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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39화 (39/132)

39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4)

암살 방비와 관련된 일들이 마무리된 후, 르터바이스 내부에서 약간 다른 종류의 트러블이 발생했다.

현 변경백인 밀리엔이 직접 수도까지 가겠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

중요한 회의인 만큼 후계자인 가이에게 대리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변이었다.

가이는 병세를 공표하고 자신이 대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려 했으나 밀리엔 본인이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최후의 설득을 위해 트론이 그녀와 독대하게 되었다.

“변경백. 무리해서 병세를 악화하는 것보다는 그대의 아들을 믿는 게 낫지 않겠나.”

“가이즈카 녀석이 이제 전하까지 직접 보내서 설득하려 하는군요. 굳이 그 녀석의 억지를 들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소백작의 부탁이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트론은 의자를 그녀의 침대맡에 더 가까이 끌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 편인지 밀리엔의 낯빛이 평소보다 나았으나, 역시 병색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은 가능한 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어야 해. 내가 그걸 바라고 있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의미가 큰 사람이었다. 가능한 한 더 오래 살아 줬으면 하는 트론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잘 손질된 도구를 하루라도 더 쓰고 싶은 마음에 불과할지언정.

“……후후. 전하는 위로가 서투시군요.”

“위로……?”

전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기에 트론은 눈을 깜빡였다. 밀리엔은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저는 뒷방 늙은이로 몸을 사리며 목숨을 연장하는 것보다,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

“그것이 르터바이스로서 제가 쌓아온 긍지이자 고집이랍니다. 분명히 가이즈카가 들으면 화내겠지만요.”

“그대가 건강하게 오래 버티는 것이, 데니옴 회의에 직접 참가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이다.”

“하긴, 왕자님은 실리를 추구하는 분이시죠.”

트론은 한 번도 밀리엔에게 본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현명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미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녀는 눈앞의 흑발 소년이 자신의 배우자를 죽이려고 획책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트론은 밀리엔을 대할 때마다 이전의 엘피를 마주할 때와 비슷한 거북함을 느꼈다.

‘마음의 빚 같은 건가.’

트론은 무심히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 나는 실리로서 그대의 수도행을 반대한다.”

“역시 허락해 주시지 않는군요.”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대의 병에 대해서는 내 쪽에서도 알아보겠다. 최대한 힘써 볼 테니, 건강해지고 나서 얼마든지 사방에 발자국을 남기도록 해.”

트론은 언제나 받은 만큼 상대에게 합리적으로 돌려주었다. 자신에게는 주술사 소양이 있으니, 그 정도는 밀리엔 르터바이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밀리엔은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전혀 웃을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트론은 약간 당황했다.

“아, 정말이지. 이나드 영애가 왕자님을 걱정한 마음도 알 것 같습니다.”

“무슨……?”

“가끔 병문안 올 때마다 전하 이야기를 해 줬거든요. 그녀가 버릇처럼 투덜거리곤 했답니다. 우리 왕자님이 너무 착해서 험한 세상 어떻게 헤쳐 나가나 걱정된다고요.”

“…….”

트론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밀리엔은 다시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딱히 제 병을 낫게 해 주시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전하께서 저를 생각해 주신 마음을 생각해서 수도행은 그만두겠습니다.”

“……그래.”

“가이즈카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수도행은 여러모로 위험하겠지요. 항상 자신만만한 아이지만, 그럴수록 어디서 발목을 잡힐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모쪼록 잘 지켜봐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웃는 것으로 체력을 소진한 것인지, 밀리엔은 사과의 말을 입에 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럼 푹 쉬도록 해. 변경백.”

“……네. 전하. 잠시 무례한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트론은 무표정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을 대신했다.

“전하와 이런 식으로 만난 게 아니라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다면, 저는 분명히 당신을 자식처럼 여겼겠지요.”

“…….”

“가끔 생각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 할지언정, 이제 겨우 열세 살인 소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전장의 한가운데를 걷게 하는 것 아닐까 하고요.”

“그래, 무례한 말이 맞긴 했군.”

“송구합니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트론은 밀리엔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딱히 그대가 나를 전장으로 떠민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발 디딘 모든 땅이 전장이 아니었던 때는 없었어.”

“……정말이지 어리석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왕자님의 긍지인 것을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긍지 같은 고귀한 단어 따위는 손에 쥐어 본 적도 없었다. 꼴사납게 발버둥 치며 추잡하고 비열한 길만을 걸어왔다. 살아남아 왕이 되기 위해.

“이번 데니옴 회의는 그대가 걱정할 일 없을 것이다. 잘 마치고 올 테니 심려하지 말도록 해.”

“네. 전하만을 믿습니다.”

트론이 밀리엔의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방을 나갔다.

잠시 그가 나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밀리엔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신께서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내온 이가 전하처럼 고고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전하는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신 건가요.”

하지만 트론을 자식이 아닌 주군으로 여기는 그녀로서는 건넬 수 없는 말이었다.

눈물 흘리며 그의 결락을 감싸 안고 자신보다 그를 아끼며 애정을 붓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의 역할일 것이다. 그것만이 위안이었다.

***

새카만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린 엘피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회귀 전, 한참 도망 다니던 시절의 꿈이었다.

왕자궁을 나온 후 3년쯤 지났을 무렵, 엘피는 크게 앓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도망 다니는 처지에 아프기까지 해서 트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아파서 혼절한 엘피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약을 구하러 다니는 것인지 집을 비울 때도 많았지만, 엘피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엘피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계에서 트론을 보았다.

열에 들뜬 채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이는 것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트론의 얼굴이었다.

그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목으로 삼켰다. 다음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론, 다친 거야……?”

울면서 물어보자 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

몸을 숙인 그가 엘피를 껴안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귓가에서 속삭였다.

엘피는 괜찮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기절하듯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묘하게 생생한 체험 후 엘피는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침대나 자신의 옷에 핏자국 같은 것은 없었다.

나중에 그에게 물어봤더니 꿈꾼 것 아니냐고 핀잔을 받았다.

그때는 그렇게 넘겼지만, 꿈에서 다시 그 장면들을 보니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꿈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을까?

만약 그 장면이 꿈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그때 트론이 무언가를 해서,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준 것일지도 모른다.

“……론.”

엘피는 흐릿한 이미지처럼 흔들리는 트론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일까? 실은 내가 모르는 데서 트론이 고생했던 거면 어쩌지?’

평온하다고 생각했던 도망 시절이 정말로 그뿐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을 거고, 네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가려진 진실이 있겠지만.”

문득 제시드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엘피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꿈속인데도 기묘하게 그 감촉이 생생했다.

만약 자신이 트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알고 싶었다. 자신이 모르는 데서 아파하고 있다면,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막아 주고 싶었다.

회귀 전의 자신이 그의 뒷면을 놓치고 있었던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사방에 빛이 내려왔다. 온 세상이 하얀색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엘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주변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여기는. 데니옴 왕궁?”

낯이 익은 내부 장식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꾸었던 자각몽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주변에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엘피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엘피 역시 호기심에 그쪽으로 향했다.

“아가씨, 정신 차려요. 아가씨!”

“어떡해, 숨을 안 쉬어요!”

시종이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몸을 일으켜 안고 흔들고 있었다.

엘피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 여성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루베인 마그달리사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안 돼!”

엘피는 크게 소리치며 잠에서 깨었다. 땀 때문에 온몸이 축축했다.

“여기는…….”

주변을 둘러보니 서고였다.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 꿈을 꿨던 모양이었다.

졸기 전의 상황이 그제야 서서히 떠올랐다.

가이는 변경백을 대리해서 참석할 행사가 있어 트론과 함께 외출했고, 엘피는 틈이 생긴 김에 서고에서 라이샤와 관련된 조사를 하고 있었다.

“방금 그 꿈…….”

엘피는 읽고 있던 사료를 내려다보았다. 고루한 문체로 쓰인 라이샤에 대한 기록이었다. 몇 년도에 라이샤가 어떤 예언을 했다느니 하는 내용뿐이라 실망하면서 읽던 참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또한 이 기록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었다. 라이샤는 가능성의 미래를 꿈으로 본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트론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조바심 때문에 의미 없는 꿈을 꿨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하지만 지나치게 생생했던 꿈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자신은 계시 같은 걸 받은 적도 없고, 제시드가 사라진 이상 라이샤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물을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 꿈을 무시했다가 만에 하나 미래에 그 일이 일어난다면, 루베인이 죽는 걸 방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엘피는 제시드가 남겼던 말을 되새겼다. 가능하면 루베인을 부탁한다고 했다. 유언이나 다름없었던 그의 말을 생각하면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예지몽이 아니었다면 그건 그때 가서 얼버무리자. 우선은 왕자님한테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엘피가 알고 있기로 루베인은 마그달리사 저택에 연금당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데니옴 왕궁까지 갈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거기에, 정말로 공작의 딸인 루베인이 다칠 정도라면 데니옴 왕궁에서 트론이나 가이 역시 위험할 가능성이 컸다.

엘피는 역시 자신이 본 꿈을 트론에게 전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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