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2)
“그런 가능성을 타진해 보긴 했습니다.”
가이의 대답에 엘피는 납득한 얼굴을 했다.
“그렇군요. 약혼이 성사만 된다면 왕자님께 좋은 일이겠네요.”
“엘피 님은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어딘지 은근한 뉘앙스를 품은 질문이었다.
엘피는 지난 가을에 하븐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혹시 제 목적이 왕자비가 아니냐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싶으신 건가요?”
“꼭 그 의미는 아니지만, 포괄적으로요. 엘피 님의 생각이 궁금해서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런 과분한 욕심 따위 품고 있지 않아요. 왕자님께서는 언젠가 합당한 배필을 맞이하실 테고, 마그달리사 영애는 좋은 분이시니 충분히 그 후보가 될 수 있겠죠.”
“그게 왜 과분한 욕심인가요?”
“왕자님은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분이니까요. 저같이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아요.”
“흐음.”
가이는 과일 향이 살짝 더해진 차를 음미하듯 한 모금 마시고 슬며시 웃었다.
“연하는 취향 아니라는 소리보다는 희망적이네요.”
“네?”
“아뇨. 뭐라고 해야 하나, 엘피 님 안에서 왕자님이 성역 같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가이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엘피는 눈을 깜빡였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옆머리를 잡아당겼다.
“아무튼, 엘피 님은 약혼을 수단으로 삼는 것 자체에는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시나 보네요.”
“어……. 그게 왕자님께 좋은 일이라면요.”
“그럼 질문을 바꿔서. 정치적 이득은 되지만, 왕자님께서 감정적으로 마그달리사 영애에게 조금의 호감도 없는 상태라면 찬성하시겠나요?”
엘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께서 불행해지시기를 바라진 않아요.”
“귀족이나 왕족은 어차피 대부분 정략결혼을 하잖아요? 전하께서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건 좀 순진한 발상 아닌가요.”
“정략결혼으로 시작했다고 꼭 차가운 사이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할지도 모르죠.”
“앗, 로맨스 소설 같은 화제예요. 엘피 님도 좋아하세요?”
그녀는 은밀한 취미를 들킨 것 같은 기분에 얼굴을 붉혔다.
“노, 논점 이탈하지 마시고요. 조금의 호감도 없는 상대랑 결혼하는 건 고통이잖아요.”
“그렇죠, 고통이죠. 하지만 제가 아는 전하라면 결과를 위한 방편으로 자신의 감정을 크게 고려하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전혀 호감이 없는 상대라고 해도, 정치적 이득이 중요해서 약혼을 원하실지도 모르잖아요?”
“…….”
물론 가이는 트론이 약혼 건을 거부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나 짐짓 그렇게 말했다.
‘뭐, 전하도 자각은 없으신 것 같지만.’
그는 턱을 괴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으로 엘피의 표정을 관찰했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끙끙대던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그런 건 싫어요. 전하는 항상 자기를 아낄 줄 모르시잖아요. 저번에 암살 건도 그랬고요.”
가이는 엘피가 알지 못하는 독살 시도 건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라도 전하를 아껴 드릴래요. 억지로 약혼이나 결혼을 한다고 하시면 말릴 거예요.”
“아하하.”
일개 시녀장이 내뱉기에는 월권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또한, 왕이 될 트론에게 그런 순진하고 꿈같은 일이 쉬울 리도 없었다.
그렇지만 가이는 순수하게 유쾌해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엘피 님은 왕자님께서 꼭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도록 힘쓰실 거라는 거죠?”
“네.”
“그 말씀, 잊지 마시기예요?”
어째서 그가 이렇게까지 힘주어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엘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는 만족한 얼굴로 한동안 더 웃었다.
***
“갑작스레 만남을 청한 점, 사죄드립니다.”
“아니. 그나저나 둘만 있는데도 말투가 무척 정중하군.”
트론이 집무실 소파에 앉으며 말하자 루베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또, 전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오해받고 싶지는 않아서요.”
“딱히 그대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 편한 대로 하지.”
트론은 손짓으로 앉으라고 권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처럼 무표정했다. 트론의 본심을 알기 어려웠지만, 루베인은 그의 말대로 순순히 말투를 바꾸었다.
“응, 고마워. 저기…… 르터바이스 소백작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전하 너한테 힘이 되고 싶어.”
트론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파티 때 그런 소리까지 들어 놓고 돕겠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루베인은 자조하듯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스스로 생각해도 그래! 자존심도 없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음, 그래도 역시 헤럴드가 왕이 되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왕자님이 나을 거 같아.”
“숙부를 제치고 선택되다니 영광이라고 하면 되나.”
어딘지 비꼬는 듯한 말투에 루베인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전하는 아직 괴물이 된 건 아니잖아.”
“…….”
“왕이 되면 하고 싶은 일, 없다고 했지. 그럼 앞으로 찾아보는 게 어때?”
“하고 싶은 일은 없지만, 왕이 되고 나서 내가 하게 될 일들은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건 그대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 테고.”
트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쌀쌀맞았다. 도와준다는 말 자체에는 일단 반색한 르터바이스 소백작과는 달랐다.
루베인은 그 점이 의문이었다.
‘보통 이렇게 기울어진 세력이라면 작은 조력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법 아닌가?’
물론 자신의 태도 때문에 트론의 기분이 상했다거나 감정적인 이유로 자신을 밀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본 트론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 전하,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야.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
“나는 전하가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에 걸고 싶어. 적어도, 지금 전하는 헤럴드보다는 훨씬 나은 사람인걸. 그러니까 헤럴드가 아니라 트론 전하가 왕이 되었으면 해.”
“그대답지 않군.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고르다니.”
“하하, 나도 변했나 보지. 애초에 전하는 좋은 사람인 척 자신을 꾸며서 나를 속이고 이용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어. 그렇지만 계속 자신을 나쁘게만 말했지.”
트론이 미간을 찡그리자 루베인은 헤헤 웃었다.
“그건 즉, 적어도 나에게 판단할 근거는 공정하게 줬다는 의미잖아. 전하도 참 성실하달까, 범생이 같은 구석이 있네.”
“……지나친 해석이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고. 그러니까 난 전하를 도울게. 정말로 전하가 괴물이 되어 버린다면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루베인이 손을 내밀었다. 왕족에게 먼저 악수를 권하는 것은 실례였으나, 그녀는 의식하지 않는 듯 올곧은 눈으로 트론을 응시했다.
트론은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담담히 답했다.
“이 거래에서 그대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멋대로 따라가는 거로 해 둬. 실망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니까. 그 정도면 만족하겠어?”
“…….”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녀의 손을 살짝 마주 쥐었다.
트론은 여전히 루베인에게 거북함을 느꼈다. 그녀가 언젠가 자신의 적이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끝은 어떤 식으로든 올 거야.’
엘피 역시 그때가 되면 자신을 떠나 루베인의 곁으로 갈지도 모른다.
어차피 올 끝이라면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위치가 나았다.
“그럼, 완전한 보답은 못 되겠지만 한 가지를 보장하도록 하지.”
“어떤 건데?”
“그대와…… 그대 가족의 안전.”
충정의 맹세는 없었다. 일시적인 협력에 불과했다.
“처필이 마그달리사 가문의 자들을 독살하려 계획하고 있다.”
그래도 트론은 언제나처럼 공평하게 돌려줄 거래 조건을 제시했다.
***
트론은 바로 왕자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선 르터바이스의 거처에 묵기로 했다. 원래 객이었던 루베인을 더하여 네 사람이서 저녁식사를 했다.
트론은 루베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짤막하게 하고 더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가이는 무언가 잔뜩 묻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부러 입을 다무는 모양새였다.
엘피 역시 묻고 싶은 마음에 입이 근질거렸다. 가이와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었다.
‘……혹시, 두 분이서 약혼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거나?’
하지만 자신에게 그걸 물을 자격 같은 건 없었다.
엘피는 전전긍긍하면서도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트론이 가이와 그간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로 들어간 사이, 붕 뜬 시간이 생겼다.
무엇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엘피에게 누군가 다가와 덥석 팔짱을 꼈다.
“에헤헤! 다시 보게 되어 기뻐.”
“아…….”
엘피를 향해 얼굴을 내민 것은 루베인이었다. 아마 그녀를 놀라게 하려던 모양이었다.
“실은 나, 예전부터 언니를 갖고 싶었거든. 오라버니밖에 없어서 말야.”
“그, 그러셨군요.”
“그러니까 존대 같은 거 하지 말고 동생으로 대해 줘! 앞으로 트론 전하를 같이 돕는 사이잖아.”
구김살 없는 그녀의 제안에 엘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째서인지 루베인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엘피는 루베인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자격지심과 거북함을 느꼈다.
“공녀님에게 실례 아닌가요?”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니까 공녀도 아니지, 뭐.”
루베인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절연한 것이 아닌 이상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엘피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소 예의 없는 태도지만 루베인의 제안에 딱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엘피도 외동이기에 예전부터 형제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트론 전하가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충족이 되었지…….’
트론 몰래 새로 동생을 만드는 것 같아서 켕기는 기분이었다. 딱히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텐데도 괜히 그랬다.
“……동생, 은 무리지만. 언니라고 부르는 건 괜찮아. 나이 차 나는 친구라고 하면 될까?”
“그것도 좋아!”
루베인은 팔짱을 낀 채 엘피의 손을 꽉 쥐며 폴짝폴짝 뛰었다. 처음 볼 때도 생각했지만 무척 에너지 넘치는 소녀였다.
‘전하께서는 침착하니까 반대로 이런 상대가 어울릴지도…….’
그 생각을 하자 저녁 먹을 때부터 밀어 두었던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격의 없어 보이는 그녀의 태도로 보아서는 질문을 해도 크게 실례는 안 되지 않을까. 엘피는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어, 루…… 베인.”
“응!”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더듬거렸지만, 루베인은 반색했다.
“아까 가이 님한테, 너랑 왕자님이랑 약혼 동맹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거든.”
밝았던 루베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엘피는 역시 실례되는 소리일까 후회하면서도, 주워 담을 수는 없었기에 질문을 끝까지 입에 담았다.
“전하를 돕게 되었다면, 혹시 그 동맹이 성립된 거야?”
“…….”
루베인은 엘피의 드레스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짝사랑하는 도련님한테 선물을 만들어 준다고 그랬지.’
엘피 본인이 짝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담은 적은 없었지만, 루베인 안에서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루베인이 판단했을 때 그 상대는 정황상 트론이었다.
자신은 연하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렇게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을 좋아하는 심리를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의 취향은 다양한 법이니 존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엘피가 자신을 연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라면 원만한 교우를 위해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아니, 전혀 그런 거 아니야. 안심해도 돼!”
“아, 안심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구나.”
“응! 난 트론 전하한테 요만큼도 관심 없어. 연하는 취향이 아니거든.”
그 말을 들은 엘피가 어딘지 뾰로통해 보였다.
“……우리 왕자님 아직 어리지만 멋진 분인데.”
루베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좋아하는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