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의와 꽃의 공녀 (4)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손해 안 보게 내가 도와줄게. 브로치?”
골목을 벗어나자 소년이 물었다.
엘피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조금 전에는 구경만 한 거였어. 사파이어가 아닌데 속이는 것도 알았고.”
“어……?”
“아, 괜한 참견을 했다거나 그런 의미로 하는 소리는 아니야. 일부러 도와줘서 고마워.”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미안해. 남 일에 그만 참견하라는 소리 자주 듣는데, 버릇을 못 고치나 봐.”
“전혀 안 그래. 고맙다니까?”
“하지만 도움 못 된 거잖아. 어…… 그거 말고 뭔가 도울 거 없어? 외지 사람 같아 보이는데.”
“그거라면……. 생일 선물을 고르고 있는데.”
“아, 그래? 누구 건데?”
잠시 트론의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엘피가 간신히 결론을 내렸다.
“음…… 직장 상사?”
엘피의 이야기를 들은 소년이 미간을 찌푸렸다.
“직장이 이상한 곳이야? 상사가 생일 선물 하라고 강요해?”
“아하하, 그런 거 아니야. 평소에 신세를 많이 져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려고.”
“흐음.”
그는 팔짱을 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걷기 시작하자 금발이 찰랑거리며 오후의 햇살을 반사했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눈동자는 엘피와 비슷한 푸른색이었지만, 그녀보다 좀 더 짙었다.
“그 직장 상사란 사람 남자야, 여자야?”
“남자.”
“남자면 뭐가 좋을까. 파이프 담배 같은 것도 요즘 인기 있긴 하지.”
“아, 그건 좀. 성인이 아니거든.”
“성인이 아닌데 직장 상사라고?”
역시 자신의 설명이 좀 이상했던 모양이라고 엘피는 살짝 후회했다.
‘그렇지만 직장 상사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데.’
고민하던 그녀는 가이의 인적 사항을 팔기로 했다.
“그게, 내가 일하는 집안의 도련님이야.”
“친한 사이면 뭘 줘도 좋아하겠지만, 잘 모르겠네. 보통 귀족 도련님은 비싼 거 아니면 눈에 안 차지 않나? 너도 예산이 적을 거 아냐.”
예산이라면 그럭저럭 마련할 수 있지만, 그의 말은 엘피로서도 좀 걸리는 지점이었다.
회귀 전의 트론은 다정해서 그녀가 뭘 주든 기뻐했겠지만, 현재의 그와는 그만큼 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가이와 터놓고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성별이 달라서 친해지기 어려운 건가. 차라리 나도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어딘지 시무룩해 보이는 엘피의 얼굴에 뭔가 오해했는지 소년이 그녀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괜찮아, 어차피 금은보화를 주지 못하는 이상 예산이 많든 적든 큰 차이 없지. 중요한 건 마음 아닐까?”
“마음?”
“마음이라기보다, 정성? 재료를 사서 직접 만들어 주는 건 어때.”
소년은 생각나는 대로 말한 것 같았지만, 그 말이 엘피에게는 와닿았다.
“그러게. 좋은 생각이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야. 저쪽으로 가면 소품 재료 같은 것들도 파니까 한번 둘러봐.”
“응, 정말 고마워. 바로 가 볼게.”
“그래. 사기당하는 일 없게 조심하고.”
엘피는 인사하고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 도련님을 짝사랑이라도 하나? 신분 차이가 있으니 험난하겠네.”
엘피 본인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았을 오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다.”
혀를 차며 아쉬워하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귀족 도련님의 시종으로 딸려 왔고 외지인이라면,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가 쉽게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잘하면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그럼 좋겠다.”
헤헤 웃으며 그도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
엘피가 쇼핑을 다 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진 상태였다. 종종걸음으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 그녀를 붙잡았다.
“누나.”
익숙한 목소리에 반신반의하며 돌아보니, 설마 했던 트론이 맞았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왕자님!’이라고 외칠 뻔한 것을 참았다.
“론! 어떻게 된 거야? 드레스도 안 입고…….”
바깥에서 그의 남자 차림을 보는 것도, 누나 소리를 듣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라 감개무량했다.
“용건 있어서 잠깐 나온 거라. 누나는 쇼핑?”
“으, 응.”
들고 있는 쇼핑백의 내용물을 절대 트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엘피는 그의 등을 떠밀며 귀가를 재촉했다.
“배 많이 고프지? 호텔에서 저녁 뭐 먹을지 정할까?”
“아니, 밖에 나온 김에 먹고 들어가자.”
“호텔 들러서 짐은 맡기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 둘 다 늦게까지 안 들어가면 소백작님도 걱정하실 거고.”
안절부절못하는 엘피의 표정을 오해한 것인지, 트론이 뚱한 얼굴을 했다.
그는 쇼핑백을 빼앗아 들곤 엘피의 손을 쥐었다.
“소백작이야 자기가 알아서 챙겨 먹겠지. 가자.”
이러다 선물을 들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그녀는 트론을 따라갔다.
“론은 뭐 먹고 싶어?”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누나 먹고 싶은 대로 정해.”
“그럼…… 이왕 멀리까지 온 거니까 이 동네 특산물이나 향토 음식 먹고 싶은데.”
트론은 엘피와 걸음 속도를 맞추며 답했다.
“하븐의 음식 특산물이라면 사슴고기랑 곰 고기려나.”
“음……. 꽃의 도시라더니 특산물이 특이하네. 이왕 온 거니까 먹어 볼까.”
“어느 쪽?”
“모처럼 먹는 거니까 더 야성적인 곰으로.”
트론이 피식 웃었다. 무척 오랜만에 그가 웃는 것을 보는 것 같아서 엘피는 낮 내내 어딘지 우울했던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론은 정말 백과사전 같아.”
“응?”
“질문하면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오래된 역사도, 어떤 동화책의 시구도, 그 도시의 특색도,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필요한 만큼 머리에 집어넣었을 뿐이야. 각 분야에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무척 많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론이 가장 대단하게 느껴지는걸.”
그리고 그가 박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자신을 혹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엘피는 잘 알고 있었다.
‘쉴 땐 쉬라고 잔소리해 봤자 돌아오는 말은 ‘수면은 충분히 취하고 있다’ 정도겠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우연히 마주친 거 신기하다. 론도 볼일이 딱 그때 끝난 거야?”
“…….”
트론이 허를 찔린 표정으로 엘피를 바라봤다. 회귀 전에도 저런 표정은 자주 못 봤기에 그녀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내가 뭐 잘못 물었나……?’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대충 그래. 가자.”
“앗, 응. 괜한 걸 물어봐서 미안해.”
엘피의 손을 끌고 곰 고기 요리점에 도착할 때까지 트론은 내내 말이 없었다.
조금 전 그가 잠시 웃어 주었을 때 밝아졌던 엘피의 기분도 그에 따라 가라앉았다.
***
낮에 엘피가 가이와 함께 코스 요리를 먹었던 고급 레스토랑과 달리 곰 고기 요리점은 투박한 선술집에 가까웠다.
좁은 실내에 자리를 잡은 후 두 사람은 곰 고기 스튜를 주문했다.
메뉴를 주문하는 과정에서 아무거나 괜찮다고 답한 것 외에 트론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피는 그래서 정작 곰 고기가 무슨 맛인지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한 채 대화 없는 식사 시간을 보냈다.
“……론, 혹시 나 말실수했어?”
식사를 거의 다 마친 후 엘피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을 마시던 트론이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거 없는데.”
“얼굴이 화난 것 같아서…….”
“화 안 났어.”
그 대답을 들어도 엘피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트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일부러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오해를 낳은 모양이었다.
“정말이야, 누나. 곰 고기는 맛있어?”
“그냥 평범한데……. 생각보다 누린내도 안 나고.”
“그건 다행이네.”
“론은 별로였어? 또 얼마 안 먹고.”
“나도 그냥 평범했어.”
대답하면서도 트론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볼일이 딱 그때 끝나서 우연히 마주친 거였냐고 엘피가 물었을 때부터 계속.
점심에 가이가 엘피를 데리고 나갔을 때부터 내내 원인을 알 수 없이 기분이 안 좋았다.
혼자 돌아온 가이에게 일거리를 떠넘기며 화풀이를 해도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깥에 나와 용건을 처리한 후 하븐 거리를 조사하기 위해 주변을 떠돌았다.
별생각 없었던 자신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를 방금 엘피의 질문으로 깨달았다.
거리 조사는 그저 핑계일 뿐, 한시라도 빨리 그녀와 마주치고 싶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너무 혼란스러워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화가 없었던 것 때문에 엘피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울상인 것 역시 기분이 안 좋았다.
“혹시 내가 저녁으로 이상한 메뉴 골라서 그래?”
“안 그래. 평범했다니까.”
그 말로도 주눅이 든 눈치였다. 엘피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려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엘이랑 식사하는 거 좋아해. 그래서 먹고 들어가자고 한 거야.”
그 말은 무심결에 튀어나왔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저, 정말?”
“……응.”
망설이며 대답하자 엘피가 활짝 웃었다.
“그럼 점심도 셋이 같이 먹으러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뭐가 즐겁다고 소백작이랑 밖에 나가서까지 같이 밥을 먹어야 하지.”
“둘이 친하면서 그런다.”
“…….”
그녀가 두 사람의 교우 관계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엘피의 얼굴이 풀어져서 평소처럼 해사해진 면만은 마음에 들었기에 트론은 따져 묻지 않았다.
***
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까지 걸어가며 트론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신경 쓰는 것도 귀찮을 텐데.’
그 모습을 본 엘피는 그간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남들 눈이 있을 때는 여장을 하거나, 혹은 후드를 쓰는 트론의 생활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론, 계속 힘들었지?”
“응?”
“위장하느라고. 계속 얼굴 안 보이게 감추거나, 여장하거나 그랬잖아.”
그는 엘피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말하는 ‘힘들다’라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왕자궁에서 지내던 일상이 더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를 가장하며 납작 엎드려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계산하고 고려하는 것은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때때로 자신을 괴롭히러 오는 둘째 형 세틱스의 구타는 가끔 있는 비정기 행사 같은 것이었다.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힘들다는 것을 느끼기 이전에 그것이 일상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딱히 힘들 건 없었는데.”
“갑갑할 거 아니야. 그래도 파티가 끝나면 당당하게 다녀도 되니까. 조금만 참으면 돼!”
여장하는 것이 거북하긴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여동생처럼 대하는 엘피에 대한 기묘한 섭섭함 때문이었다.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실 1년이고 2년이고 여장을 한다고 해서 갑갑하고 힘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작은 일에도 그가 힘들지 않을까, 마음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왜 그렇게까지…….’
주군과 신하라고 해 봤자 그냥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가이즈카 르터바이스가 알기 쉬웠다. 그의 장난질은 그저 본인의 재미를 위한 것일 뿐, 선을 넘지는 않으니까.
웰칸 연합을 대하는 것도 마음 편했다. 그들이 자신을 주군이라 부른다고 해서 그 충성이 진심이라는 착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합리적인 협력. 주는 것과 받는 것. 명확하게 나눠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돌려줘야 할 것만은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
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채 가만히 서 있자, 엘피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많이 힘들었던 거야?”
그녀는 진심처럼 걱정하고 진심처럼 그에게 모든 신경을 쏟았다.
사전에서 그런 부류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정’이라고 불리는 단어였다.
“아냐, 난 괜찮아. 누나.”
“응……. 피곤하면 빨리 호텔 돌아갈까?”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트론은 생각했다.
사전에도 존재하는 그 단어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할 것이란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피곤하진 않지만, 할 일이 많으니까 바로 들어가자.”
그는 환영받지 못하고 태어나 불순물처럼 취급받으며 자라 왔다. 이윽고 그 불순물은 이 나라를 새카맣게 물들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다 할 것이다.
‘그 후에는…….’
모두에게 저주받으며 이 나라와 함께 사라지려나. 라이샤로서 그녀가 본 어떤 미래에서 그는 폭군이 되어 죽었다는 모양이니, 아마 그럴 것 같았다.
그런 삶에 애정이라는 단어가 자리할 틈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