운 자를 주군으로 선호하는 것 아니었나?”
“……그래도 왕자님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요. 똑똑한 주군을 모시고 이 나라를 바로잡을 푸른 꿈이라도 꿨을지 누가 압니까.”
트론은 실소를 뱉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말 아무래도 좋은 말이었다.
“됐어. 용건이나 말해.”
“한시적인 대공직을 받고 헤럴드 전하는 기뻐하고 있을 테지만, 기울어진 조건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
왕실 고유 권한은 공평하게 서로 합의하기로 했고, 트론은 따로 직위를 받지 않았다. 대공직을 받은 헤럴드가 더 존중받은 모양새로 보였다.
그러나 대공은 어디까지나 ‘왕궁 바깥’의 존재다. 반면, 트론은 왕자이기에 주인이 없는 왕궁에 앞으로도 거주할 것이다.
백성들이나 외부에서 보기에 그가 데니옴 왕궁의 실질적인 주인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로라 2세의 대공 선언 이후 왕위 계승은, 조카가 계승권을 ‘포기’했기에 성사되었다.
4년 반이 지난 후 트론은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대공의 직위가 해제된 헤럴드는 다시 아무 권한 없는 왕제로 돌아가게 된다.
왕세자의 사망 선고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누가 왕위 계승에 유리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트론 전하.”
“알기 쉬운 협박 고맙군.”
“같은 편이라는 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승으로서 마지막으로 충언드리지요. 모든 걸 의심하세요. 전하께서는 어느 한쪽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전쟁에 발을 들이셨습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트론은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차가운 밤바람에 그의 망토가 나부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발 디딘 모든 땅이 전장이 아니었던 때는 없으니까.”
“…….”
“그럼, 다음 실무 회의 때 보도록 하지. 조심해서 들어가.”
라블미 백작은 입술을 짓씹으며 왕자궁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아직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순간적으로 위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전쟁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끝은 승리, 혹은 나락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