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대의와 꽃의 공녀 (12)
트론은 갑자기 반말을 해온 루베인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첫 협상 때의 가이처럼 도발해서 시험하려는 의미인지, 혹은 다른 속내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말이 짧군. 불경죄로 당장 베이고 싶나?”
하지만 루베인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배짱을 부렸다.
“지금 마그달리사 공작이 아끼는 딸을 죽여서 얻을 이득은 없을 거 아냐. 안 벨 거 알아.”
“도발하려는 거면 사람을 잘못 골랐다, 루베인 마그달리사. 나는 버릇없이 자란 공녀의 놀이 상대를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야.”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베인을 쏘아 보았다.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정당한 자세를 갖춰라. 왕족에 대한 예의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기본적인 존중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면, 천한 피가 섞인 왕족은 그럴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 하대했나?”
“절대 그런 뜻은 아니야!”
루베인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영지민 회관에서 만나서 전하랑 이야기했을 때, 무척 기뻤어. 아무도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같이 해 주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 달리 마그달리사 공작의 딸이라는 자리에 얽매여 있잖아. 그런 걸 다 떠나서, ‘베인’이었을 때처럼 진솔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실소가 나올 정도로 순수하고 어리석은 이야기였다. 물론, 트론에게서 나온 것은 실소가 아니라 한숨이었다.
자기 목숨 내놓고 가식 없는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가이 말고 또 나올 줄은 몰랐다.
“전하께서 불쾌하셨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루베인이 풀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트론은 그녀가 마치 친구가 생겼다가 빼앗긴 듯 침울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됐다. 형식상의 예의를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그냥 말해.”
“진짜 괜찮아?”
“두 번 대답하게 하지 마.”
트론이 불퉁하게 허락하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 전하가 왕이 될 생각인지 확인하고 싶었어.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등장한 것도, 옆에 나를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닌 것도, 그 이유 맞지?”
트론은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루베인을 마주 보았다.
“알고도 이용당해 줬으니, 궁금증 정도는 풀어 주면 좋겠어, 전하.”
“애초에 머저리가 아니라면 누구나 짐작할 일 아닌가.”
“자신만만하네. 르터바이스를 등에 업었다고 안심할 때가 아닐 텐데? 헤럴드는 데하스와 처필을 포섭하고 있잖아. 우리 각하는 신중파라 계속 중립을 지킬 거고. 솔피시언은 일단 반헤럴드파긴 하지만, 선왕비의 본가니까 전하 네 편을 들어줄 리가 없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구태여 길게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군.”
트론의 대답은 냉랭했다.
루베인은 달빛을 반사하여 어딘지 푸른빛을 머금은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너는 그런 상황에서 괴물한테 잡아먹히러 가려는 거야?”
질문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걱정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트론은 그 눈빛에 기시감이 들었다.
그의 라이샤가 자신을 바라볼 때 그랬다. 엘피는 그에게 선의를 기대하며, 안위를 걱정했다.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트론이 잘라 내듯 답하자 루베인은 간절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나는 전하가, 괴물한테 잡아먹히는 게 아니라 그들을 쓰러뜨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은 힘이 너무 기울잖아.”
“…….”
“저기, 우리 각하는 중립이긴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까?”
푸르른 이상에 심취한 꽃의 공녀는, 잠깐의 만남으로 트론의 인물상에 멋대로 환상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은 기회였다. 이보다 더 좋은 도구도 찾기 힘들었다.
그만큼 루베인이 가져올 이득은 컸다. 마법유전이 터질 땅, 마그달리사 공작가와의 우호적인 관계, 사교계의 주목.
냉정하게 계산한다면, 가이가 농담처럼 말했던 대로 약혼 동맹을 맺는 것도 유효한 수단일 것이다.
그녀의 힘을 얻기 위해 합리적으로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쉽게 그려졌다. 엘피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의와 선의가 있는 양 포장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엘피와 다르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루베인을 상대로는 기묘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대항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대는 괴물을 쓰러뜨리고 싶나?”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힘이 없으니까, 전하를 도와서 보탬이 되는 건 어떨까 하고.”
트론은 며칠 전에 엘피가 루베인에 관해 언급했던 예언을 떠올렸다.
“무척 올곧고 정의로운 성격이었어요. 미래에서도 그녀는 대의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 순간, 트론 안에 있던 루베인을 향한 위화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폭군이 된 미래에 대의를 가지고 움직이는 자라면, 나와 적대하는 길밖에 없겠지.’
르터바이스 가문의 힘을 얻어 자신을 쓰러뜨렸다는 자가 눈앞의 소녀이리라는, 그런 확신이었다.
절대로 루베인 마그달리사와는 손을 잡고 싶지 않다.
합리성이나 이성을 짓누르고 그 답만이 트론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대는 괴물을 쓰러뜨리는 자도 같은 괴물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무슨…….”
“데하스와 처필이 숙부를 지지하는 건 딱히 눈물 나는 충정의 결과가 아니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뜻을 함께하는 것뿐이다. 숙부가 그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걸 차단하든, 교란하든,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 수는 얼마든지 있어. 그대가 말했던 비열한 방법도 포함해서 말이지.”
달빛이 정원에 가득 피어 있는 세인트폴리아를 비췄다.
트론은 꽃의 도시라는 이명에 부끄럽지 않게 화려한 꽃의 향연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괴물을 밟고 물어뜯고 불태울 것이다. 그렇게 괴물들 위에 기어올라 갈 나 역시 괴물 아닌가?”
“…….”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다면, 사람 잘못 보았다고 답해 주지. 루베인 마그달리사. 대의가 승리하는 아름다운 미래를 바란다면 그대의 놀이터에서 이루도록 해.”
꽃의 공녀 루베인이 그려 내는 대의나 이상은 어설프고 힘없는 소꿉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노력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근간에 둔 것은 올곧은 심지였다.
“그럼, 전하 넌 왕이 되어서 뭘 하고 싶은 거야?”
“…….”
그에 반해 트론의 안에는 심지 따위는 없었다. 텅 빈 구멍에 새카만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왕이 되기까지의 길은 뚜렷하게 그릴 수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앉을 계획만은 완벽하게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없었다. 이루고 싶은 이상도, 손에 쥐고 싶은 욕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
어째서 루베인에게 대항심이나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트론은 깨달았다.
단순히 그녀가 미래에 자신과 적대할지도 모르는 대척점이라서가 아니었다.
올곧은 심지를 지닌 자에게 엘피 이나드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해서였다.
그 라이샤가 바라는 선의나 대의는 트론보다는 루베인에 가까웠다.
아니, 오히려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면 어째서 엘피가 루베인이 아닌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하.”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군. 이만 돌아가지. 그대의 부친도 걱정할 것이다.”
트론은 무언가 말하려는 루베인의 말을 끊어 버리고 팔을 내밀었다. 더 이상 대화의 여지는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로 두 사람은 다시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아원 건은 역시 마그달리사 공작과 직접 교섭해야겠군.’
트론은 자신이 어그러뜨린 상황을 다시 머릿속에서 계산했다. 하지만 복잡한 심경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엘피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후에야 이 갑갑함이 풀어질 것만 같았다.
***
“아, 왕자님. 소백작님. 다녀오셨어요.”
호텔에 먼저 돌아와 있던 엘피가 그들을 맞이했다.
트론은 인사를 받아 주면서 약간 의문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기운 없어 보였다.
혹시 옥새를 가져오는 것에 실패했나 했는데, 엘피는 바로 트론에게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그 옥새군요.”
가이가 뒤에서 들여다보며 기꺼운 표정을 했다.
트론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끄덕였다.
“음, 왕실의 문장이 틀림없군. 잘해 주었다, 이나드 영애.”
“전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들어주셨으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피는 이어서 ‘멜시아 꽃’에 대해 들은 정보를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둘 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멜시아 꽃이라면 마약 중에서도 질이 나쁜 종류로 알고 있는데요. 과거에는 주로 자백제나 세뇌제로 쓰였죠. 조금만 과잉 섭취해도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다던가요.”
“그래. 그렇게 위험한 만큼 암흑가의 수요가 높아서 가격은 비싸다고 하지. 일반 작물의 몇만 배는 되는 이윤을 남길 수 있으니 눈이 뒤집히는 것도 모를 바는 아니다만.”
“올페마로 돌아가면 그 두 남작의 주변을 포함해서 캐 보겠습니다.”
“그래.”
엘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안심했다.
트론의 치세에 마약같이 끔찍한 물건이 쉽게 유통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나드 영애,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옥새뿐만 아니라 귀중한 정보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하군. 수고 많았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
그렇게 다사다난한 전야제를 마무리하고, 엘피는 트론의 옷시중을 들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몸에 연고를 발라주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엘피의 낯빛은 어두웠다.
“……이나드 영애.”
“아, 네!”
“무언가 고민이 있나? 아까부터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
트론의 질문에 그녀는 뜨끔했다. 옥새를 확보하여 트론에게 도움이 된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지만, 제시드에 대한 일이 머리를 맴돌아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엘피는 그의 셔츠를 입혀 주며 얼버무렸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그것보다, 상처가 많이 아무셨네요. 오래된 자국도 다 사라지면 좋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그녀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트론은 따져 묻지 않고 받아 주었다.
“……그래. 그대가 열심히 치료해준 덕분인 것 같군.”
“제가 한 일은 별것도 아닌걸요. 그럼 저는 이만…….”
엘피가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트론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하?”
“전에 그대가 말했지. 무언가 숨긴다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고, 나한테 위해가 되는 일도 하지 않는다고.”
“……!”
트론은 엘피가 그 말을 했을 때처럼 깍지 끼워 그녀의 손가락을 얽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그걸 의심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 비밀 때문에 그대가 지나치게 고민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왕자님…….”
“그것뿐이다. 그럼 푹 쉬도록 해.”
그녀가 지금 고민하는 일은 트론이 짐작하는 것과는 달랐다. 밝힐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홀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가 걱정해 준 것만으로도 엘피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네, 전하. 안녕히 주무세요.”
그제야, 머릿속에 밀어 두었던 고민과 대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엘피는 방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 제시드 개인에게 큰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 붉은 머리 청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소설로 읽었던 내용뿐이었다.
그조차도 엘피에게 있어서는 ‘감정 이입하여 읽었던 소설’이라기보다는 ‘수첩에 남아 있는 정보 모음’에 가까웠다.
처음 읽었을 당시에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원래대로라면 6년 후 활약했을 청년의 소멸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꾸 누군가 죽거나 사라지는 걸 눈앞에서 보게 되네…….’
엘피는 원작의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6년 후에 나타난 제시드는 루베인이 트론을 쓰러뜨리는 것을 예언자로서 도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사랑하는 루베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라졌다.
‘그럼 뭔가 제시드가 이 시점에서 힘을 써서……?’
잔류 사념이라느니 자신의 이야기가 실패로 끝났다느니, 그가 한 말을 전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엘피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었다. 가짜 라이샤를 자칭하는 그녀를 책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격려하는 듯한 말을 건넸다.
‘나에게 기대한다고 했어. 하고 싶은 일을 행하라고.’
엘피는 그가 남긴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수첩에 적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말을 문장으로 쓴 후 멈칫했다.
“처음 그 마음을 잊지 마.”
그녀의 첫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트론을 허무하게 죽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가 성군이 되어 행복한 미래를 쥐는 그 모습을 지켜보리라.
그 맹세를 속으로 되뇌며 엘피는 눈을 감았다. 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제시드가 평안하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