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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9화 (19/132)

19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11)

트론은 사먼에게 보고를 받고 밀린 지시를 내렸다. 남은 시간에 몇 가지 조사 안건을 처리한 후, 레스토랑으로 돌아와 엘피와 함께 르터바이스 본저로 향했다.

왕궁 쪽은 다행히 크게 변칙적인 움직임은 없는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그쪽도 뒷수습 때문에 여력이 없고, 헤럴드는 예상대로 충동적이었다.

트론의 계획에 지장은 없을 듯했다.

“아까 르터바이스 소백작님이 주신 설정을 따르자는 건 아니지만, 역시 로나는 과묵하고 낯을 가리는 설정으로 가는 게 좋겠어. 남들하고 대화할 일이 적을수록 의심 살 일이 적을 테니까.”

본저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며 엘피가 트론에게 권했다.

“나는 별로 상관없지만, 엘…… 의 말도 맞으니까 그럴게.”

역시 아직 ‘언니’라는 호칭에는 저항감이 있는 것인지 트론이 이름 뒤의 발음을 길게 늘였다.

엘피는 딱히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으며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며칠 전에 보았던 웅대한 르터바이스 본저 입구에 다다랐다. 엘피는 트론의 손을 잡고 위병에게 가까이 갔다.

“안녕하세요, 나으리.”

최대한 건방져 보이지 않도록, 튀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녀는 귀족으로서의 자신을 최대한 죽여서 인사했다.

회귀 전의 도피 생활 때 이미 몸에 밴 습관이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오늘 저택에 들어오기로 했다던 사용인인가?”

“네, 맞아요.”

가방에서 소개장을 꺼내 건네자 위병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질문했다.

“그런데 너, 며칠 전에 이 근처에 돌아다니던 아이 아닌가?”

엘피는 살짝 긴장하여 트론의 손을 꽉 잡았다.

“소개를 받아서 들어올 저택을 구경했어요. 신기해서…….”

“하하, 우리 저택이 워낙 멋지긴 하지. 이해한다. 소가주님이 이야기를 듣고 따라가셨는데, 그때 만났고?”

“네,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소개장 여기 돌려주마. 네 이름이 엘이라고? 얼굴만큼 예쁜 이름이구나.”

칭찬이긴 하지만 그다지 기쁘지 않아서 엘피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런 와중, 대답하기 가장 곤란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함께 있던 남자애가 안 보이는구나. 걔는 동생 아니니?”

손까지 붙잡고 함께 다니던 남자애만 오늘 떼어 놓고 온 게 부자연스럽긴 했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서 트론이 불쑥 대신 대답했다.

“언니 약혼자인데요.”

엘피는 기침을 뱉을 뻔했다. 위병도 입을 벌리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니…… 아직 어린데?”

“요즘 세상이 험하잖아요. 저희 언니가 워낙 예쁘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셨던 거죠.”

트론이 히믈 소자작을 처리할 때 언급했던 국법 덕에, 실제로 평민들 사이에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계약 약혼을 시키는 사례가 가끔 있었다.

머리로는 그걸 알지만, 어제부터 갑자기 약혼 운운하는 소리를 연속해서 들으니 엘피는 심장이 뛰었다.

“그건 그렇고 안 들여보내 주시나요? 지각하면 저희가 혼날 것 같아서요…….”

“아, 알았다. 미안하다.”

위병이 바로 사용인들이 출입하는 뒷문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약혼자가 있다는 말을 의식해서인지, 실수로라도 그녀에게 닿지 않으려고 몸을 빼는 기색이었다.

뒷문을 통해 그들은 저택 별관으로 들어갔다. 사용인들의 숙소 및 창고, 작업실 등, 실무를 위한 시설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안내받은 대로 1층에 있는 집무실에 앉아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주홍빛 머리를 반쯤 백발로 물들인 온화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각이 잡혀 주름 하나 없는 어두운 색상의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반갑구나. 나는 르터바이스 저택의 가사 총괄인 테레자 뷔프켄이라고 한단다. 너희는 나를 뷔프켄 부인이라고 부르면 된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엘이라고 합니다.”

“엘의 동생인 로나입니다.”

엘피는 최대한 서투른 동작으로 가방에서 소개장을 꺼내 들어 뷔프켄 부인에게 건넸다.

“그래, 친척 소개로 지내던 상인의 집안이 수도로 이전하게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된 거라지.”

뷔프켄 부인의 말대로 이 두 명의 설정은, 부모를 여읜 후 친척의 소개로 어린 나이에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르터바이스 영지 내에 있는 상단을 운영하는 준귀족의 사용인이었다고 이력을 속였다.

그런데 그 상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수도로 지점과 저택을 이전하게 되었으며, 거기까지 따라가기는 어려웠던 자매가 연고지에 가까운 올페마에서 일을 찾게 되었다…… 는 설정이었다.

“소개장을 보니 둘 다 원래 지내던 집안에서도 계속 일하기를 바랄 정도로 평가가 좋았던 것 같구나. 따라가지 않은 이유가 있니?”

“부모님 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있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왕께서 돌아가시고 수도가 뒤숭숭한 모양이라 무서워서요.”

그 말 자체는 거짓이지만, 부모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엘피는 약간 우울해졌다. 그 얼굴을 보던 트론이 살짝 엘피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래. 기특한 마음이구나. 너희가 모시게 될 소가주님은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도 친절하시고 거리낌이 없는 분이니 지내기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너희 처지를 듣고 딱하게 여기시며 이것저것 당부하셨다.”

“부, 분에 넘치는 말씀 고맙습니다.”

가이가 무슨 말을 해 놨을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동생이 어리니 신경 쓰이는 일이 많겠지. 숙소는 둘이서만 같이 사용하게 해 줄 터이니, 자매끼리 서로 의지하며 지내도록 하렴.”

“하나하나 마음 써 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요…….”

“괜찮아. 점심은 아직이지? 몇 가지만 처리하고 식사부터 하자. 그 후에 숙소로 안내해 주마.”

뷔프켄 부인은 저택 생활을 하며 유의할 점에 관하여 간단하게 교육하고, 몸에 맞는 하녀복을 찾아주기 위해 치수를 쟀다.

다행히 옷을 벗고 재지는 않아서 문제는 없었다.

그 외 서류 처리나 자질구레한 절차를 마치고 두 사람은 사용인들을 위해 마련된 식당에서 남들보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쳤다.

그 후 뷔프켄 부인은 엘피와 트론을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잡일은 더 아랫사람에게 맡기면 그만일 텐데, 일부러 그들을 안내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자상했다.

“자, 이곳이 너희 자매가 지낼 방이란다.”

그간 지내던 싸구려 숙소들을 생각하면 무척 좋은 방이었다.

침대 두 개 외에도 옷장이나 테이블,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소파까지 딸려 있었다. 넓은 창밖으로는 르터바이스 본저의 잘 다듬어진 정원이 보였다.

“이, 이렇게 과분한 방을 받아도 될까요?”

엘피의 그 말은 제법 진심이었다. 회귀 전 가난뱅이 생활이 길다 보니, 이 정도면 자신들의 대외적 신분 수준에서 얼마나 배려받은 방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변경백 각하와 소가주님은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도 항상 신경 써 주신단다. 부담 갖지 말고 편히 지내도록.”

“……네!”

“감사합니다, 부인.”

“너희 치수에 맞는 옷은 옷장 안에 넣어 두었으니 착용하면 된다. 그럼, 이따 소가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쉬고 있으렴.”

사무적이지만 차갑지는 않은 미소를 지은 후 뷔프켄 부인은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엘피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역시 전하의 여장은 완벽하네요. 아무도 의심 안 했어요!”

“기뻐할 일인가?”

“기뻐할 일이죠!”

엘피는 구김살 없이 활짝 웃었다. 트론은 창문에 가까운 침대에 걸터앉고 헤드 드레스를 풀었다.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는 검은 머리칼 아래 소년다운 고집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잠시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바라보던 엘피가 뺨을 탁탁 쳤다.

“옷 갈아입으시죠, 전하!”

“지나치게 들떠 보이는데.”

“그야 왕자님께서 에이프런 드레스를 입으면 얼마나 귀여울지, 아차.”

“……그대의 의욕이 충만해 보여서 다행이군.”

여장에 대해서 완전히 체념한 듯한 트론이었다.

***

두 사람이 가이를 다시 만나게 된 건 해가 서서히 지고 있는 느지막한 오후였다.

안내를 받아 서재에 들어가 보니 가이는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그는 엘피와 트론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요, 엘. 로나.”

주변에 사람을 물린 후 가이는 트론을 상석에 앉히고 엘피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뭔가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아니요, 너무 친절하시고 일부러 신경 써서 대접해 주시는 것이 느껴졌어요. 이력을 속이게 되어 죄송했지만요.”

“그건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부인도 이해해 줄 거라 봅니다. 왕자님도 괜찮으셨고요?”

“사용인들이 지나치게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위기만 빼면.”

그 말을 들은 가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 그래서 ‘엘’에게 원래 없던 약혼자 설정을 추가하신 거예요?”

“…….”

“아니면 두 분 저 모르는 사이에 약혼하셨나요? 축하드려요.”

“아, 아니에요!”

엘피가 새빨개진 얼굴로 힘을 주어 답했다.

“현관을 지키는 위병이 저랑 전하가 저택 근처에 온 걸 기억하고 있어서……. 그 남자애는 누구냐고 묻는 걸 왕자님이 무마하시느라 그런 거예요.”

“그걸 무마할 방법이 약혼자 선언뿐이었어요? 저런.”

하녀복을 입은 트론이 노려보고 있는 것을 일부러 무시하며 가이는 명랑하게 엘피 쪽을 향해 물었다.

“아예 제 애인이라는 설정으로 할 걸 그랬네요, 그쵸? 아무도 이나드 영애에게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요. 애인을 집에 사용인으로 들인 직권남용 망나니 귀족 아들 같은 것도 재밌고.”

“그게, 제가 아직 어려서요.”

“저도 아직 어린데요! 이나드 영애보다 네 살밖에 안 많은데요!”

“네에……. 나중에 맞이할 훌륭한 약혼녀를 생각해서 그러진 마시고요.”

“당분간은 약혼 생각도 결혼 생각도 없으니까 괜찮답니다.”

“제가 안 괜찮아서요.”

엘피가 몸을 뒤로 빼며 거북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가이가 양손을 들었다.

“아, 전하를 더 놀리면 폭발할 것 같으니까 이쯤 할게요.”

“……저를 놀리신 거잖아요?”

가이는 해명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트론은 무표정했으나 그 주변만 온도가 떨어져 분위기가 흉흉했다.

“……변경백과 만나게 해 주는 것 아니었나.”

“넵, 물론이죠. 따라오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가이가 정중하게 트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트론은 그 손을 잡지 않고 알아서 일어난 후 엘피의 손을 잡고 가이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더 놀리면 이번에야말로 불벼락이 떨어지리라 생각한 가이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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