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의와 꽃의 공녀 (3)
엘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차가워라.”
“식사 끝나면 레스토랑에 샌드위치 같은 거 테이크아웃 부탁하죠. 왕자님 갖다 드려야겠어요.”
“이 시간에 그거 드시면 저녁은 거의 안 드실걸요.”
“성장기인데 전하는 왜 그렇게 입이 짧으신 걸까요!”
참으로 엘피다운 신경질에 가이가 폭소했다.
“저는 성장기나 지금이나 잘 먹어서 드릴 말씀이 없군요.”
“…….”
엘피는 회귀 전을 떠올렸다.
요리 실력이 꽝이었던 자신을 대신하여 트론이 항상 요리를 도맡았었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행복하니 그걸로 됐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에는 본인이 요리한 음식이라 입맛이 떨어져서 입이 짧은 것 아닌가 의심했다. 그래서 남이 해 준 음식이면 먹을까 싶어 요리 도전이라는 이름의 요리 재료 처형식을 벌였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지만.
하지만 그건 원래 성향이었다. 왕자로 복권하고 톱클래스의 요리사가 갖다 바치는 산해진미를 앞에 둬도 그는 언제나 시큰둥했다.
본인 입맛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건강을 생각하면 더 많이 먹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엘피는 애가 탔다.
“싫어하시는 거 억지로 하시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건강이 걱정돼요.”
“전하라면 ‘필요한 만큼 영양은 섭취하고 있다’ 정도로 답하실 것 같지만요.”
가이의 흉내에 엘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냥 제 욕심이겠죠…….”
“이나드 영애는 정말 전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시군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급사가 다가와서 한 차례 대화가 끊겼다. 전채에 이어 메인 접시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음식도 메인이니 저도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급사를 물린 후 가이가 몸을 곧게 폈다.
“오늘 이렇게 나온 이유는 전하를 놀리려 한 것도 있지만 이나드 영애와 단둘이 이야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바빠서 둘이서만 있을 시간을 내기 어려웠으니까요.”
“네에…….”
“이나드 영애는 라이샤로서 전하를 보필하고 있지요.”
“네.”
“그 이유는 그저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까? 더 큰 목적은 없나요?”
엘피는 버섯을 썰던 손을 멈칫했다.
“이나드 영애. 저는 사람이 그저 무욕하게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당신이 라이샤라는 건 신뢰해도, 아무 목적 없이 전하를 돕는다는 건 신뢰할 수 없어요.”
“…….”
“어떻습니까?”
가이는 구워진 버섯 위에 씨겨자를 올려 한입에 삼킨 후, 레드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 동작과 분위기는 오후의 햇살에 비춘 일상처럼 온화했으나, 그의 목소리가 담고 있는 것은 날카로웠다.
“가족의 복수를…… 왕자님께서 해 주시기로 했어요.”
“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분께서 왕이 되어 헤럴드를 쓰러뜨리기 바라는 것뿐이라면, 이나드 영애가 이토록 사사로운 부분까지 그분을 신경 쓰고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럼 소백작님은 제 목적이 무엇이어야 납득하시겠어요?”
“글쎄요. 쉽게 떠오르는 목적으로는…….”
“…….”
“왕자비 자리를 노려서 궁극적으로 왕비가 되는 거라거나?”
“……네?”
가이는 얼이 빠진 듯한 그녀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역대 라이샤 중에 전례가 있기도 하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한 적도 없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그에 걸맞은 고귀한 분을 반려로 맞이하셔야죠.”
“고귀하다면 작위의 고하 같은 것 말씀이신가요? 교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지, 이나드 영애도 소자작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불가능하진 않은데요.”
“불가능이나 가능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 다시는 꺼내지 마셨으면 합니다.”
엘피는 순수하게 트론을 염려하는 자신의 마음을 오해받은 것 같아 불쾌했다. 그는 가족이었고 동생이었으며 생명의 은인이자 절대적인 주군이었다.
그녀는 그저 트론이 살아서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영애의 주장은 알겠습니다. 다만, 저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제가 이상해 보이시나요.”
가이는 생글생글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계실까요?”
“글쎄요, 이나드 영애의 말을 빌리자면 전하께서는 올곧고 착하고 정의로운 분이시니. 의도를 오해하지는 않겠지만, 영애의 헌신에 뭘 돌려줘야 할지는 고민하실지도요.”
엘피는 쓰게 웃었다. 트론이 얼마 전에 그녀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동시에, 대가 없는 헌신이 오히려 완전한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인가 싶어 허무해졌다.
“……그런가요. 그럼, 백작이나 후작이라도 되고 싶은 거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시려나.”
“…….”
“알겠습니다. 참고할게요.”
***
원래대로라면 바로 호텔로 돌아갔겠지만, 엘피는 자신은 바람을 쐬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라고 가이를 떠밀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으신 거라면 제가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께서 외로워하실 텐데 얼른 옆에 있어 드리세요.”
“……전하라면 저랑 호텔에 단둘이 있느니 평생의 외로움을 택하실 것 같은데요.”
“두 분 사이좋으시잖아요. 부러워요.”
“네?”
“아뇨. 아까 충고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따 뵈어요.”
엘피는 꾸벅 인사하고 바로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가이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려다가 이내 포기하고 뺨을 긁적였다.
“으음, 그냥 살짝 찔러볼 생각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갈 길이 먼 건가.”
확실한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 지나치게 눈부실 정도로 선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트론이 그녀를 상대로 곤혹스러워하는 것도 모를 바는 아니었다.
가이조차도 의도치 않게 그녀를 상처 입힌 것 같아 약간 당황했을 정도였다.
그는 저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감싸고 돌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 실소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었다.
“그것보다 나 혼자 돌아가면 진짜 전하한테 된통 혼날 텐데……. 빨리 돌아와요, 이나드 영애…….”
트론의 기분을 유일하게 달래 줄 수 있는 구세주의 빠른 귀환을 빌 수밖에 없었다.
***
엘피가 가이를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것은 그와 나눈 대화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한 탓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외출한 김에 트론에게 줄 생일 선물을 고를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가이의 도발하는 말투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의심한 이유가 트론을 생각해서 그런 것임을 알기에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앞으로도 계속 마주쳐야 하는 사이에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그녀는 선물 찾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엘피는 큰 상점가를 떠돌다가 소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으로 흘러 들어갔다.
좌판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녀를 부르며 손짓했다.
“거기 아가씨, 이거 봐. 아가씨한테 딱이야.”
보석 장신구를 파는 가게였다. 여성 대상의 물건이라 트론에게 줄 선물로 적합하진 않았지만, 엘피는 그냥 기분 전환 겸 구경하자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보통 귀한 보석은 잘 안 들어오는데, 이건 급은 낮지만 사파이어로 꿰었다 이 말씀이야. 아가씨가 오늘 잘 찾아왔네.”
노인이 내민 푸른색 브로치를 보며 엘피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릴 뻔했다.
아무리 봐도 푸른색 크리스털이었다. 물론 저 정도로 색깔이 예쁜 크리스털은 그럭저럭 값이 나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파이어라고 속이는 것은 양심 없는 행위였다.
눈앞의 사기꾼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으려니, 그가 브로치를 달아보라고 권했다.
“자자, 아가씨 눈 색이랑 비슷해서 맞춘 것 같다니까. 내가 싸게 해 줄게.”
그때, 뒤에서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배, 사기 그만 쳐. 사파이어는 무슨 얼어 죽을 사파이어야. 전당포 같이 갈래?”
“이익, 이 꼬맹이 새끼. 또 장사 망치러 왔냐!”
엘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베레모를 쓴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자신보다는 어려 보였지만 트론보다는 키가 컸다.
허름한 차림으로 보아 평민인 듯했지만, 무척 아름다운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우리 왕자님이 제일 잘생겼지만.’
생각에 빠진 엘피를 향해 소년은 충고하듯 말했다.
“거기 너도 조심해. 하여간 다들 순진해 보이면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니까.”
“고마워.”
사실 엘피도 사기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을 생각해 준 마음은 고마웠다.
뒤에서 장사치가 씨근거렸지만, 금발의 소년은 개의치 않고 엘피의 손을 잡고는 “가자!”라며 끌고 갔다.
엘피는 오늘따라 남들에게 끌려다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며 일단 그를 따라갔다.
***
“다녀왔습니다아. 외로우셨죠, 전하?”
움직이기 편한 남성 의복으로 갈아입은 트론은 씨도 먹히지 않을 가이의 애교에 무대응으로 답을 대신했다.
“히잉, 다들 나한테만 차가우셔.”
“이나드 영애는?”
“잠깐 바람 쐬고 오신답니다. 아마 쇼핑이라도 하시려는 것 아닐까요.”
엘피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트론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식물원에 간다는 건?”
“이나드 영애가 거절해서요. 어차피 전하 점심 챙겨드리고 싶었던 핑계인 거 아시잖아요.”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가 검토해야 할 자료는 이쪽에 따로 빼 두었으니 내가 나갔다 오기 전까지 끝내도록 해.”
“……잠시만요. 전하, 이거 오늘 안에 훑어볼 수 있는 양이 아닌데요?”
“그대의 무능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완벽한 화풀이였다. 가이는 억지로라도 엘피를 따라가야 했나 후회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어디 가세요?”
“웰칸 쪽과 접촉하고 올 생각이다.”
트론을 돕고 있는 주술사 씨족 집단, ‘웰칸 연합’의 이름을 듣자 가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 마법유전 조사 건이요.”
“그래. 후보지 자료를 건네기 위해 내일 직접 만나기로 해서. 오늘은 사전 연락이다.”
“……그래서 저한테 과다한 일거리를 떠넘기신 거군요. 하여간 사람을 너무 심하게 부려 먹으세요.”
“며칠 뒤부터 귀족가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지 않나. 그 전까지 자료 분류를 끝내고 조사를 요청해야 여유롭지.”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요. 하븐에 도착하고 나서 좀 쉬시라고 여유 일정을 둔 건데,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으시네요.”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가 부하들 이상으로 일하는 타입의 상사라는 걸 알기에 가이는 더 불만을 뱉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술사 하면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여쭤 봐도 되나요?”
“쓸데없는 질문만 아니면.”
“주술사는 본인의 생명력을 깎아서 주술을 쓰잖아요. 수명은 안 줄어드나요?”
“사람이 회복할 수 있는 범위의 생명력 한도라면 괜찮다. 그 이상은 문제가 되겠지.”
“……흐음.”
트론은 후드가 달린 재킷을 찾아 걸친 후 그를 돌아보았다.
“걸리는 점이라도 있나?”
“각하의 병이요. 그래서 더욱 치유 주술로 고치기 어려웠던 거구나 싶어서요. 자기 목숨까지 깎아서 남을 고치는 주술사가 있을 리 없잖습니까.”
“보통은 그렇겠지. 변경백 정도의 병이라면, 주술사 본인의 목숨과 맞바꾸는 수준의 생명력이 필요할 거다.”
“납치해서 협박이라도 하면 되려나 싶지만, 각하께서 그런 걸 원하실 리도 없고요. 어찌해야 할지.”
불온한 소리와 온건한 소리가 교대로 나왔다.
“그대가 그나마 인간답게 사는 건 르터바이스 변경백 덕분인 것 같군.”
“이래 봬도 효자랍니다.”
“효자라는 단어에 대한 모독 같은데. 그럼 다녀오지.”
“금방 오시죠?”
“……나간 김에 잠시 조사를 하고 오겠다.”
여기서 눈치 없이 ‘이나드 영애 찾으러 가세요?’ 따위의 말로 매를 벌 생각은 없었으므로 가이는 생글생글 웃었다.
“천천히 다녀오세요.”
아마도 트론이 바깥에서 엘피를 먼저 찾으면 오늘 저녁은 혼자 먹게 되리라 가이는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