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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22화 (22/132)

22화. 대의와 꽃의 공녀 (2)

마그달리사 공작령으로 떠나기 전날 밤, 엘피는 침대에 앉아 조용히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믿는 신 같은 건 없었지만, 만약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내 준 것이 신이라면, 기도하고 싶었다.

무사히 예상대로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모쪼록 트론이 나아갈 길에 빛만이 가득하길.

자신의 침대에서 서류를 읽던 트론은 물끄러미 엘피를 응시했다.

두 달가량의 시간 동안, 그녀는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가이 같은 업무 처리 능력은 없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서류 정리나 보조 역할을 깔끔하게 해 주었다.

좋게 보자면 노력파지만, 나쁘게 보자면 평범한 소녀였다. ‘라이샤’로서 미래를 읽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가 굳이 중용할 일은 없었을, 그런 인재.

트론의 안에서 그녀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널뛰며 정돈되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튼 그에게 엘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충동적인 기분을 그 결론으로 무마시켰다.

엘피가 기도를 끝내고 조용히 눈을 떴다. 시선이 느껴졌던 것인지 트론 쪽을 돌아보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계시라도 받고 있었나?”

“아뇨……. 그냥, 기도했습니다. 왕자님의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면서요.”

트론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마음을 책할 생각은 없었기에 가볍게 끄덕였다.

“그대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나와 르터바이스 소백작 역시. 별일 없으리라 본다.”

“네. 왕자님을 믿습니다.”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엘피의 그런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트론은 그녀에게 아직 아무런 보수를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제나, 지금에 만족하고 있다는 듯 그녀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 모순을 견딜 수 없었다.

트론은 서류를 덮고 일어났다.

그녀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은 그는 빤히 엘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전하……?”

그렇다면 무언가를 줬을 때, 이 기분은 상쇄되는 것일까.

트론은 충동처럼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잘해 준 그대에게 아무것도 돌려준 것이 없는 것 같다.”

“전하께는 항상 많은 것을 받고 있습니다.”

“전혀 해 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으음, 여장할 때 제가 꾸미게 해 주신 것?”

“…….”

“노, 농담입니다. 아하하. 전하께서는 항상 저에게 다정하시잖아요. 그것만으로 기뻐요.”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보수라고 할 수 없지 않나.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 줬으면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겠다.”

엘피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이 보수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군이 일부러 베풀어 주는 성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잠시 생각을 정돈했다.

실은 회귀 전부터 트론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끝끝내 그에게 묻지는 못했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엘피는 기도하듯 두 손을 깍지 끼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의 생일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을 듣고 트론이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라 놀란 기색이었다.

‘역시 실례일까…….’

그가 자신의 생일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엘피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귀 전에는 묻지 못했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아끼고 다정하게 지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이나드 자작가 이야기도, 왕궁에 관한 이야기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것을 버린 평민 오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이 사상누각이었다는 것을 엘피는 트론의 죽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때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진짜 라이샤가 아닌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본질에서 눈을 돌리며 도망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생각하던 트론이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이런 게 보수가 되는가? 굳이 이런 기회가 아니더라도 질문하면 그만인데.”

“그게, 왕자님께 무례한 질문 아닌가 싶어서요.”

“무례라기보다는…….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울 것 같군. 나도 내 생일을 정확히 모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트론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대는 아마 내 어머니가 주술사라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어머니를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네.”

“스레데니옴 왕실에서는 어머니가 주술사라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

천재 주술사였던 트론의 어머니는 가장 은밀하고 영예로운 자리인 왕실 직속 주술사로 추천받아 셀딕 왕과 대면하게 되었다.

비극은 그녀가 뛰어난 미녀였던 점에서 비롯되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트론의 어머니이니만큼 수려한 외견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 셀딕은 박색이었던 자신의 비에게 흥미를 잃고 있었다. 물론 보위에 오르기 전에 난봉꾼이었던 기질도 한몫했을 것이다.

일개 평민인 주술사가 왕의 수청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 후의 과정은 상상하는 것과 같았다.

여기서 국왕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거나 하는 로맨스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저 그 하룻밤으로 끝났을 터였다. 그녀가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스레데니옴 왕실은 혼외자를 인정하고 계승권을 박탈하지는 않으나, 첩실을 둔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트론은 정비의 아들이 되었고, 트론을 낳은 친모는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트론이 왕의 혼외자라는 사실은 알려졌으나 그의 친모는 비공식적인 정부조차 되지 못한 채 철저하게 존재가 묻혔다.

“기록상의 생일은 존재하겠지만, 딱히 왕궁에서 챙긴 기억은 없구나.”

“…….”

첫째인 말러의 생일 때마다 파티를 열어 크게 축하했다는 사실을 엘피는 풍문으로 알고 있었다.

둘째 세틱스도 아마 비슷하게 챙겼을 것이다. 그러나 트론은 궁에서 없는 사람인 것처럼 차별당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받아 온 상처의 조각조각을 이런 식으로 직시하게 될 때마다 엘피는 분하고 울고 싶었다. 정작 본인은 무심한 얼굴을 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답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다른 부탁을…….”

“정확한 날짜가 아니더라도 대략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을까요?”

엘피는 트론 쪽으로 홱 몸을 들이대며 그렇게 물었다.

“……가을 즈음으로 알고 있는데.”

“벌써 가을이잖아요! 지금 정해요, 왕자님 생일! 그걸 제 보수로 해요!”

엘피는 무의식중에 그의 손을 꽉 붙들었다. 허락 없이 왕족을 먼저 만지면 안 되는 것도 머리에서 날아가 있었다.

“최고 길일로 잡아요! 10월은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까, 11월이 좋을까요?”

그녀의 필사적인 얼굴에 이끌린 것처럼 트론이 입을 열었다.

“……응, 그래.”

“네! 아, 그럼 왕자님. 이건 어때요? 11월 1일이 북부 귀족 교류 파티잖아요. 그날을 왕자님 생일로 삼는 거예요. 초일이라서 길일이기도 하고, 마치 그 파티가 왕자님의 생일 축하연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무언가 엄청난 발견이라도 한 듯 엘피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트론은 엘피가 자신의 생일에 이토록 간절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알았다. 앞으로 내 생일은 11월 1일인 것으로 하지.”

“네!”

트론은 왠지 널뛰기 시작하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질문했다.

“그럼 나도 묻겠는데, 그대의 생일은?”

“어, 저요? 제 생일은 5월 13일입니다. 아직 멀었어요.”

트론은 엘피의 생일을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겨우 이런 것으로 보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만족했다면 됐다.”

“무척 만족했어요!”

엘피는 활짝 웃었다. 세상의 행복을 모두 자신의 품에 안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트론은 자신의 침대로 돌아와 거리가 떨어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삭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 충동이 전혀 불쾌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

그리하여 세 사람은 옥새를 탈환하고 마법유전을 확보한다는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그달리사의 중심 도시 하븐으로 떠나게 되었다.

올페마에서 열차로 4일 정도의 거리를 달려, 계획대로 전야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 하븐에 도착했다.

파티가 시작되기에 앞서 마법유전과 관련된 사전 조사와 정세 파악을 할 예정이었다.

이들이 묵게 된 숙소는 하븐에서 가장 유서 깊은 호텔이었다.

가이는 르터바이스의 이름으로 아예 그 호텔 가장 꼭대기 3층을 통째로 빌렸다.

아래층은 따라온 사용인들이 쓸 수 있게 분배하고, 세 사람이 가장 위층을 쓰게 되었다.

그곳은 층 전체가 하나의 스위트룸이었다.

응접실과 선룸, 테라스에 드레스룸은 물론 커다란 개인실이 5개쯤 딸려 있어 작은 주택 하나보다 큰 규모였다.

“아까 열차에서 간단하게 요기는 했지만 뭐 더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전하?”

“괜찮다. 자료를 검토해야 하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대들은 편한 대로 해.”

헤드 드레스를 벗으며 트론이 응접실의 소파를 점거했다.

엘피는 건강 해치신다고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을 우물쭈물 눌러 참으며 옆에 서 있는 가이를 쳐다봤다. 막무가내인 그라면 억지로라도 트론을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눈동자에 담았다.

그 눈빛을 받은 가이가 끄덕이며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한 동작을 했다.

“이나드 영애. 하븐은 꽃의 도시라는 이명으로 유명하답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식물원도 있지요.”

“저희 가문도 북부 소속이라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이 첫 방문이지만,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어차피 이틀 정도는 큰 일정이 없기도 하니, 지금 구경하러 가는 건 어떨까요?”

“앗, 네. 좋은 생각이네요.”

맞장구를 쳐주자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트론에게 말했다.

“당사자한테 허락도 받았으니 이나드 영애랑 데이트하고 올게요, 왕자님.”

“네? 무슨…….”

엘피가 입을 헤벌리며 당황했지만, 가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피의 손을 쥐어 에스코트했다.

“그렇게 됐으니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저, 저기! 전하도 같이…….”

트론은 서류를 읽느라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여느 때처럼 새카만 눈동자에서는 별다른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으나, 은은하게 응접실 안의 온도는 떨어지고 있었다.

“그대들 편한 대로 하라고 이미 말하지 않았나.”

“에헤헤, 허락 감사합니다. 전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명랑한 가이의 목소리에 엘피는 사색이 되었다.

“왕자님, 저는 곁에 계속 있어도 될…….”

“다녀와.”

절대로 거부하지 말라는 명령권이 발동되었다.

결국, 그녀는 가이의 손에 이끌려 호텔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가이는 레스토랑 테라스석을 전세 내어 두 사람 몫의 런치 코스를 주문했다.

엘피는 바로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트론이 반강제로 퇴거 명령을 내린 이상 반항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이는 마냥 즐거워 보였다.

“역시 우리 주군은 놀려 먹는 재미가 있다니까요.”

“저는 그저 전하께서 식사를 했으면 한 거였는데요. 소백작님은 장난이 과하세요. 왕자님이 섭섭해하실 거예요.”

가이가 올리브유에 빵을 찍다가 눈을 깜빡였다.

“오, 왕자님이 어째서 섭섭해하실 거라 생각하시나요?”

“그야, 하븐에 오자마자 혼자만 남겨져서 마음 상하시지 않았을까요? 빨리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 그쪽이요.”

“그쪽?”

“아닙니다. 두 사람 다 갈 길이 멀구나 생각한 것뿐이에요.”

“갈 길……?”

“혼잣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와인 잔의 내용물을 홀짝이며 가이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빵을 씹었다.

“낮부터 술 괜찮으세요?”

“화이트 와인이야 음료수죠.”

“전에 왕자님께서 르터바이스 소백작은 술이 약하니까 말리라고 하셨어요.”

“그건 오해인데…….”

술 대신 사과 주스를 마시며 엘피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몇 마디 투덜대던 가이가 느슨한 동작으로 턱을 괴었다.

“이왕 바깥에 나온 김에 정말 식물원 가실래요?”

그렇게 제안하는 그의 목소리는 은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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