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9)
“아……!”
엘피는 외마디 신음을 뱉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라는 걸 깨닫는 동시에,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눈을 비비며 몸을 움직이다가 그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누워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닌 것 같았다.
“깼어?”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엘피는 흠칫 놀라 옆으로 눕혔던 몸을 바로 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에 트론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엘피는 자신이 트론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 그, 왕자님, 저기, 그게, 이건?”
트론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많이 피곤했는지 나한테 기대 자길래. 제대로 누워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눕혔어. 더 자도 돼, 누나.”
엘피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서류 정리를 하느라 카우치에 나란히 앉아 일하던 마지막 기억은 남아 있었다. 직장 상사한테 가장 보여서는 안 되는 종류의 치태였다.
“미, 미안해!”
“별로 미안할 거 없는데.”
느릿하게 그녀의 머리를 도닥이는 손동작은 평온했다. 그 감촉이 기분 좋아서 그의 말을 받아 그대로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엘피는 간신히 그 유혹을 떨치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트론은 조금 아쉬워 보이는 얼굴을 했다가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서류, 정리하다 말았는데…….”
“괜찮아. 내가 끝냈어.”
그 말을 듣고 더 울고 싶어졌다.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제 일인데 거꾸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전하께서 너무 잘해 주시니까 제가 해이해지나 봐요.”
엘피가 말투를 고쳐 비장하게 말하자, 트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딱히 잘해줬다고 할 만큼 뭔가 해 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그대가 해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새 계속 일만 했으니, 피곤할 수밖에.”
“그렇지만 반대로요, 전하 본인이 일하는 중에 졸았다가 깨어나면 어떻게 느끼시겠어요?”
트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 관리가 안 된 것 아닌가.”
“그것 보세요, 전하는 자신한테만 너무 엄격하시다고요.”
엘피가 그렇게 지적하자 그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동작이 무척 귀여웠지만, 그녀는 트론이 안쓰러웠다. 그는 항상 자신을 몰아가는 것처럼 일하고, 그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왕자님이 더 마음 편하고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그가 끝까지 살아남아 온 세상의 행복을 느끼기를 바랐다. 그것이 엘피가 여기까지 달려온 원천이었다.
“……전하, 좋아하는 음식 없으세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 엘피는 그렇게 물었다. 회귀 전에도 물었던 그 질문의 답은 알고 있었다.
“글쎄, 딱히…….”
“그럼 먹기 싫은 건요?”
“먹는 과정이 번거로운 음식 정도일까.”
역시 똑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식욕이 희박했다.
“제가 나중에 뭔가…… 음식 만들어 드리면 폐일까요?”
그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상대가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떠밀어 봤자 민폐라는 것을 엘피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릿하게 남아 있는 꿈의 기억이 마음을 들쑤셨다. 그것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엘피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연습해서 나중에 전하가 맛있게 드실 음식 만들어 드릴게요.”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약간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래. 편한 대로 해.”
예전에도 이 표정을 본 기억이 있었다. 회귀 전에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트론은 저런 얼굴을 했다.
‘음식이 전부 싫으신 걸까?’
트론의 반응에 위화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억지로 밀어붙인 것 아닌지 후회되었다. 마치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트론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기대하지 않고 기다릴 테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그, 그건 기대해 주세요!”
“아하하.”
그제야 엘피는 안심하며 숨을 뱉었다. 그의 말만이 언제나 구원이었다.
***
가이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 데니옴의 지저분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밤의 번화가는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휩싸여 요란스러웠다.
그는 좁은 골목을 몇 번 꺾어 들어가 허름한 선술집으로 발을 들였다.
지배인에게 약속된 선객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 그는 안쪽에 있는 밀실로 가이를 들여보내 주었다. 그 안에는 어딘지 신경질적인 인상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이에게 꾸벅 인사한 후 다시 앉았다.
“안녕하세요, 셀토아 남작.”
“안녕…… 할 것 같습니까.”
그녀가 애꿎은 엄지손톱을 쥐어뜯으며 눈을 치켜떴다. 가이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홍합찜과 맥주를 주문했다. 셀토아 남작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저녁 먹자고 불렀습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뭘.”
가이는 모자를 벗으며 느긋하게 응수했다.
“왜 또 부르셨습니까. 전 이미 지시한 일 다 했습니다. 멜시아 꽃은…….”
“네, 트론 전하께서도 그 일이 커지기를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농장 주민들은 그게 멜시아 꽃인지도 모르고 재배했죠. 표면으로 일이 커지면 국법으로 처리해야 하고, 셀토아 남작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도 중형을 면치는 못할 테니까요.”
마약 재배와 유통은 국법으로 원시적이고 무거운 처벌을 받는 중죄였다. 평민의 경우에는 양 손목을 자르거나 경중에 따라 사형에도 처할 수 있고, 귀족은 작위 박탈 및 재산을 몰수당하는 사안이었다.
“…….”
“아, 물론 셀토아 남작만 콕 집어서 벌하는 것도 가능하긴 해요. 아시죠?”
“협박하는 겁니까!”
“에이 참,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그는 사근사근 답하며 먼저 나온 맥주를 들이켰다.
“그냥,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물건을 대량 생산했으면 본인의 인생도 망가질 각오를 하는 게 좋지 않나 하는 정도?”
“……윽.”
이어서 홍합찜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남작은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고, 가이만 포크 두 개로 홍합살을 발라내며 야무지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 이상 뭘 바라시는 겁니까.”
“데하스가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면 곤란하거든요.”
가이는 바게트를 뜯어 홍합찜의 국물에 찍어서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삼켰다.
“영민한 셀토아 남작이라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
“일종의 사법거래라고 생각하셔도 되고요. 멜시아 꽃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대신, 남작이 제 역할을 잘 해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더 용건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돌아가지요.”
“아 참.”
가이가 빵 부스러기를 냅킨으로 털어내며 온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후에 또 ‘법을 위반하는’ 일을 저지르면 그때는 왕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거예요. 부디 본인 그릇에 맞는 범위의 사업만 벌이시길 바랍니다.”
셀토아 남작은 그를 노려보다가 끄덕이고 가게를 나갔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가이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곤 해도 저렇게 나쁜 버릇 들인 사람이 성실하게 살아갈 리는 없지만. 자기 무덤 파는 걸 어쩔 순 없는 노릇이니.”
자신이 그녀의 파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줄 의리는 없었다.
그는 바로 셀토아 남작에 대한 일을 머리에서 치워버리고 당면한 고민과 마주했다. 혼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텁텁한 상황이 문제였다.
사먼이라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가이는 지배인에게 추가 맥주를 부탁했다.
***
그리하여 1월 말, 트론과 엘피는 수도 데니옴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변경백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전에 하븐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위해 열차 칸 하나를 완전히 전세 내어 주변은 조용했다.
엘피는 조용한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이 님을 무척 오랜만에 뵙는 셈이네요!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지만요.”
“뭐, 소백작이야 어디서든 잘 지낼 타입이긴 하지. 지시한 일들도 문제없이 처리한 듯하다.”
트론이 서류를 넘기며 무표정하게 답했다.
“눈 나빠지시니까 열차 안에서 서류 적당히 보세요.”
“요즘 들어 그대의 잔소리가 늘어난 것 같은데.”
“걱정할 만한 일을 하셨으니 그렇죠.”
그녀가 볼을 부풀리며 항의했다. 트론은 검지를 들어 그녀의 볼을 쿡 찍었다.
“이제 걱정할 일 없으니까 그만 의심해, 누나.”
“앞으로 1년쯤 두고 본 다음 생각할래.”
“너무 길어.”
“그만큼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잖아.”
엘피는 슬며시 그의 손에서 서류를 떼어놓았다. 대신 트론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먼저 트론을 만지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대외적으로 일개 시녀라는 점을 생각하면 태도나 말투도 다소 무례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트론은 그 모든 것이 기꺼웠다. 그녀의 거리감이 더 가까워지는 순간을 자각하는 것이 즐거웠다.
트론은 서류 읽는 것을 포기하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엘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무의식인 듯 그 손에 얼굴을 비볐다. 트론도 눈을 가늘게 만들며 마주 웃었다.
데니옴에 도착하기 전까지 짧고 평온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
“이제 곧 엘피 님이랑 전하가 오신다니 너무 기쁘네요. 아름다운 얼굴이 그간 부족했어요!”
가이가 서류를 위로 날리며 만세를 불렀다. 그 기세에 흩어진 서류를 주우며 사먼이 눈을 깜빡였다.
“저도 고향에서는 잘생겼다는 소리 듣는데, 부족하신가요?”
“일단 그 자신감은 높게 사겠지만, 사먼은 ‘아름답다’는 카테고리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네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체 뭘 노력해 보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가이는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저는 그 ‘엘피 님’이라는 분을 뵙는 게 처음입니다.”
“아, 그랬군요.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영애예요. 이름만 아나요?”
“기본적인 인적 사항하고, 그 외에…… 전하께서 ‘변수’로 생각해서 계획을 바꾸게 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압니다.”
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알고 있기로도 엘피에 의해 트론이 걸어가는 길은 상당히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변수’라는 표현은 무척 적절했다.
사먼이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하다가 진심으로 궁금한 듯 질문했다.
“전하는 원래 그렇게 충동적인 분이 아니시거든요. 그분에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하신 걸까요?”
가이는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것을 참았다. 확실히 라이샤라는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트론의 행동은 그런 오해를 살 만한 것이었다.
“전하의 심경까지야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랑스러운 아가씨라는 건 사실이네요. 전하께 중요한 분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뵙게 되면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사먼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그런 와중 임시 집무실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이 정중하게 문밖에서 말했다.
“소백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지? 사먼, 가서 확인해 보고 쓸데없는 사람이면 적당히 돌려보내 줄래요?”
“알겠습니다.”
가이가 서류와 함께 날아간 의욕을 끌어모아 다시 내용을 검토하고 있으려니, 잠시 후 사먼이 돌아왔다.
“가이 님, 오늘 약속 잡으신 일 있으셨나요? 귀족패는 있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소백작님과 약속을 했다고 막무가내입니다.”
“아, 저런. 혹시 쫓아냈나요?”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묻자 사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 티룸으로 모셨습니다.”
“어라. 쓸데없는 사람으로 오해할 만한데, 왜 돌려보내지 않았나요?”
“부족한 아름다운 얼굴을 보충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가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먼의 기준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심미안이 나쁜 건 아니었군요.”
가이의 취향과는 약간 동떨어져 있었지만, 사먼의 말대로 그 상대가 아름다운 얼굴인 것은 맞았다.
집에서 탈출한 루베인 마그달리사의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