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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5화 (45/132)

45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0)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그달리사 영애.”

“저야말로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으음,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모르고 미리 말을 전해 놓지 않아서요. 자칫했다가 입구에서 쫓겨나실 뻔했다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루베인이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짧은 머리에 남성 복식까지 입은 그녀는 겉보기에 어엿한 귀공자 같아 보였다.

“의외로 직행 열차가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건 다행입니다.”

가이는 트론의 명대로 마그달리사 저택의 움직임을 계속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녀 앞으로 마법 전보를 날렸다.

혹시 데니옴에 올 일이 있다면 연락하라는 짤막한 문장과 수도에서 가이가 머무는 거처를 써 놓았다.

“……제가 데니옴으로 올 거라고 확신하시고 이 서신을 보내신 건가요?”

“반쯤은 도박이었습니다. 설마 가출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가이는 엘피의 예언 덕에 루베인이 데니옴에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오도록 안배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

트론은 파티 때 루베인과의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이는 그 대화가 기폭제가 되어 루베인이 파티에서 폭주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닌가 의심했다.

“돌려보내실 건가요?”

“설마요. 이건 그냥 추측입니다만, 영애께서는 트론 전하를 돕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녀의 움직임이 트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인지, 혹은 해가 되는 방향인지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기에 가이는 엘피의 예언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루베인과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굳이 근신하라는 마그달리사 공작의 명도 거역하고 ‘반헤럴드파’에 속하는 저희 쪽에 오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이대로는 트론 전하의 판세가 너무 기우는 것 같아서, 뭐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우리 전하를 도우실 생각을 하셨나요?”

“솔직히, 모르겠어요. 저는 정치인을 믿지 않습니다. 저희 각하조차 그래요.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도, 정치판에서는 다들 비열해져요. 괴물이 되어 가죠.”

“흐음.”

가이는 쿠키를 집어 들며 성의 없이 끄덕였다. 대귀족의 딸치고는 순진한 사고방식이었다.

“……트론 전하가 그랬어요. 그 괴물들을 짓밟을 자기 역시 괴물 아니냐고. 자기한테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사람 잘못 봤다고.”

“호오.”

그 말은 뜻밖이었다. 트론이라면 자신에게 순진하게 기대하는 어린 영애를 구워삶는 일쯤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본심을 드러내며 루베인을 밀어낸 모양이었다.

“그런 말씀까지 했는데, 왜 전하를 도우시려 하나요?”

“헤럴드보다는 나아서라거나, 고아원 일로 도움을 받아서도 있지만……. 그때 마지막으로 왕자님이 남긴 말이 마음에 걸려서요.”

“어떤 말이죠?”

“왕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물론 야욕이 있는 사람들이 대놓고 자신의 배를 불리고 싶다고 대답하진 않겠죠. 하지만 적어도, 선한 의도로 포장이라도 할 거잖아요?”

하지만 트론은 답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그래서 진심으로 하신 말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네요. 아무것도 하고 싶은 일이 없는 분을 돕고 싶으신가요?”

“그건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루베인의 눈이 맑게 반짝였다.

“물론 본인이 말한 대로 전하는 괴물이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아직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왕자님의 ‘왕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만들고 싶어요.”

“…….”

엘피처럼 그녀는 선의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이는 그 사실을 흥미롭게 여기면서도, 그녀가 엘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루베인의 목적은 선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트론 개인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가이는 언제나 트론의 행복과 안위만을 걱정하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생긋 웃었다.

“뭐, 좋습니다. 타인의 목표나 의지를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라서 추천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도와주시겠다는 뜻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떤 걸…… 도우면 될까요. 각하를 설득하러 갈까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무단가출한 딸이 찾아와서 그런 설득을 했다가는 마그달리사 공작께서 더 화를 내지 않을까 싶은데요.”

루베인이 끙 소리를 냈다.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무른 아버지다 보니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파티 때도 그렇게 가문 얼굴에 먹칠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 거겠지.’

그러고도 근신에 그쳤으니, 확실히 마그달리사 공작이 자기 딸에게 약하다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 댈 수 있는 핑계는 한 가지죠.”

“그건 어떤……?”

가이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방긋 웃었다.

“마그달리사 영애께서 우리 전하에게 반해서 상사병에 시달리다가 데니옴에 쫓아왔다는 시나리오일까요?”

***

“이쪽입니다, 헤럴드 전하.”

주홍빛 머리를 늘어뜨린 청순하게 생긴 여성이 작은 상자를 헤럴드에게 내밀었다. 아직 기껏해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서쪽의 데하스를 다스리는 영주 나센 데하스 공작이었다.

“……흥, 옥새인가.”

“네. 이 옥새야말로 진짜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리 했으면 좋았을 것을.”

“송구합니다.”

옥새를 위조하는 것이 중죄라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헤럴드의 비위를 맞추었다.

“데하스와 처필이 보증하는 한, 그 옥새의 진위는 분명합니다. 전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당일 회의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좋다. 그건 됐으니 빨리 파티를 열어.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데니옴 회의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되도록 자제하시는 게 좋겠다고 라블미 경이 전했습니다.”

“그 건방진 것의 말을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지! 저번 실책도 내가 너그러이 용서했거늘, 오히려 저가 상전인 양 구는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열겠습니다. 그 후 바로 데니옴으로 떠나시지요.”

“그래, 물러가.”

데하스 공작은 인사하고 별채에 마련한 헤럴드의 처소에서 나갔다. 그녀는 곧장 라블미 백작이 머무는 곳으로 갔다.

라블미 백작은 꼿꼿이 일어서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데하스 공.”

“둘만 있는 곳에서까지 존대를 할 필요는 없어요, 언니.”

데하스 공작이 상냥하게 말하자, 라블미 백작은 지친 표정으로 다시 소파에 앉았다.

“후우. 거북한 역을 맡겨서 미안하다, 나센. 트론 전하가 나타난 이후로 헤럴드 전하가 내 얼굴을 보는 것도 싫어해서.”

“그 정도는 괜찮아요. 언니와 저 사이인걸요.”

비에르카 라블미와 나센 데하스는 선대 데하스 공작의 배다른 자매였다.

선대 공작은 젊은 시절 난잡하게 놀다가 평민을 임신시켜 비에르카를 장녀로 얻었다. 하지만 이를 감추기 위해 그녀를 적당히 방계인 라블미 백작가에 입양시켰다.

한편 나센은 그로부터 10년 후쯤 정실 부인 소생인 막내딸로 태어났다.

원래대로라면 둘은 접점도 없었을 것이고, 막내인 나센이 공작위를 물려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대 공작은 일찍 죽었고, 나센의 경쟁자였던 손위 형제들은 사라졌으며, 그녀는 배다른 언니를 참모 삼아 공작이 되었다.

후계자 사이에 암투가 가득한 스레데니옴 왕국의 역사에서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닌, 그런 사건들이었다.

“헤럴드 전하가 너무 충동적이라 걱정이 돼.”

“어차피 주군은 멍청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언니가 예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나센. 그때 했던 말은.”

“알아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이 집안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처지였는걸요. 지금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충분해요.”

“…….”

“멍청한 헤럴드 뒤에서 실을 조종하세요. 그러면 이 나라는 언니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충실하게 언니의 말을 따를게요. 어린 나이에 집안의 악마들을 잡아먹고 똬리를 튼 능구렁이 데하스 공작으로서 말이죠.”

나센은 화사하게 웃으며 비에르카의 뒤에서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

비에르카가 자신의 의붓여동생을 이용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혈육의 정과 비슷한 것이 싹텄다. 가능하면 헤럴드의 치세에 자신의 여동생 역시 권세를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는 얼간이 헤럴드의 모욕 따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공작의 장녀지만 공작이 될 수 없었던 그녀는 언제나 그림자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늘에서도 비에르카 라블미는 천하를 제 것처럼 굴리고 있다. 그 사실에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런 과거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제자이자 정적인 트론을 떠올렸다.

그 역시 자신처럼 그림자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자였다.

‘그래, 비슷한 처지끼리 잘 겨뤄 보자꾸나, 트론. 물론 그 끝은 낭떠러지겠지만.’

여동생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비소했다.

그와 대면할 날이 이제 멀지 않았다.

***

“……저는 연하는 취향이 아닙니다만.”

루베인이 불쾌한 듯 가이에게 답했다.

“세상에. 저희 전하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취향이 아니었어도 반해야 정상이죠!”

악성 개인팬 같은 가이의 발언에 그녀의 표정이 더더욱 썩어 갔다.

“뭐, 농담은 이쯤 하고.”

가이는 식어 버린 차를 완전히 비웠다.

“애초에 영애는 각하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이곳에 왔습니다. 영애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공작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마그달리사 공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을까요? 오히려 악영향이죠.”

“그건…….”

“지금처럼 신분을 위장한 채로 뭔가 도우신다면 괜찮겠지만, 으음, 그냥 봉사 활동 하러 온 것도 아닌 이상 의미가 없겠군요.”

“저를 이용해서 각하를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영애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네요.”

루베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자신의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북부 귀족 교류 파티 때 영애가 내민 패도 최악이었어요. 거래할 거라면 상대에게 이득이 되는 걸 제시했어야죠. 멀쩡한 자식이 작위를 포기하겠다니, 대귀족 체면에 받아들일 조건이 아닌걸요.”

“이득이 되는 것…….”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저희 진영에서 마그달리사 공에게 줄 수 있는 이득은 없습니다. 다만, 영애께서 정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안은 있겠죠.”

“그건 어떤 거죠?”

가이는 어딘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영애께서 그다지 기꺼워할 방법은 아니라서요.”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저희 왕자님이 취향이 아니라고 하시니 제 예상이 맞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듣고 루베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방법인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저희 왕자님과 약혼을 한다면, 마그달리사 가문이 왕의 사돈이 된다는 메리트는 줄 수 있지 않을까요?”

“…….”

“마그달리사 공은 안전 제일주의인 성향이 있으니, 그것도 모험에 가까운 패이긴 합니다만. 딸이 직접 약혼하고 싶다고 매달린다면 끝까지 그걸 내치기는 어려우시겠죠. 영애를 무척 아끼시니까요.”

“뭔가 그거 되게…….”

루베인이 축 처진 얼굴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

“비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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