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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1화 (41/132)

41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6)

엘피가 방에서 나가자 교대하는 것처럼 가이가 포털을 통해 트론의 방에 복귀했다.

트론은 그제야 안심한 듯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치유 주술사 불러오는 건 취소했는데요……. 어라, 엘피 님은요?”

“내보냈다.”

트론이 손수건 위로 참았던 기침을 뱉었다. 이전보다는 양이 확연히 줄었지만, 여전히 피가 묻어 나왔다.

트론은 그 손수건을 가이에게 내밀었다. 엘피가 보기 전에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감기약, 괜히 가져왔네요.”

“어차피 감기였어도 약 안 먹는다. 먹어 봤자 안 통하니까.”

“…….”

약도 일종의 독이니, 치사량의 독에도 이 정도로 버티는 트론에게는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치유 주술사는 왜 물리셨나요?”

“첫 번째로는 보안 때문에. 두 번째로는 이 독에는 치유 주술이 소용없어서.”

“……하긴, 중독 상태이신 거 광고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제가 경솔했네요.”

“아니…….”

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몸 상태는 언제 나아지시는 거예요?”

“이제 괜찮을 거다. 지효성 독이라 회복이 느린 것뿐이야. 그것보다…….”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트론은 일 이야기를 꺼냈다.

“데하스 공작 쪽은?”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괜찮으니까 전하, 오늘은 일 생각 그만하세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스승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이나드 영애의 예언도 있고, 현지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

거기까지 말하고 트론이 다시 기침을 참았다.

“그거 말인데요, 전하.”

“뭐지.”

“왕자님이 낫고 나서 제안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지금 말씀드릴게요.”

가이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앉았다.

“제가 먼저 수도로 가 있을까 합니다.”

“데니옴에?”

“회의 때 왕궁에서 지내셔야 하잖아요. 하지만 저쪽이 장난질을 해 놨을 가능성이 크죠. 안전뿐만 아니라 마법에 의한 도청도 걱정되고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왕자님이 묵으실 왕자궁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제가 먼저 가 있을까 하고요. 뭐, 실제로 수리도 할 겁니다만. 장치가 있으면 제거하고, 이후로도 회의 당일까지 저쪽 움직임을 견제하겠습니다.”

“그대가 위험할 수 있다.”

“설마 모르고 말씀드렸겠어요. 그리고 셀토아 남작과 관련된 일도 겸사겸사 처리하고 올게요.”

“그거라면 내가 직접 데니옴에…….”

“에이 참, 그만 좀 하세요. 저는 왕자님과 달리 제 몸 귀한 줄 아니까 호위는 과할 만큼 붙일 겁니다. 기쁘진 않지만, 전하 덕분에 호위 인원을 나눠도 문제없다는 게 확인되었으니까요. 르터바이스령에서 푹 쉬고 계시기나 하세요.”

“…….”

“장거리라 포털은 무리지만, 아나이테로 소통은 가능할 겁니다. 사실 이런 상황을 생각해서 연구한 거기도 하고요. 마력 충전 방법은 따로 마련해 놓고 가겠습니다.”

트론이 걱정되는 눈으로 가이를 올려다보았다. 아파서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솔직하게 감정이 얼굴로 드러났다.

“하지만…….”

“제가 없다고 생각하니 베갯잇을 눈물로 적실 것 같으세요? 왕자님이 저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네요.”

가이의 실없는 소리에 트론이 쿨럭거리며 그의 팔을 손으로 쳤다. 물론 병자가 때려 봤자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트론의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가이는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오늘은 푹 쉬세요. 만전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업무 중 하나입니다.”

“…….”

“앞으로 웬만하면 이렇게 몸 상하는 방법 쓰지 마시고요. 저야 그렇다 쳐도 엘피 님은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거 아시잖습니까. 이제 피 나오는 건 괜찮은 건가요?”

“그래…….”

“그럼 엘피 님 불러오겠습니다. 저는 곱게 자란 사람이라 왕자님 간호 못 해요.”

트론이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가이는 응접실에 앉아서 훌쩍이고 있는 엘피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다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엘피 님, 들어가 보세요.”

그녀는 가이의 말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저보고 나가라고…….”

“아프니까 여유가 없으셔서 그런 거예요. 아시잖아요, 전하가 완벽주의자이신 거. 흐트러진 모습 보이는 게 싫으셨나 봐요.”

“…….”

단지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 같았지만, 엘피는 일단 끄덕였다.

가이는 부러 엘피의 눈물을 모르는 체하며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이 드실 식사는 바로 챙겨오도록 지시할게요. 간호하는 사람도 든든하게 먹어야 하니, 엘피 님도 끼니 거르시면 안 돼요.”

“항상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엘피는 가이의 호의를 받아 조심스럽게 트론의 방에 다시 들어갔다.

누워 있던 트론이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쫓겨나는 것 아닌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는 무언가 더 말하지 않았다.

엘피는 조용히 트론의 침대맡에 앉았다.

“……아직도, 제가 있는 게 불편하세요?”

트론이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몸을 낮추자, 트론은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울었구나.”

엘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미안해. 누나를 울리려는 건 아니었어.”

“론…….”

“……나는, 계속 혼자 살아와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담긴 음색은 다정했다.

“아플 때 누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어색해.”

트론의 말에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상처를 떠올렸다. 온기 없이 초라한 왕자궁의 모습이 생생했다.

아무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고, 아껴 주지 않았다. 트론은 혼자서 12년이라는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다.

‘……더 이른 시기로, 회귀하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하루라도 빨리 달려가서 그를 보호했을 것이다. 몸에 있는 상처가 하나라도 덜하도록 어떻게든 막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거야. 엘이라서 불편한 게 아니야.”

트론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피는 침대로 몸을 기울여 그의 목을 꽉 안았다.

팔 안에서 그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도 곁에 있을래. 안 떨어질 거야.”

“…….”

트론은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열이 오른 자신보다 낮은 그녀의 체온이 기분 좋았다. 뜨겁고 복잡한 머리가 조금 식는 느낌이었다.

“응. 안 나가도 돼, 누나.”

속삭이듯 허락하자 몸을 뗀 엘피가 글썽이는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제 곧 아침 식사 올 테니까 잠깐 쉬고 있어, 론. 이제 말 안 시킬게.”

“응…….”

엘피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로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트론은 눈을 감으며 잠시나마 일에 대한 고민을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

자고 깨고를 반복하던 트론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눈을 비비며 시계를 확인하려고 머리맡을 보니, 엘피가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트론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딱히 그 행동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이나드 영애.”

“…….”

“……누나.”

“…….”

몇 번 불러도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트론을 간호하다가 본인이 기진맥진해진 모양이었다.

트론은 쓴웃음을 뱉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대고 앉았다.

무척 오랜만에 긴 시간을 잔 덕분인지 몸이 가벼웠다. 내일부터 다시 일하는 데에 지장은 없을 듯했다.

“사먼.”

트론의 나지막한 부름에 테이블 위에 있던 책이 파닥거리며 날아왔다.

[네, 주군. 오늘 온종일 연락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음, 별일 없었다. 독의 경로 추적은 어떻게 되었지?”

[공급책 쪽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의뢰주는 십중팔구 처필 같네요.]

“……처필이라.”

처필 공작은 데니옴 회의에서 두 공작가 사이를 트론이 중재하겠다고 말을 꺼낸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고아원 건으로 마그달리사에 대해서도 바싹 약이 오른 상태다. 독으로 트론 쪽을 노렸다가 좌절되고, 같은 독으로 루베인을 노린다는 것도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다만 트론이 궁금한 것은 처필 공작이 독자적으로 벌인 일인지, 아니면 헤럴드 이하 라블미 백작이 관여한 일인지 하는 부분이었다.

“이 일에 스승님이 끼어 있는지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트론은 그 외에 사먼에게 자잘한 사항을 전달한 후, 가이가 제안했던 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르터바이스 소백작이 한발 앞서 데니옴에 갈 예정이다. 자세한 건 정해지는 대로 차차 전하겠지만, 그를 도울 수 있게 미리 준비하도록.”

[차질 없이 진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주군, 한 가지 확인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드물게 사먼 쪽에서 먼저 용건을 꺼냈다.

“뭐지?”

[이번에 데니옴 회의에서 헤럴드에게 대공 자리를 제안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죠.]

“그래.”

[혹시, 로라 2세의 전례를 따서 그렇게 제안하시는 겁니까?]

“……장로가 한소리 했나?”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사먼이 다소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공직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장로님께서 전하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는 모양입니다.]

“알았다.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고. 내 쪽에서 조만간 연락하겠다고 전해.”

[네, 저기…….]

사먼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신참이고 주군 밑에서 일한 지는 이제 겨우 2년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희 연합의 숙원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저는 주군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주군의 과거는 인계받은 문서에 쓰여 있는 것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주군이 오래 고생하셨다는 건 충분히 전해지는걸요. 얼마든지 그럴 자격 있으십니다.]

주군에게 이야기하기에는 건방진 표현이었지만, 트론은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사먼이 나쁜 뜻 없이 순수하게 자신을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에게 평가받을 위치의 사람이 아니다.”

[앗! 소, 송구합니다. 항상 주제를 모르고 떠들게 되네요.]

당황한 그의 표정이 저절로 그려졌다. 트론은 쓴웃음을 짓고 마무리했다.

“괜찮아. 늦은 시각까지 수고했다. 쉬도록 해.”

[네, 주군께서도 건강 해치지 마시고요!]

사먼의 씩씩한 목소리가 끊기고 책이 공중에서 뚝 떨어졌다. 트론은 그 책을 닫아 테이블로 치우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년설 봉우리 너머로 초록색 빛이 커튼처럼 너울거리며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오로라.”

스레데니옴 전역에서도 르터바이스 영지에서만 볼 수 있는 신비한 현상이 창밖 가득 펼쳐지고 있었다.

트론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책으로 읽었을 때는 문장으로 나열된 오로라의 묘사에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미 그는 오래전에 그런 감정을 잃어버렸다.

트론은 팔을 뻗어 다시 엘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소한 것에도 잘 울고 웃는 그녀라면 저 광경을 보고 기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푹 자는 것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으려니 엘피가 작게 신음을 냈다.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어라?”

“내가 깨웠나.”

“아…… 전하! 몸은 어떠세요? 추울 텐데 아무것도 안 덮고 일어나 계시면 어떡해요.”

막 깨어나서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트론을 챙기며 자신의 무릎을 덮고 있는 담요를 그의 등에 둘러 주었다.

“이제 괜찮아. 그대야말로 방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자도록 해.”

“제 걱정하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 다시 누우세요.”

엘피는 잔소리하며 트론을 다시 눕히려 하다가 창밖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우와.”

그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왕자님, 저거 보세요! 오로라예요!”

기대 그대로의 반응에 트론은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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