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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6화 (46/132)

46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1)

가이는 답하지 않고 지그시 루베인을 보았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 한 몸 그런 식으로 팔아치우는 거 말고는 나한테 가치가 없는 건가 생각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그래요.”

“그렇게까지 자조적으로 말씀하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자신이 가진 것 중 어디까지를 방편으로 삼느냐는 가치관 차이니까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런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 제가 왕자님께 도움이 되긴 어렵겠네요.”

루베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이 역시 그녀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으므로 그 방법을 더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뭐, 당장 전하 본인이 거부할 테니까.’

다만, 루베인과 관련해서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엘피의 예언에 따르면 루베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컸다.

“영애께서는 바로 하븐으로 돌아갈 생각이신가요?”

“마그달리사 별저로 갈 생각입니다.”

보통 중앙에 올 일이 잦은 귀족들은 수도인 데니옴에 별저를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마그달리사 역시 예외는 아니기에 공작과 딜은 그쪽에 머물고 있었다.

“가출하신 것 아니었나요? 하긴, 하븐에서 영애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마그달리사 공에게 들어갔다면 일이 커지기 전에 얼굴 보이시는 게 낫긴 하겠네요.”

“아뇨……. 아마 어머님께서 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계실 거예요.”

루베인의 얼굴이 아까보다 한층 더 풀이 죽어 보였다.

가이도 마그달리사 공작 부인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무척 소심하고 심약한 사람이라, 사교계에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마음 아파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욱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각하께 더 혼나더라도, 직접 뵙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으음. 영애께서도 뜻이 있어 집에서 나오신 걸 텐데, 별저에 돌아가시면 다시 행동에 제약을 받으시는 것 아닌가요?”

“차근차근 설득해 볼까 해요. 각하의 명을 어기고 가출을 한 건 사실이고, 그에 합당한 벌은 받아야겠지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 보겠습니다.”

파티 때도 생각했지만, 얼버무리거나 돌리지 않고 직구로 부딪치는 건 그녀의 타고난 성품인 듯했다.

루베인 개인의 의지가 그렇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지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안전이었다.

‘보통은 마그달리사 공작 곁에 있으면 안전하겠지만…….’

마그달리사 공작쯤 되는 인물이 호위에 신경을 안 쓸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효성 독이 쓰인다면 어떤 방식이 될지 알 수 없고, 이쪽의 제어 범위를 벗어난 상황에서 그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가이는 우선 루베인을 붙잡아두기로 했다.

“별저로 가시기 전에 저희 왕자님 얼굴은 보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차후에라도 영애의 선의가 전하께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겁니다. 제가 전하는 것보다는 직접 그 뜻을 밝히시고 말씀을 나누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지내실 곳을 준비하겠습니다.”

그 이후에 루베인을 어떤 패로 쓸지는 온전히 트론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게 마그달리사 영애가 아닌 의문의 귀공자로서 루베인은 르터바이스의 거처에서 머물게 되었다.

***

스레데니옴이란 ‘신에게 선택받은 자, 신에게 선택받은 장소’를 일컫는 고대어였다.

나라의 이름이자 왕족의 성인 스레데니옴이라는 단어는 특별했다.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직계 후손이 아닌 방계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들도 왕에 오를 때는 스레데니옴이라는 성을 그대로 사용했다.

설화 시대의 신비는 천 년의 세월에 풍화되어 의미도 퇴색되었으나, 스레데니옴이라는 단어의 권위는 여전했다.

수도 ‘데니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택받은 자, 선택받은 장소’라는 의미인 데니옴은 단 한 번의 천도도 없이 천 년간 수도로 남아 있는 권위 있는 도시였다.

다만, 그렇게 깊은 역사성과 상반되게 도시 분위기는 꽤 번잡한 편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건물과 신축 건물은 규칙성 없이 복잡한 도심을 빽빽하게 장식했다. 구획 정리 없이 역사가 쌓인 도시가 흔히 그렇듯이 도로 구조도 미로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 불규칙한 분위기가 이 도시의 매력이기도 했다.

왕국의 기틀을 잡은 설화 시대의 배경과 굴뚝 그을음 가득한 삶의 터전이 공존하는 도시에는 생명력이 넘쳤다.

엘피는 열차역에 도착하여 마차로 옮겨 타며 오랜만에 데니옴의 모습을 보고 감회에 빠져 있었다.

“……반년 만이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네. 왕자님과 함께 왕궁에서 도망친 이후 참 많은 일이 있었죠.”

트론은 무표정하게 끄덕였다. 엘피보다는 오랫동안 데니옴에서 살았던 트론 쪽이 더 감상에 빠질 만하건만, 그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후후, 처음에는 정말 여유도 없고 필사적이어서……. 믿기 어려우셨을 텐데, 그래도 제 말을 들어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응. 나도 그때 그대를 선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보게 된 데니옴에는 감흥 따위 없었지만, 엘피의 그 말은 트론으로서도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엘피를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사기꾼이라 생각했고, 라이샤라는 걸 확신한 후에는 이용 가치가 있는 도구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트론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는 그 어느 쪽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저, 지금도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있을까요?”

엘피는 자신을 도구로써 얼마든지 이용해달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 도움이 되는 존재도 맞았다.

하지만 트론은 어쩐지 ‘그렇다’라고만 대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대할 때면 명확하게 떨어지는 계산이나 논리가 아닌 감정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젠가 끝은 찾아올 것이다.

모순된 감정이 계속 충돌했다.

트론은 이모인 할리케의 말을 떠올렸다.

[모쪼록, 가는 길을 착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 길을 걷는 한, 자신이 엘피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그렇다면 언젠가 다가올 끝까지, 그녀에게 최대한의 환상을 보여 줄 의무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공평하게, 상대가 바라는 것을 돌려주는 사람이었으므로.

“응. 항상 고마워. 누나.”

그의 대답을 들은 엘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이 웃음을 흘렸다. 직접 칭찬해 달라고 조른 것 같아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건 그렇고. 가이 님 말로는 뭔가 기대할 만하다느니 놀랄 거라느니 했는데 뭘까……?”

가이에게 루베인을 보호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던 트론은 아마 그 일일 거라 짐작했으나, 엘피의 기대를 깨뜨리고 싶지는 않아서 짐짓 모르는 척했다.

“글쎄, 소백작이 하는 일이니 시답잖은 거겠지.”

“후후, 론은 가이 님한테는 사양이 없네. 정말 사이좋은 친구 같아서 부러워.”

“…….”

이미 오해를 푸는 것을 포기한 트론은 성의 없이 끄덕였다.

***

“왕자님, 엘피 님! 보고 싶었어요!”

데니옴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가이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일부러 입구까지 나와 준 모양이었다.

트론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이가 두 팔을 벌리며 ‘자 어서 안기세요’라고 어필했으나 트론은 무시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히잉. 엘피 님이라도 안기실래요?”

“사양할게요.”

“두 분의 차가운 반응을 오랜만에 한 몸에 받으니까 기쁘네요!”

엘피는 굴하지 않는 가이를 보고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간 계속 부대낀 정이 있는지라, 엘피 역시 그가 무척 반가웠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멀리 서쪽에 있는 트론의 삼 왕자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엘피는 감탄사를 흘렸다.

“와……. 몰라보게 변했어요!”

바닥의 대리석부터 벽까지 내장이 전부 새롭게 바뀌었다.

고급 천연석으로 다듬은 난간, 사이사이 놓여 있는 장신구나 벽의 장식까지 세심하게 손이 가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예산을 낭비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트론이 퉁명스럽게 반응했지만, 가이는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왕자님이 지내셔야 하는 곳은 단순히 거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하의 권위입니다. 저는 합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왕자님. 이전의 왕자궁은 너무 삭막했는걸요.”

엘피가 말을 보태자 트론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이어서 확인한 다른 방들도 고급품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트론의 방은 특히 과한 장식을 자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분위기가 엿보였다.

초라했던 왕자궁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엘피는 더욱이 감동했다.

“사용인들은 우선 저희 가문 사람들로 채웠습니다. 왕궁 쪽 인원은 아무래도 헤럴드 전하의 입김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응, 그 부분은 알아서 맡기겠다.”

“데니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저도 왕자궁으로 거처를 옮기겠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승인해 주셔야 가능하지만요?”

트론은 창밖을 돌아보았다.

원시림 같던 정원도 어느샌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겨울이기에 잎이 없는 나무들이 줄 서 있었지만, 봄이 오면 꽃들이 움틀 것이다.

“그럼 그대가 이 왕자궁에 내가 처음으로 들이는 손님이 되겠군.”

“와아, 영광이에요!”

그 말은 지금까지 트론을 방문한 외부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삭막한 의미이기도 했으나, 가이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엘피는 트론의 얼굴을 보며, 아마도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트론이 가이에게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아, 엘피 님은 왕자님의 시녀장이니까요. 엘피 님의 방도 신경 써서 꾸며 놓았답니다.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제 방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감사해요.”

“천만의 말씀을요. 그럼 짐 정리는 사용인들에게 지시해 둘 테니 그 전에…….”

가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생긋 웃었다.

“제 거처에서 기다리는 어떤 귀공자분을 만나러 가시죠.”

***

“오랜만에 뵙습니다, 트론 전하.”

“오랜만이군, 마그달리사 영애.”

루베인은 인사하느라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엘피를 향해서도 인사했다.

“영애도 오랜만에 뵈어요. 르터바이스 소백작님께 들었습니다만, 이전의 성은 위장이었다죠?”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공녀님. 엘피 이나드라고 합니다.”

“아니에요. 경황이 없어서 다시 못 뵌 게 아쉬웠는데, 이렇게나마 재회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짧은 금발에 남자 의복을 입고 있는 루베인은 처음 봤을 때처럼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둘만 있는 게 아니라서인지 대귀족의 영애다운 품위 있는 말투였다.

“전하, 그럼 잠시 이야기를 나눌 귀중한 시간을 저에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루베인이 우아하게 청하자, 트론은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가 끄덕였다.

“……그래. 소백작, 잠시 집무실을 빌리겠다.”

“넵, 편하게 쓰세요. 차 내갈까요?”

“아니.”

트론은 짧게 대답하고 루베인과 집무실로 들어갔다. 엘피가 잠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랑 차 드실래요, 엘피 님?”

“네, 그래요. 가이 님과 차 마시는 것도 꽤 오랜만이네요.”

“티타임을 가지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요. 가볍게 드시죠.”

가이의 에스코트를 받아 티룸으로 이동하면서도 엘피는 두 사람이 신경 쓰였다.

언뜻 가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루베인은 트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연금당하고 있던 저택에서 빠져나와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마그달리사 영애도 저희 전하의 인품을 높게 산 걸까요.”

엄밀히 따지자면 다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가이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전에 전하와 나누었던 대화가 영애에게 감명을 주었던 모양이더군요.”

“저어, 그런데. 영애께서 저희 왕자님을 돕는다고 하시면 그건 혹시…….”

엘피가 잠시 주저하다가 가이에게 소곤거리듯 물었다.

“전에 가이 님이 말씀하셨던 약혼 동맹 이야기일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건수를 잡은 듯 가이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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