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긍지와 파란의 수도 (1)
겨울의 데니옴 왕궁은 삭막하여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중앙궁의 모습은 더욱 처참했다. 마치 일부러 돈을 들여 만들어 낸 폐허와 같은 모습이었다.
금과 고귀한 그림, 값비싼 비단으로 장식된 벽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스레데니옴 왕국의 가장 높은 자가 앉아야 할 옥좌는 다리가 부서져 계단 옆을 나뒹굴었다. 깨진 대리석과 도자기의 조각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곳이 데니옴 왕궁의 그레이트 홀이라고 말하면 이 참상을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회색 머리의 남성이 그 잔해를 밟고 홀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헤럴드 스레데니옴.
이 나라의 왕제이자 데니옴 왕궁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지?”
그가 험악한 얼굴로 계단 아래를 노려보았다.
아래에서 헤럴드를 올려다보고 있던 자는 그의 참모인 비에르카 라블미 백작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초록색 머리를 틀어서 올려 묶고 상복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의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 이상 여론을 악화할 수 없으니, 왕성을 비우고 데하스 공작가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하, 이것은 저희 참모진이 전원 찬성한 결정 사항입니다.”
라블미 백작이 침착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대가 무능한 것 때문에 이 꼴이 되었다. 그런 주제에 감히 결정 사항? 나를 능멸하려 하는가?”
“이것이 최선입니다. 트론 전하가 나타난 이상,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손해 볼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붉은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헤럴드의 화려한 옷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허영이 느껴지는 의상은 그가 부숴 놓은 그레이트 홀의 잔재와 맞물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전하, 노여움을 거두시고 저의 진실한 충언을 모쪼록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대로는 저희가 너무 불리합니다.”
헤럴드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선왕인 셀딕 스레데니옴이 사망한 현재 시점에서 국법에 따른 왕위 계승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순위, 왕세자 말러 스레데니옴.
2순위, 둘째 세틱스 스레데니옴과 셋째 트론 스레데니옴.
정식으로 책봉된 왕세자가 아닌 이상 그 이하 자녀들의 왕위 계승권 순위 차이는 크게 의미 있지 않았다.
3순위, 왕제 헤럴드 스레데니옴.
4순위는 공작위 이하 계승권이 있는 가문에게 돌아가지만, 보통 여기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헤럴드가 조바심을 내며 조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왕위를 확정 짓고 싶어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정석적인 계승권 싸움으로 가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옥새가 문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는 궁성을 장악하고 옥새를 확보한 후 국군통수권을 발동할 예정이었다. 옥새를 이용한 결재는 곧 왕의 명령과 동일하기 때문이었다.
변경령을 다스리는 특수한 위치인 르터바이스를 제외하면 귀족가의 사병 조직은 금지되어 있다.
국군만 손에 넣는다면 나라 전체를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왕위를 결정짓고 일사천리로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옥새가 사라진 탓에 반역 당시 국군을 장악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법리를 검토하여 이 상황에서 자신이 왕이 될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헤럴드가 왕위에 오르기 바로 전에 저주스러운 셋째 조카가 나타난 것이었다.
“……역시 빌어먹을 트론 새끼를 처리했어야 했는데.”
“전하…….”
“사람을 보내. 조카 놈들이 살아 있는 꼴을 하루라도 더 보고 싶지 않다. 특히 트론의 시체는 반드시 내 앞으로 가져와. 직접 확인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의 충언, 들어주신 것으로 믿고 준비하겠습니다. 옆에 하녀들을 대기시켜 두었으니, 옷을 갈아입으시는 대로 나와 주십시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트론 전하의 계승권 순위가 높다고 해도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는 겨우 르터바이스 하나의 힘을 업었을 뿐입니다.”
“이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라블미 백작.”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데하스 공과 함께 다음 수를 생각해 두었습니다.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라블미 백작 역시 이번 일은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잠시 트론의 스승 노릇을 했었기에 더 그러했다.
그 어린 나이에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엎드려 있던 트론에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제는 절대로 그를 만만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계책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대항할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꽉 깨문 입 안에 깊게 상처가 파였다.
그녀는 저주와 원망을 담아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선뜩한 색이 바닥에 흩어졌다.
***
“오늘 기사 제목 재밌네요, 왕자님.”
집무실에 들어온 가이가 신문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아직 기사를 확인하지 못했던 엘피가 조심스럽게 그 신문을 들어 올렸다.
「헤럴드 전하, 왕궁에서의 추모제를 마치다」
기사에는 헤럴드가 선왕인 셀딕 스레데니옴을 기리는 100일 추모제를 끝내고 데니옴 왕궁을 나가 데하스 영지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길게 쓰여 있었다.
수수하고 품위 있는 검은 상복을 입고 왕성을 나서는 그의 모습이 고고했다느니 하는, 아무래도 좋은 묘사까지 붙어 있었다.
“왕궁 불법 점거를 이런 식으로 포장했으니 이 부분은 항의하기 어렵겠네요.”
가이가 눈을 찡그리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스승님의 작품이겠지. 숙부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대부분 그녀의 공이니까.”
“비에르카 라블미 백작 말씀이시군요.”
“그래. 직접 사사한 기간이 짧아서 스승이라는 표현을 본인이 기꺼워할지는 모르겠지만.”
엘피는 정치면과 사회면을 훑어본 후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에 대한 보도는 정말 안 해 주네요. 오늘도 기사가 없어요.”
트론과 관련된 기사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고 며칠은 실렸다.
그러나 바로 헤럴드 측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그 후로는 존재를 무시하는 것처럼 트론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마그달리사 공작과의 토지 거래나 고아원 운영 인수에 대한 건조차 트론에 관한 언급은 최소한에 그쳤다.
“그 부분은 차차 대응해 나가야겠죠. 그리고 어차피 ‘데니옴 회의’ 때가 되면 트론 전하 이야기를 아예 안 쓸 수는 없을 겁니다.”
“네……. 옥새를 얻었어도 갈 길은 머네요.”
“그러니 더욱이 이번 데니옴 회의가 중요한 거랍니다. 그렇죠, 왕자님?”
트론은 무표정하게 끄덕였다.
‘데니옴 회의’는 현재 왕국의 중요 의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발안자인 트론이 이 회의를 처음 제안한 것은 마수 재해 처리로 계속 충돌하고 있는 마그달리사와 처필을 중재하기로 약속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그 표면적인 이유를 시작으로 왕국의 무궁한 발전과 미래를 위해 각종 중대사를 논의하자는 뜻을 내비쳤다.
즉, 비어 있는 왕좌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하자는 뜻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는 영지를 총괄하는 4대 공작 및 르터바이스 변경백, 그리고 왕위 계승권자들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만약 그전까지 실종된 두 왕자가 나타난다면 마찬가지로 참석 자격을 얻을 것이나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헤럴드가 그들을 찾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도 했고, 트론 역시 웰칸 연합을 통해 그들의 행방을 알게 되면 놓치지 않도록 주시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각 귀족가의 일정이나 준비 기간 등을 생각하여 회의 일자는 2월 초로 잡혔다. 개최 장소는 수도인 데니옴으로 협의되었고, 그 지명을 따서 ‘데니옴 회의’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직접 대귀족 전원이 모여 회의를 하는 일 자체가 몇 년에 한 번 있는 일이기도 했고, 중앙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르터바이스가 움직였다는 것 때문에 벌써부터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 회의에 앞서 이후의 일들을 정하기 위해 트론은 가이와 엘피와 함께 자료를 검토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숙부는 원래 왕좌가 비어 있는 긴급한 상황을 핑계로, 우리 형제에게 빠른 실종 선고를 내리고 왕위에 오를 생각이었다.”
“전하가 나타난 이상 무의미해진 방법이었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다음으로 시도할 수는, 나를 죽이는 방법이겠지.”
엘피는 눈을 홉떴다. 실제로 그를 암살하기 위해 투입된 전력도 있었던 그녀로서는 전혀 웃어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가이만이 여상하게 답했다.
“보통은 그렇겠네요. 데니옴 회의 전까지 왕자님만 사라지면 헤럴드에게 장애물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저희 가문이 전력을 다해서 지켜드릴 겁니다.”
“그거 말인데.”
트론은 느슨한 동작으로 소파에 기댔다.
“당분간 나에 대한 호위를 최소한으로 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엘피가 깜짝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켰다.
“숙부가 나를 암살하는 수에 얼마나 힘을 쏟을지 가늠하고 싶다. 미끼를 풀어야 고기가 물 것 아닌가.”
그 말은 즉 트론이 자기 자신을 미끼로 해서 암살의 위험에 노출되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방법은 말도 안 됩니다!”
눈을 부릅뜨며 엘피가 반대했다. 가이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다른 것보다 저희 가문의 무력을 그 정도로 못 믿으시나 싶어서 섭섭한데요. 저쪽이 어떤 수로 나오든 지켜드릴 수 있답니다.”
“맞아요, 왕자님. 그러니까…….”
“모든 자원은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인력도 마찬가지야.”
트론은 테이블 위를 검지로 그었다.
“최대한의 방비로 항상 무장하고 있으면 숙부는 암살을 시도할 생각도 안 하겠지. 하지만 그 최대한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지? 르터바이스는 정예 인원을 항상 나에게 붙여 놓을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영지인가? 그대나 변경백의 호위는 또 어쩌고?”
“전하 말씀도 알겠지만…….”
가이가 난처한 얼굴로 반박하려 했으나 트론은 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숙부가 암살에 쓸 수 있는 자원이 20인데 우리가 항상 100으로 방어하는 건 딱 잘라 말해서 낭비야. 그대들은 이게 전쟁이라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군. 군자금은 무한하지 않아.”
“……저희는, 전하가 걱정되어서.”
엘피의 미약한 목소리에 트론은 굳어 있던 표정을 약간 풀었다.
“괜찮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 암살을 시도하든 대응할 자신이 있으니까. 나야말로 그대들이 나를 믿어 주지 않는 것 같아서 섭섭하군.”
가이는 끙 소리를 냈다. 트론이 말하는 ‘대응할 자신’에 독살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엘피가 파리해진 얼굴로 입술을 떨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왕자님. 제가 읽을 수 있는 미래는 한정적입니다. 왕자님의 모든 위험 가능성을 미리 알 순 없어요…….”
“알고 있다. 그것도 포함해서 괜찮다고 하는 거야. 물론, 그냥 나 혼자만 당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르터바이스 소백작. 당분간 그대 가문의 정예 중에서 기척을 숨기는 것이 특기인 이들을 붙여 줘. 내가 처리 못 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전하도 참 고집불통이세요.”
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엘피의 정수리를 가리키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어쩌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트론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