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8화 (18/132)

18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10)

간밤에 그들 사이에서 모종의 대화가 오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피는 눈을 홉떴다.

“이나드 영애가 전하의 시녀였고, 그 연유로 같이 도망쳤다는 사실까지는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일개 시녀로 생각하신다면, 주요 기밀에 가까운 사안을 함께 논의하시는 건 이상하지요.”

가이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녀가 전략·전술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면 참모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겠으나, 엘피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애매한 위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녀는 트론을 돌아보았다. 트론은 차가운 눈빛으로 가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를 배제하고 싶다는 의미인가?”

“전하의 의향이 그렇지 않다면 전혀 그런 주장을 펼칠 생각은 없답니다. 다만, 함께할 동지로서 저도 이나드 영애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엘피는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녀의 정체를 말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오로지 트론에게 달려 있었다.

‘……실은 그 정체조차 눈속임이지만.’

그녀는 속으로 자조했다. 잠깐의 정적 후 트론이 입을 뗐다.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이나드 영애.”

“알겠습니다, 전하.”

엘피는 가이를 향한 후 또렷하게 선언했다.

“실은, 저는 라이샤입니다.”

“…….”

가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였는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보였다.

“천하의 그대도 놀랄 일이 있긴 있군.”

“아니, 그게, 그렇지만…….”

팔짱을 끼고 한참을 끙끙거리던 가이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술이 덜 깬 걸까요?”

“멀쩡해 보이세요.”

“그럼 정말 라이샤라고 하신 게 맞는 거죠……?”

“그렇습니다.”

엘피는 새삼 ‘라이샤’라는 정체가 얼마나 믿기 어려운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원작을 읽은 전생의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라이샤라고 주장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사람을 놀리나 의심했을 것이다.

“전하께서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틀림없겠네요. 하지만 정말 놀랍습니다. 전 라이샤는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엘피는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인가요……?”

“적어도 근 300년 안에 나온 라이샤 두 명은 확실히 사기꾼이라고 봐요. 그렇죠, 전하?”

“그 두 사람 다 왕비였던 걸 생각하면, 내가 대답할 말이 없지 않나?”

거슬러 올라가자면 선조일 테니 대놓고 언급하기 곤란하다는 의미였다.

“바로 그 부분 말입니다. 둘 다 왕하고 결혼하는 결말이었던 걸 보면 솔직히 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요. 비로 맞이하기 위한 신분 세탁이라고 확신했는데.”

“하긴, 두 분 중 하나는 평민이었고 다른 분은 남작의 딸이었던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으음, 왕자님께서 믿으시는 이상, 저도 라이샤인 이나드 영애를 신뢰하겠습니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요. 설마 ‘진짜’ 라이샤를 이렇게 뵙게 될 줄이야.”

엘피는 눈을 내리떴다. ‘진짜’라는 수식어는 그녀에게 버거웠다.

“계시를 받는다는 게 정말인가요?”

“……정확히 무언가의 목소리를 듣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게 생각해 주셔도 무방합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모쪼록 전하께서 나아가실 길에 빛을 내려주시길.”

“모든 미래를 아는 것은 아니고 부족한 몸입니다만, 전하께서 성군이 되실 때까지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트론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엘피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네. 이나드 영애가 모쪼록 헌신한 만큼 보답받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 말의 뉘앙스를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트론이 성군이 되기를 바란다는 소리겠거니 생각하며 엘피는 가볍게 넘겼다.

어젯밤의 대화를 상기한 트론이 무언의 압박을 담아 가이를 바라보았으나, 가이는 그 시선을 모르는 척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벌써 8시가 넘었군요. 저는 할 일이 있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따 오후에 뵙죠. 이 방은 편하신 대로 계속 쓰셔도 됩니다.”

“알겠다.”

“아침 식사 맛있었어요. 대접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푸른 포털을 그려 내며 가이는 금세 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마법의 흔적을 바라보던 엘피는 서류를 펼쳤다.

“저는 설정 적힌 것 외우고 있어야겠어요.”

“그럼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 르터바이스 본저에 갈 시간 전에는 돌아오지.”

트론은 모자를 집어 다시 썼다.

“앗, 전하.”

“왜 그러지.”

“또 뭔가 조사 같은 거 하려고 나가시는 거죠? 어제 수상 시장 때처럼.”

그녀의 말대로였으므로 트론은 잠시 멈칫했다.

“라이샤로서 읽은 것인가?”

“후후, 이런 사소한 것까지 읽지는 못해요.”

멋쩍은 기분에 엘피는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짧은 갈색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저어, 건방진 말씀 드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생각 없이 쉬실 때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사람이 계속 팽팽하게 신경 줄을 당기고 있으면, 지치니까요.”

“…….”

지나치게 낙관적인 말이라고 트론은 생각했다.

그의 삶은 치열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는 궁리를 했다.

느슨하게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조차 의도이며, 모든 행동에는 결과물이 요구되었다.

“수면은 충분히,”

“……취하고 있다고 전하는 말씀하시지만요. 그냥, 고려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붙잡아서 죄송했습니다.”

엘피는 다시 서류로 눈길을 떨구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트론은 소리 없이 일어났다.

“다녀오겠다.”

“네. 건방진 말씀, 다시 사죄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여 그 사과를 받은 후 트론은 레스토랑 개별실을 나섰다.

그녀가 던지는 말은 종종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흥미롭기도 했으나 때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외부 요소가 휘젓는 그 느낌을 가장 혐오하는데도, 딱히 그녀를 불쾌하게 느끼지 않는 것이 가장 혼란스러운 점이었다.

***

수도 데니옴의 왕궁은 고요했다. 사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용인들은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정적을 깨듯이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회랑을 울렸다. 청소하던 하녀들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그 근처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연속하여 또 무언가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왕의 집무실에서 울리고 있다. 그쪽을 향해 걸어가던 초록색 머리의 중년 여성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부채를 부치며 그녀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이윽고 표정을 가다듬고 사뿐거리는 걸음걸이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카펫을 붉게 물들이는 시체들이었다.

그녀는 장식물을 보는 듯 흥미 없는 눈길을 그쪽에 잠시 던졌다가, 물건을 깨부수고 있던 장본인을 향했다.

“헤럴드 전하. 고정하시지요.”

회색 머리의 중년 남성, 헤럴드 스레데니옴이 고개를 들었다.

“라블미 백작인가.”

“그렇잖아도 반대파 것들이 자격 없이 왕궁을 점거하지 말라고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더 이상 여론을 악화하지 마십시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책상 위에 있던 문진을 라블미에게 던졌다. 문진은 그녀의 귀 옆을 스쳐 뒤에 있던 유리 장식을 깨뜨렸다.

그녀는 미동하지 않으며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 냈다.

“무엇이 그리 초조하신지요? 조금만 참으시면, 왕좌가 전하의 것입니다.”

“빌어먹을 셀딕 새끼는 이미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바로 왕좌에 앉을 수 없는가!”

“전하의 안정된 치세를 위해서라도 절차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나누지 않았습니까.”

“왜 옥새가 없어서, 내가…….”

라블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남성을 속으로 조소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왕제’라는 위치 때문에 평생 열등감에 시달리는 모습은 무척 추했다.

스레데니옴 왕국은 왕이 되지 못한 왕자나 왕녀에게 작위를 주지 않는다.

먼 과거에는 작위와 영지가 주어졌으나 왕실 특유의 혈육 상쟁이 반복되며 권력을 쥐여 주지 않는 방향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왕제나 왕매의 결말은 암살, 유폐, 혹은 떨거지 귀족 집안에 팔려 가듯 혼인하는 것뿐이었다.

헤럴드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세가 기운 지방 후작의 부군이 되어 ‘병풍’이니 ‘종마’ 따위로 뒤에서 비웃음을 받았다.

부르는 호칭만은 왕제 ‘전하’로 그럴싸하게 높았으나, 중앙 정치에 일절 관여할 수 없고 자신의 영지 한 뙈기조차 얻을 수 없는 처지는 하위 귀족보다 못했다.

가장 높고 화려한 곳에 가까이 있다가 전락하는 기분은 비참했으리라.

헤럴드는 그 감정을 복수심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세력을 모아 올라왔다. 운이 좋은 편이기도 했으나, 아무튼 첫 시작은 그의 집념이었다.

라블미 백작은 헤럴드의 집념을 높게 사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보이는 이 인내심 부족한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참았던 것이 역으로 폭발한 것인가.’

그러나 그의 심경을 헤아려 본다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시체를 처리해야 했으며, 화풀이로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시종들을 달래서 청소를 지시해야 했다.

“새로 일할 아이를 구하는 것도 어려우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정도껏 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사용인들의 입을 막고 있기는 하나, 쉬쉬하며 도는 소문까지 모두 막기는 어렵습니다.”

“왕이 될 나에게 감히 설교하는 것이냐.”

“다 전하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왕자궁에서 일하던 연놈들이다. 옥새를 들고 도망간 것은 세 조카들 중 한 명일 것 아니냐. 알고 있는 것이 없는지 확인한 것뿐이야. 그 새끼들 행방은 아직도 못 찾았나?”

“송구합니다.”

다른 귀족 집안에 몸을 의탁했을 것이라 보고 그녀도 탐색대를 보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것 말고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반대파와 중립파 귀족 진영은 헤럴드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압박을 넣고 있고, 그에 휩쓸린 관료들도 일부 파업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정작 왕이 될 주군은 이 꼴로 일을 늘려 주고 있다. 일손 부족이 심각했다.

“전하의 왕위 계승을 위한 법리 검토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존의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민의를 퍼뜨려 여론도 형성하고 있고요. 앞으로 두 달만 기다려 주십시오. 북부 귀족 교류 파티가 끝날 때쯤에는 반대파들도 더 버티지 못할 겁니다.”

“…….”

“그럼 오후 회의에는 꼭 참석해 주시리라 믿으며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깊게 절하고 라블미 백작은 집무실을 나갔다. 하녀장에게 1시간쯤 후에 집무실을 치우도록 지시를 내렸다.

‘세 왕자들은 다 멍청했어. 불안 요소 따위는 없다…….’

왕실 교육 총책임자였던 그녀는 왕자들을 알고 있었다.

첫째인 말러는 순수한 머저리였으며, 둘째인 세틱스는 욕심만 많고 능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셋째인 트론은…… 소심하고 눈치를 보며 아둔했지.’

천출인 그는 언제나 주눅 들어 보였고 그녀가 내준 숙제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트론을 향한 테스트를 마치고 라블미는 아무 선생이나 붙여 준 후 그에게 관심을 끊었다.

그런 셋째 왕자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간 것이 신기했다.

다른 왕자들이야 정실 소생이니 연줄이 있는 집안도 있고 도망에 협력해 줄 사람도 많았을 테지만, 그는 다르니까.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

호수에 모래알을 던진 듯한 아주 작은 위화감에 불과했다. 곧 라블미는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회랑을 뒤로했다.

그것 말고도 그녀가 신경 써야 할 안건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