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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0화 (40/132)

40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5)

“……이상이 제가 본 미래입니다.”

엘피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트론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질문했다.

“마그달리사 영애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고 했지.”

“네, 전하.”

“혹시 더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나? 그녀의 상태라거나.”

“일단 제가 본 상황으로는 주변에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낮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떠올려 보니 영애의 얼굴이 좀 붉었던 것 같아요.”

“알겠다. 어째서 연금 중인 그녀가 데니옴 왕궁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위험하다면 우리도 안심할 수는 없겠지. 유의하도록 하겠다.”

“네……. 영애한테 예언에 대한 걸 직접 밝히기는 어렵지만, 데니옴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조심하라고 말해 두는 게 좋겠고요.”

“그래. 그 부분도 생각해 두지.”

트론은 일 이야기를 끝낸 후 말투를 바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할 일 없으니까 이만 쉬어도 돼. 누나.”

“……론은?”

행사에 나갔다 밤늦게 돌아온 트론은 바로 집무실에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슬슬 잘 시간인데 계속 일을 하려는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이것만 확인하고 잘 거야.”

“꼭이야……? 요즘 안색이 나빠서 걱정돼.”

“응.”

엘피는 걱정되는 듯 트론을 돌아보았다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를 내보낸 트론은 아나이테를 통해 가이를 호출했다.

[저 자려고 준비하고 있는데요, 전하.]

“이나드 영애가 예언을 전했다. 왕궁에서 마그달리사 영애가 독으로 살해당할 위험이 있어 보이는군.”

트론의 단도직입적인 용건에 가이가 끙 소리를 냈다.

[골치 아프게 됐네요. 그 사람 연금당하고 있지 않았어요?]

“뭔가 이유가 있을 테지. 이후 그녀의 동태를 계속 주시하도록 해.”

[네, 바로 지시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쓰일 예정인 독은 내가 당했던 것과 같은 종류로 추정된다. 특수한 독이라 입수 경로가 한정되어 있으니 이쪽은 내가 웰칸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지.”

붉어진 안색이나 입에서 흘리는 피, 사람들이 많은 낮에 갑자기 쓰러진 점으로 보아 독의 효과가 늦게 나타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전하께서 독을 직접 드셔서 조사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기분이 미묘하네요.]

“그대의 기분은 아무래도 좋으니 일이나 처리하고 자도록 해.”

[알겠습니다아. 전하도 바로 주무시고요.]

트론은 대답하지 않은 채 연결을 끊고는 의자에 기댔다.

“쿨럭…….”

손바닥에 뱉어 낸 기침에서 피가 약간 묻어 나왔다. 이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지효성이라서인지 독의 효과가 꽤 끈질긴 편이었다.

독에 대해 저항력이 있는 자신이 이럴 정도니, 루베인이 당한다면 확실히 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독에는 치유 주술이 소용없었다. 트론조차도 기본적인 처치를 한 이후 자연적인 회복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역사에서 암살의 수단으로 활약해온 독과 주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반대로 그걸 막는 방법도 발전해 왔지만, 모든 분야에 완전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손바닥의 피를 닦아 낸 후 트론은 눈꺼풀을 눌렀다. 피곤했지만 검토해야 할 자료가 산더미였다.

데니옴 회의 자료 준비뿐만 아니라, 대공 체제로 바뀐 후 관여하게 될 국사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파악이 필요했다.

2월 초까지 이제 겨우 두 달 남짓한 시간은 그다지 여유롭지 못했다. 자는 시간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트론은 등을 꼿꼿이 세우며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고아원이 완공되기 전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내용을 정리한 문서였다.

이로써 아이들이 겨울에 죄 없이 죽어 나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에 불과한 일이었을지언정, 쓸데없는 희생은 적을수록 좋았다.

그는 무의식중에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 확인 사인을 하고 다음 서류를 넘겼다.

조용하고도 깊은 밤이었다.

***

트론은 오전 중 홀로 외출하여 사먼에게 독에 대한 경로를 캐도록 지시한 후 르터바이스 본저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흐린 날씨였지만 뺨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약간 기분 좋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긴 시간 산책하는 건 오랜만이군…….’

최북방인 르터바이스령은 첫눈이 온 이래 주변에 눈이 사라질 일이 없었다.

정원사가 매번 부지런히 쓸어내는 통로 쪽을 제외하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눈이 마치 조각처럼 보였다.

눈과 크리스털이 어우러진 본저의 겨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론은 벤치에 쌓여 있는 눈을 털어내고 그 위에 앉았다. 딱히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앉은 채 자신이 낀 남색의 통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사적으로 외출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낄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목적을 달성하여 만족스러웠다.

그때, 요란하게 눈을 밟고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엘피가 추위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전하, 옷도 얇게 입고 이런 데서 뭐 하고 계신 거예요!”

그녀는 가져온 모피를 트론에게 둘러준 후 머플러를 몇 겹이고 칭칭 감아 주었다. 그러고는 트론의 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원래도 빨간 얼굴을 더 붉게 물들였다.

“……굳이 그거 쓰실 필요 없는데요.”

트론은 과시하는 것처럼 장갑 낀 손을 위로 올린 후 엄지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이걸 끼고 싶어서 밖에 나온 건데. 그리고 둘만 있으니까 말 편하게 해.”

“차라리 대놓고 놀리는 게 마음 편하겠어, 론…….”

“정말이라니까. 따뜻해, 누나.”

“그건 다행이지만……. 겉옷도 제대로 입고 나와야지. 안 추워?”

불만이 가득한 엘피를 보며 트론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느낌이긴 하군.’

트론은 남의 일처럼 몸 상태를 분석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만 들어가자.”

“……더 안 쉬어?”

“소백작한테 맡겼던 자료가 지금쯤 나왔을 거야. 바로 검토해야 해.”

엘피는 여전히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있던 겨울 해가 그녀의 머리칼을 비췄다. 북부 교류 파티 이후 염색을 하지 않게 된 그녀의 정수리 부분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알았어. 대신 오늘은 꼭 저녁 많이 먹고 일찍 자야 해?”

“응.”

성의 없이 대답하면서 트론은 엘피의 손을 쥐었다. 장갑을 선물 받은 건 좋지만, 직접 온기가 닿지 않는 것은 조금 아쉬웠다.

***

다음 날 아침, 엘피는 트론을 깨우러 거처에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트론의 침실로 가려던 그녀는 응접실에 보여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소파에서 불편한 자세로 트론이 앉아 자고 있었다.

‘아니, 왜, 대체, 왕자님!’

엘피는 얼른 소파에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파와 테이블에 서류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하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어제 일찍 주무시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트론은 항상 가이를 보고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는다고 뭐라고 하지만, 본인도 딱히 남의 말을 할 자격은 없었다.

‘침대로 옮기는 건 무리…… 겠지?’

발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후다닥 침실에서 쓰지 않은 베개를 가져왔다.

편한 자세로 만들어 주기 위해 트론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가 작게 신음했다.

“으응…….”

‘앗! 깨면 안 돼.’

엘피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옆으로 눕혀 주었다.

그 순간, 트론이 팔을 뻗어 엘피의 목을 안았다.

그가 깼나 싶어 깜짝 놀랐지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걸 보니 무의식인 모양이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있는데, 트론이 목을 안은 엘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 잠깐…….”

저지할 새도 없이 트론의 무게가 엘피 쪽으로 완전히 쏠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떨어지는 그를 안으며 몸으로 막았다. 그 기세에 그녀도 바닥에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나마 바닥에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것이 위안이었다.

“…….”

엘피의 몸을 침대 삼은 것처럼 트론은 그녀 위에 몸을 겹친 채 계속 자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목만은 꼭 안은 채.

엘피는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조심스럽게 트론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할 힘도 없고, 그를 깨우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난리통에 웬만하면 깰 텐데 계속 자는 걸 보니 역시나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오후에 낮잠을 자는 고양이를 위에 둔 것처럼 따끈따끈한 온기가 퍼졌다.

아니, 따끈따끈하다기보다는 뜨겁다.

그의 목을 만져 보니 열이 나고 있었다. 엘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일란!”

그녀의 전서구를 부르자 반투명한 비둘기가 날갯짓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가이 님, 들리세요?”

[어라, 엘피 님. 좋은 아침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목소리를 듣게 되니 영광이네요.]

“그건 됐으니, 빨리 좀 와 주세요! 여기, 왕자님 계시는 별채예요!”

[왕자님께 무슨 일 생겼습니까?]

[그게, 열이 심하게 나세요. 감기 걸리셨나 봐요. 그런데 제가 전하를 옮길 수가 없어서…….]

엘피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도움을 청했다.

***

엘피를 꽉 안고 있는 팔을 풀어내려 하자 잠결에 칭얼대던 트론은 그대로 축 처진 채 침실로 이동되었다.

커튼을 쳐서 빛을 막고 이불을 덮어 주자 그는 다시 푹 잠들었다.

“어제 날도 추운데 얇게 입고 정원에 계셨어요. 일찍 주무시라고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제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엘피 님. 보아하니 자다 깨서 일하다 잠드신 것 같은데요.”

가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트론의 몸 상태가 나빠진 것이 단순히 감기 문제가 아니리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예의 독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다 제 잘못 같아요.”

“아닙니다. 일찍 주무시라고 말씀도 드렸다면서요. 왕자님께서 평소에 본인한테 너무 소홀하시긴 해요. 툭하면 밤샘하고, 식사도 부실하시고. 이후로는 저도 전하 건강에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엘피는 차가운 물수건을 트론의 이마에 얹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희 가문과 계약된 치유 주술사를 불러와야겠습니다. 약도 챙겨 오고요. 잠시 계세요.”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트론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가이는 짧게 한숨을 쉰 다음 방에서 나갔다.

“으음…….”

가이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론이 뒤척였다.

엘피는 깜짝 놀라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눈을 비비며 깨어나고 있었다.

“더 주무셔도 돼요, 왕자님.”

“몇 시……?”

“아직 8시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트론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윽…….”

어지러워서인지 그가 잠시 비틀거렸다. 엘피는 그의 몸을 붙잡으며 다시 눕히려 했다.

“감기 걸리신 것 같아요. 가이 님이 치유 주술사를 불러오신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

트론이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나이테.”

그가 부른 것은 뜻밖에도 전서구였다.

“소백작. 치유 주술사 부르지 마. 그리고 바로 이쪽으로 돌아와.”

[왕자님……? 네, 알겠습니다.]

연락을 끊고 트론은 헐떡이며 엘피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가 신경 쓸 것은 없다. 거처로 돌아가도록 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지금 할 일은 아프신 전하 곁을 지키는 것뿐이에요.”

“별로 아프거나 한 것 아니야.”

“지금 전하 열이 얼마나……!”

“누나.”

나지막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트론이 그녀를 불렀다. 엘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정말로 괜찮아. 부탁이니까 나가 줘.”

“어째서…….”

“아파서 비틀거리는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래.”

엘피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명령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엘.”

트론의 말투는 단호했다. 엘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는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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