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12)
본저에서 변경백의 가족들만 쓰는 안채를 한참 깊숙이 들어간 후 가이가 방의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벽에 걸려 있는 방패와 검, 박제한 마수, 동물의 모피 등이었다.
덕분에 무척 호방한 분위기였지만 은색과 푸른색으로 차분하게 마무리하여 품위는 잃지 않았다.
“각하. 말씀드린 대로 트론 전하와 이나드 영애를 모셔 왔습니다.”
엘피는 안쪽을 보고 조금 놀라고 말았다. 중년 여성이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엔 르터바이스입니다. 병환 때문에 이렇게밖에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전하. 이나드 영애도 미안하오.”
“……개의치 않는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각하.”
“가이즈카. 나를 일으켜 주렴.”
가이는 그녀에게 다가가 등받이에 기대게 해 주었다. 연보라색을 머금은 은발과 어딘지 날카로운 눈매가 가이와 똑 닮아 있었다.
그러나 눈에 주름이 잡히게 웃자, 온화한 인상이 퍼졌다.
트론과 엘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 그녀가 덕담을 했다.
“미남미녀가 이렇게 와 주시니 방 안이 다 환해지는 것 같군요.”
“제 말이 맞죠, 각하? 어서 칭찬해 주세요.”
“그래, 저런 미남미녀를 친구로 낚아 오다니 근래 한 일 중 가장 잘했구나, 아들아.”
엘피는 저도 모르게 트론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얼굴을 밝히는 성향은 르터바이스 가문의 집안 내력인 듯했다.
***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병환이 있는 줄은 몰랐군.”
르터바이스 가문이 대대로 그런 이미지이기도 하고, 밀리엔 역시 타고난 무인으로 유명했다. 오히려 문인에 가까운 가이가 이 가문에서는 특이 케이스였다.
그런 밀리엔이 병 때문에 쇠약한 것은 확실히 공표할 만한 소식이 아닐 것이라 엘피는 추측했다.
“부끄러운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르터바이스 된 자가, 이리 허약해서는 안 될 터인데.”
“그대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소문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병마가 피해 가지는 않을 터. 자신을 책망할 것 없다.”
“분에 넘치는 따스한 말씀, 영광입니다.”
인자하게 웃던 밀리엔은 그에게 가까이 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트론이 조용히 다가가자 그녀는 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몸이 이런 상황이라 거동이 여의치 않습니다. 못난 아들에게 대부분을 맡기고 있으나, 저 아이도 부족한 점이 많지요. 많이 꾸짖어 주십시오.”
“내가 부족하여 오히려 도움을 받을 것 같다.”
“윗사람은 겸손이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랍니다.”
밀리엔은 다음으로 엘피도 가까이 불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을 쓰다듬었다.
“전하를 지키고 이곳까지 모셔와 주어서 고맙소, 영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 낮추셔도 괜찮아요.”
“전하의 가신에게 예를 갖춰야지요. 이나드 영애는 가장 처음 전하께 헌신한 공신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자신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엘피는 얼굴을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밀리엔은 다시 트론을 향했다.
“가이즈카에게, 전하께서 <웬필리와 러트니> 고사의 뒷면을 어느 정도 추론하셨다 들었습니다.”
“근거는 별로 없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추론하신 것이 거의 맞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아마 더 깊은 진실도 짐작하고 계신 것 아닌가요.”
트론은 가이를 일별했다. 그는 여전히 옅게 웃고 있을 뿐, 생각이 읽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정말 상상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웬필리 르터바이스는 계승권이 낮은 셋째 왕자 러트니를 왕으로 삼고 싶었던 것 아닌가?”
밀리엔은 웃음을 흘렸다. 엘피는 트론이 정답을 말한 것이리라 짐작했다.
“당시 왕실에서 기록을 많이 없애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겠습니다만. 당시 왕세자가 먼저 죽인 것은 둘째 왕자였습니다.”
동화에서는 제대로 언급이 안 되는 사실이었다.
“웬필리는 그래서 자신의 친구였던 러트니에게 권합니다. 이대로는 너도 죽을 것이라고. 너희 형은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자라고. 나는 너를 왕으로 옹립하고 싶다고.”
“그랬군. 하지만 동화처럼 셋째 왕자는 살해당하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 뒤는 전하께서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 왕세자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르터바이스를 증오했으나, 나라가 파탄 날 정도의 내전을 감당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대신 기록을 조작해 놓지요. 그 기록이 웃기지도 않는 동화의 형태가 된 결과물이 <웬필리와 러트니>입니다.”
“내 짐작으로는, 동화의 형태로 만들어 퍼뜨린 것도 왕실이라고 본다.”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동화 자체에는 죄가 없지만요. 얄궂은 일입니다.”
이야기를 오래 해서인지 조금 피곤한 얼굴로 밀리엔이 비틀거렸다.
가이는 조심스레 자신의 어머니를 침대에 눕혔다.
짧게 사죄의 말을 입에 담은 밀리엔이 다시 팔을 뻗어 트론의 손등을 쥐었다.
“왕자님…… 그러니 바라건대, 르터바이스가 지켜야 할 벗을 다시 잃게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켜야 할 벗을 잃었으매, 호랑이는 그리운 만년설로 돌아가리. 방패와 칼을 지니고.」
그 시에 담긴 회한은 단지 표면적인 문자 그대로의 무게는 아닐 것이다.
그때부터 만년설 호랑이는 감정과 시간을 켜켜이 쌓아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라는 돌연변이를 낳았고, 트론 스레데니옴과 마주하여 어떤 결과물을 이룩하려 하고 있다.
그곳에 대단한 정의도 이상도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당연한 일이다. 르터바이스의 신의와 충정을 역사가…….”
트론은 고개를 저은 후 말을 고쳤다.
“아니, 내가 증명할 것이다.”
***
세 사람은 밀리엔의 침실을 뒤로하고 서재로 돌아왔다.
“소백작님께서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지 않으시는 건 이유가 있나요?”
“아직은 각하의 영향력이 크니까요. 각하가 아프시다는 게 공표되고 어리고 만만한 제가 변경백이 되면 다들 뜯어먹고 싶어서 난리일 거라. 굳이 영지 밖까지 안 가도, 안에서도 말이죠.”
엘피는 작게 끄덕였다. 왕실에서 계속 권한을 축소하고 핍박해 왔다고는 하나, 르터바이스는 거의 후작 이상으로 취급되는 가문이고 실제 영지 내 하위 귀족 숫자도 그렇다.
거의 나라 하나에 해당하는 규모를 제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슬슬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전하의 숙부께서 이렇게 한 건 터뜨려 주신 덕에 물 건너갔네요.”
<금빛 날개와 은빛 검>의 본무대가 되는 6년 후, 가이즈카 르터바이스는 ‘변경백’이었다. 이미 밀리엔 르터바이스가 물러난 후라는 의미다.
‘자세하게 언급된 적은 없지만, 어쩌면…….’
그때는 이미 그의 어머니인 밀리엔이 세상을 떠난 후일까. 그래서 소설에서 묘사된 가이즈카 르터바이스가 유쾌하고 실없어 보이는 지금의 인상과 전혀 다르게 냉철하고 진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각하의 병환은 차도가 있으신가요?”
“병이 좀 복합적이라서요. 주술이나 마법으로 양쪽 다 처치가 필요합니다만, 지금으로선 현상 유지 정도가 답니다.”
엘피가 어렴풋하게 가진 상식으로는 치유 마법 쪽은 외과적 처치, 치유 주술 쪽은 내과적 처치와 비슷한 작용을 한다고 들었다.
전생의 기억으로도 내과와 외과를 총망라하는 병은 까다로웠으니,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아버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치유 마법을 연구하고 계시지만요. 그러다 아버님까지 쓰러지지 않을까 요즘 걱정이에요.”
“그렇군요. 저도 각하께서 쾌차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건넨 후, 가이는 트론을 돌아보았다.
“전하께도, 감사합니다. 아마 각하도 많은 위로가 되셨을 거예요.”
“말뿐인 위로니, 허상에 불과하지만. 실체를 쥐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게요.”
가이는 우유를 따라서 엘피와 트론 앞에 내려놓았다.
원래대로라면 주인 노릇을 할 그가 하녀복을 입고 있는 객들을 대접하는 모습이 다소 아이러니했다.
“자, 그럼 저녁 후딱 먹고 일해 보실까요? 마그달리사 공작령에 방문하기까지 앞으로 2개월, 저희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죠. 예산, 인력, 기타 세부 내역까지 저희 영지 상황도 파악해 놓으셔야 하구요.”
“자료는 준비해 뒀겠지?”
“물론이죠.”
그날 밤, 워커홀릭 주종의 기세에 질린 엘피가 그만 자라고 억지로 떠밀 때까지 논의는 계속되었다.
***
늦게까지 깨어 있으면 건강을 해친다고 트론의 등을 떠밀었던 주제에, 정작 엘피 본인은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로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실감과 환희, 그 반면에 앞으로 다가올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나 과거에 대한 회한이 번갈아 머리를 지배하여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엘피는 불을 켜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주변을 보여 주어서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트론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역시 피곤했던 것인지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트론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숨소리를 듣고 엘피는 안심했다. 회귀하고 난 후, 불현듯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트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고 다시 잠들곤 했다.
‘저,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왕자님.’
엘피는 그렇게 다짐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거짓 예언자지만,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짜내어 결코 그가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들겠다는 각오였다.
침대로 돌아가려던 엘피는 그의 가슴 밑까지 내려간 이불이 신경 쓰였다. 감기에 걸리겠다고 생각하며 엘피는 이불을 고쳐 덮어 주려 했다.
그러나 엘피의 손이 그의 몸에 닿은 순간, 갑자기 뻗어 나온 팔이 그녀의 목을 쥐었다.
눈 깜짝할 새에 자리에서 일어난 트론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을 엘피가 깨달은 것은 한 박자 늦은 타이밍이었다.
“누구냐.”
가라앉아 있는 트론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살기등등했다.
목이 눌린 엘피는 캑캑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트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어둠에서 시야를 확보한 트론이 작게 중얼거렸다.
“……엘피 이나드?”
그와 동시에 목을 조르던 손의 힘이 풀렸다.
엘피는 심하게 기침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이런 밤에……?”
숨을 진정시킨 엘피가 눈물을 닦아 내며 그의 질문에 겨우 대답했다.
“죄, 죄송해요. 추우실 것 같아서 이불 제대로 덮어 드리려고…….”
트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야습에 대비하려는 본능 때문에 저절로 몸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는 밤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는 습관이 있었다. 그 피로가 누적되어 아침에 더 맥을 못 추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왕자궁도 아닌데.’
침대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트론은 그녀의 목을 안았다. 그리고 공중에 연초록색 문양을 그렸다.
갑자기 그에게 안겨 당황하던 엘피가 그대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목이 눌린 자국을 주술로 치유해 준 다음, 트론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자신의 본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도록 기억도 지웠다. 어렴풋이 남는다 해도 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는 경계를 좀 풀까.’
그렇게 생각하던 트론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아직 엘피의 진정한 목적도 모르고 완전히 신뢰할 수도 없으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무해하다는 점만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용할 도구에게 내리기에는 과한 평가였다.
창밖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르터바이스 만년설 봉우리가 엘피의 윤곽을 비추었다.
트론은 소리 없이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뒤를 돌았다.
힘과 도구를 얻었어도, 신의와 충정이 어울리는 양 연기해도, 자신은 새카만 그늘에 묻혀 홀로 살아갈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며 트론은 눈을 감았다.
다시, 어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