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21화 (21/132)

21화. 대의와 꽃의 공녀 (1)

르터바이스 본저에 정착한 후, 별다른 문제없이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트론은 가이와 협력하여 공식적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을 짜며 뒤로는 사먼을 통해 헤럴드의 정황을 파악하는 한편 세세한 방해 요소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디데이라고 할 수 있는 북부 귀족 교류 파티가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왔다.

르터바이스 가문 앞으로도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다.

파티의 정확한 날짜는 11월 1일. 10월 31일 전야제를 치른 후 11월 1일 본파티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물론 실제로 방문하는 귀족들은 그 1∼2주 전부터 마그달리사 공작령에 모여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벌일 것이다.

트론 일행 역시 파티 일주일 전에 현지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계획의 최종 점검에 박차를 가했다.

스레데니옴 왕국은 땅덩이를 크게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네 개의 공작가가 영지를 다스렸다.

각 공작가가 광역 자치단체장, 해당 공작가 영지에 속한 후작, 백작, 자작 등이 기초 자치단체장 같은 느낌이라고 엘피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특수 케이스가 바로 르터바이스 변경백이었다.

최북단에 있는 르터바이스 영지는 어느 공작가의 밑에도 속하지 않은 자치령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변경령 백작’이라는 작위에 머물러 있는 점이 그간 그들이 받은 핍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르터바이스의 남쪽에 접해 있는 것이 북부를 다스리는 마그달리사 공작가의 영지였다.

이번 북부 귀족 교류 파티가 바로 그 마그달리사 영지의 중심 도시 하븐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이나드 영애의 예언에 따르면 브요른 남작에게서 옥새를 얻어 낼 기회가 오는 게 전야제라고 하셨죠?”

“네.”

엘피는 소설의 내용을 떠올렸다. 전야제 날, 브요른 남작은 연회장의 테라스에서 실수로 의자 위에 옥새를 흘리게 되고 여주인공이 그것을 줍는다.

그때, 여주인공의 앞에 의문의 미청년이 나타난다.

‘……진짜 라이샤인 남주인공이.’

그는 라이샤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여주인공에게 미래를 쥐고 싶다면 그 옥새를 간직하라고 전한다.

그러고는 6년 뒤에 다시 만나자며 모습을 감춘다.

바로 이 여주인공이 이번 파티의 주최인 마그달리사 공작의 둘째, 루베인 마그달리사였다.

엘피는 원래대로라면 루베인의 손에 들어갈 이 옥새를 얻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왔다.

“옥새를 얻기 위해서 첫 번째로. 파티 홀에서 모두의 이목을 끌어 주세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왕자님께서 루베인 마그달리사 영애를 에스코트하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 이번 파티로 데뷔하는 마그달리사 공작의 따님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파티 주최자인 공작이 귀애하는 딸, 그리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트론 전하가 함께하는 모습은 이목을 끌 수밖에 없겠죠.”

원작에서는 다들 정세 이야기를 하느라 바빠서 루베인의 데뷔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 때문에 지루했던 그녀가 파티장에서 빠져나갔다가 옥새를 얻었던 셈이다.

하지만 트론을 붙여 테라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면, 원작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두 번째로, 브요른 남작이 흘린 옥새를 가져오는 역할은 제가 하겠습니다. 왕자님은 방금 말씀드린 역할이 있고, 소백작님도 르터바이스의 후계자이니 이목을 끌 수밖에 없지요. 제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엘피는 조심스레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옥새를 가져오는 역할 만큼은 꼭 자신이 해야 했다.

만약 트론이나 가이가 옥새를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면 진짜 라이샤인 남주와 대면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남주가 그들에게 가짜 라이샤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엘피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어. 나한테는 왕자님이 최우선이야.’

진짜 라이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빼앗은 자신의 포지션을 지킬 셈이었다.

남주는 제약으로 인해 현재 길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였고, 6년 뒤에나 여주인 루베인 앞에 제대로 나타나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까지 이 자리를 반드시 지켜야 했다. 트론을 왕으로 만들 그날까지는.

‘남주랑 만나면 라이샤니까 가짜인 나를 알아보겠지? 그 사람은 나를 욕하거나 책망할까……?’

여주의 몫인 옥새를 가로채기로 마음먹었던 그 날부터 매일 고민했지만, 아무런 결론은 나지 않았다.

각오도 했고 긴장도 많이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마주칠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압박감이 온몸을 감쌌다.

엘피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을 다른 뜻으로 오해한 것인지, 트론은 평소보다 다정한 톤으로 말했다.

“전후 상황만 안다면, 그 일은 내가 해도 괜찮다. 마그달리사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건 소백작에게 맡겨도 되니까. 내 정체야 옥새를 얻은 후에 밝혀도 그만 아닌가.”

“전하는 본인 얼굴로 은밀 행동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면 무도회가 아니라고요.”

가이가 턱을 괴며 어이없다는 듯이 지적했다.

“괜찮습니다, 왕자님. 물론 떨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잘할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엘피도 그 일을 잘 해내겠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트론은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전야제 당일 전하께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루베인 마그달리사 영애에게 에스코트를 청하시면 된다는 거죠? 하지만 데뷔 파티의 파트너는 보통 미리 정해 놓을 텐데요.”

“제가 본 미래에서는 그녀의 오빠인 마그달리사 소공작이 에스코트했습니다. 가족을 대신해서 에스코트하겠다고 청하는 정도는 무례가 되지 않겠죠.”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부분 있을까요?”

“저는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두 분과 따로 입장하여 움직일까 합니다. 이나드 가문의 이름은 사용할 수 없으니, 적당히 자작이나 남작 가문 정도의 초대장을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어렵지 않답니다. 르터바이스 산하의 믿을 만한 가문으로 고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자, 그럼 다음은…… 고아원 건립과 관련된 의제인가.”

이번 북부 귀족 교류 파티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를 고르자면 물론 헤럴드의 왕위 계승이지만, 그 다음으로 초미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 바로 북부 지역의 고아원 건립 건이었다.

이 안건은 단순히 복지 시설의 추가 문제가 아니라 공작가 사이의 복잡한 알력이 존재했다.

헤럴드의 역모가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 스레데니옴 왕국의 북동쪽 지역에서 대규모 마수 세력이 창궐했다.

문제는 이 지역이 마그달리사 공작령과 처필 공작령의 경계에 해당하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자기 관할이 아니라고 서로 미루던 두 공작의 눈치 싸움으로 인해 대응이 늦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헤럴드의 역모로 인해 중앙 정부가 마비되었으니 뒤처리도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마수 재해는 막대한 사상자와 참혹한 상흔을 남겼다. 부모를 잃은 고아의 수도 셀 수 없었다.

기존의 복지 시설로는 인원 수용이 불가능하여 추가로 고아원을 여럿 건립해야 했다.

북의 마그달리사와 동의 처필은 서로에게 잘못을 떠밀며 잘못한 쪽이 고아원도 짓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고 책임을 미루는 자존심 싸움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헤럴드가 왕좌에 앉을 가능성이 크고, 중앙 정치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눈치를 보며 미루던 안건들도 다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이 지금도 계속 힘들어 한다고 들었어요.”

“네, 보고받은 바로는 꽤 참혹한 편이더군요. 그렇지만 두 공작령에 속한 일이라, 저희 가문에서 말을 보태기도 쉽지 않아서 두고 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엘피는 잠시 트론의 눈치를 살폈다.

트론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이번 파티에서 마그달리사 공작을 만나게 될 테니, 그 건에 대해서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은 무척 도덕적이고 그럴싸했지만, 정치에 있어서 모든 안건은 그저 도구에 불과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이 될 것 같기에 고아원과 관련된 의제를 검토한 것뿐이었다.

‘겨우 그 정도의 계산속인데.’

엘피는 자신의 결정에 무척 감동한 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잠시 그 얼굴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그녀가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은, 그 고아원과 관련해서 제가 알고 있는 미래가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왕자님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들어 주셨으면 해요.”

“어떤 것이지?”

“그 고아원이 지어질 부지 중 하나에서 마법유전이 발견될 것입니다.”

“마법유전이요? 그건 좀 건수가 큰데요?”

먼저 반응하는 가이를 향해 엘피는 끄덕였다.

회귀 전에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살긴 했지만, 신문과 담을 쌓은 것은 아니었기에 중요 사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헤럴드가 왕위에 오른 후 마법유전이 발견된 것이었다.

마법유전이란 마법유를 생산하는 속칭 ‘마법의 샘’이 묻힌 지역을 뜻했다.

사람 머리 크기 정도의 돌이 샘처럼 마법유를 계속 공급하기에 그런 속칭이 붙었다.

마법유는 마법 기관의 원동력이 되는 액체였다. 열차나 각종 기계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천이기도 했다.

다만, 스레데니옴 왕국에는 유전이 없으므로 마법유를 모두 수입에 의존했다.

그 때문에 마법유보다는 마법탄 쪽에 연료를 기대는 실정이었는데, 효율이 마법유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유를 자력 생산할 수 있다는 건 무척 의의가 컸다.

“마그달리사랑 처필 둘 다 고아원 짓기 싫어서 미루더니 이건 무슨 횡재람. 어느 쪽이 짓게 되는지도 보셨나요?”

“마그달리사 공작령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정확히 위치가 어디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돈줄을 놓치는 건 무척 아까운데……. 마그달리사 공작가를 회유하기는 어렵겠죠, 전하?”

“아무래도 그렇지.”

트론이 뒷배로 삼을 만한 가문의 목록에서 마그달리사 공작을 제외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현 마그달리사 공작의 외가 쪽이 헤럴드의 처가와 얽혀 있었다.

마그달리사에서는 헤럴드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선을 긋고 있고, 실제로 캐 봤을 때도 무언가 관계가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트론은 마그달리사를 제외했다.

하지만 엘피가 협력할 가문에서 마그달리사를 제외한 이유는 달랐다.

‘원작 여주인 루베인의 가문이긴 하지만 믿기 어려우니까…….’

원작에서는 폭군인 트론에 의해 루베인의 오빠가 죽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마그달리사 공작도 사망한다.

그 때문에 어린 나이였던 그녀가 정식으로 공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루베인이 공작일 때는 본인의 성향처럼 가문의 움직임도 정의로웠으나, 그녀의 아버지인 칼퍼 마그달리사는 달랐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주가 아닌 마그달리사 가문은 세속적인 집안이었고, 완전히 신용하기는 어려웠다.

옥새를 얻지 못하고 공작위도 받지 못할 루베인은 무대에 오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여주였던 그녀를 억지로 끌어내리는 듯한 양심의 가책이 엘피의 가슴을 찔렀다.

그렇게 트론이나 가이에게는 밝힐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그녀는 꾹꾹 눌러 삼켰다.

“협력을 못 받는 이상, 마그달리사 가문이 그냥 가져가게 두는 건 너무 배 아픈데요. 장기적인 계획을 생각해도 재원 확보는 중요하고요.”

“그 부분 말인데. 고아원 건립 건은 공작령 둘 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었지.”

“네, 그렇죠.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그 전부터 두 공작 사이에 이권 싸움이 얽혀 있으니까요.”

“자, 그럼. 그렇게 지저분한 싸움을 하는 두 공작령 사이에서 내가 르터바이스 변경백을 통해 아이들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으로 고아원을 짓겠다고 나서면?”

“와, 무지하게 재수 없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는 착해 보이겠네요.”

“착해 보이는 게 아니라 저희 왕자님이 원래 착하신 거예요.”

가이는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항의를 무시했다.

엘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트론에게 물었다.

“하지만 고아원을 르터바이스령에 지으면 유전을 놓치는 것 아닌가요?”

“우리나라에는 좋은 제도가 있어서 말이지. 사방 100르티어(약 5km) 이하의 면적이라면 왕실의 승인 없이 영지를 거래할 수 있다. 주로 타인의 영지에 사업체나 별장을 짓기 위해 생긴 법률이지만.”

“아……!”

“유전이 있는데도 그간 몰랐다는 건 그만큼 손을 안 탄 미개척지겠지. 하지만 물자 조달 때문에 고아원을 외딴곳에 짓지는 않을 테니 최소 촌락 단위가 옆에 있는 곳일 거다. 유전이 생기는 지형 조건까지 대조하면, 마그달리사 영지 내에서 후보지를 추리는 건 어렵지 않아.”

트론은 천진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 땅을 알아내서 매입하도록 하지. 본인들이 책임을 미룬 고아원을 짓기 위해 땅을 사고 싶다는데 마그달리사가 거부하기는 어려울 테니.”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 요청을 본파티 같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는 게 좋겠네요. 물론 분위기는 미리 조성해야겠지만요.”

본파티에 모인 귀족들 사이에서 고아원과 관련된 건으로 이기적인 의견이 오가는 와중, 트론이 르터바이스를 통해 고아원에 관련된 일체 사항을 이쪽에서 맡겠다고 선언하는 산뜻한 그림이 그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