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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7화 (17/132)

17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9)

“아낀다고……?”

“네, 아니면 이렇게 전하답지 않은 일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대의 예상은 잘못되었다. 그녀는 도구로서 나에게 필요한 자고, 나도 그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뿐이다.”

“글쎄요오.”

오독오독 땅콩을 씹으며 가이는 성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몰락한 가문의 귀족 영애를 필요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우선은 그렇다 치고.”

“…….”

“다음으로 궁금한 건, 전하께서 그녀에게는 무엇을 주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가이는 땅콩 껍데기를 늘어놓았다.

“주술사 집단에게는 이 나라의 해체를, 또한 저희 가문에게는 독립을. 왕자님은 꽤 합리적인 거래 상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껍데기를 뚝뚝 반으로 갈라 다시 줄을 세우며 그는 나른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이나드 영애에게는 무엇을 주십니까?”

“……가족의 복수를.”

“정말 그것뿐인가요?”

트론도 내지 못한 결론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거래 보수로서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일,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정 라이샤로서 트론 스레데니옴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글쎄, 나를 성군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리는 하더군.”

“그래서 착한 왕자님 행세를 하고 계셨던 거군요. 취미신가 했어요.”

“…….”

트론이 그를 한 번 째려보았다. 키들키들 웃으며 가이는 땅콩 껍데기를 꾹 눌러 바스라뜨렸다.

“합리적이신 분이 그녀에게만 비합리적으로 구시니 보는 저는 무척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힘내세요.”

“……무슨 의미지?”

“그녀에게 거래의 보수로 무엇을 주게 될지 고민하시라는 의미입니다.”

“많이 취했나 보군.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포털이나 열도록 해.”

“에이, 새로 사귄 친구랑 더 놀고 싶었는데요. 아쉽지만 저도 밤새 할 일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밤새 할 일이 있는 사람이 술도 약하면서 와인을 퍼마시던 건가 싶어 트론은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이는 손에 붙은 부스러기를 털어낸 후, 이전보다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전하. 정말 저에게 뭔가 조건부 주술 안 걸어도 괜찮으십니까? 저는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상대일 텐데요.”

“……반복 게임이나 거래에 있어 손해를 보지 않고 서로의 이득을 도모하는 방식을 알고 있나?”

“최초의 상호 협력. 이후, 상대가 배신하면 배신을, 협력하면 협력을 반복하면 된다는 이론이던가요?”

“서로가 합리적인 플레이어여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하지만.”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초의 협력 단계부터 이미 나는 그대를 배신했다. 자기 차례에 같은 걸 돌려줘도 되었을 터인데, 그대는 그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 두지.”

“……후후. 그것 참 기쁜 말씀이네요. 저는 돌연변이지만, 그래도 르터바이스입니다. 스스로 정한 주군은 배신하지 않는답니다. 만년설 호랑이는 당신의 등을 지킬 것입니다.”

“그런가.”

“네. 그러니 모쪼록, 왕자님이 쥔 패를 저에게 모두 오픈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요. 굳이 왕자님의 주술 흔적을 쫓아온 이유는, 그 정도겠네요.”

가이의 남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드물게 솔직한 감정을 담은 그 눈빛을 고요하게 응시하던 트론이 작게 끄덕였다.

“……선처하지.”

“네엡. 그럼 살펴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손가락을 휘저으며 가이는 포털을 공중에 생성했다.

이윽고 트론은 그 빛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사람이 드문 이른 새벽, 여관에서 체크아웃을 한 갈색 단발의 소녀가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레이스 리본이 달린 모자를 눌러쓴 흑발의 아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폭이 넓은 옷자락과 느슨한 소매가 달린 녹색 드레스는 튀지 않고 수수했다.

어딜 보나 사랑스러운 소녀로 보이는 그는,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셋째 왕자 트론 스레데니옴이었다.

“정말 웬만해서는 의심을 안 사겠어요, 왕자님.”

“밖이야.”

“……으음, 웬만해서는 의심을 안 살 것 같아. 로나.”

“…….”

임시로 정한 여자 이름을 듣고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가, 각오한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가자, 엘 언니.”

예전부터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어두운 욕망을 이뤄 낸 엘피는 마음속으로만 기뻐하기로 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평민이라는 설정 때문에 그에게 화려한 고급 드레스를 입힐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대신 리본이라도 잔뜩 사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달랬다.

처음에만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던 트론은 이후 드레스에 맞춘 걸음걸이를 터득하여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일단 하기로 한 일은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답다고 엘피는 생각했다.

엘피 개인의 욕망은 미뤄 두고, 위장 목적으로 여장을 한다는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 소녀가 트론일 거라는 상상을 하기는 어려웠다.

가이즈카 르터바이스쯤 되는 괴짜나 떠올릴 법한 발상답다고 할 수 있었다.

‘생활비에 보태 쓰려고 여자애들 머리를 잘라 파는 평민 집안이 많으니까 짧은 머리는 문제 될 것 없겠지. 어차피 하녀 일을 할 때는 두건을 쓰기도 하고 말이야. 하녀복 입은 왕자님도 귀엽겠다. 에이프런!’

그렇게 본인에게 실례되는 욕망을 머릿속으로 펼쳐 나가는 엘피였다.

***

“잘 오셨습니다, 두 분.”

어제와 같이 가이가 ‘달 물결’ 레스토랑 안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경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퀭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만은 여느 때와 같이 들뜬 어조였다.

“안녕하세요, 르터바이스 소백작님. 어제 못 주무셨나요?”

“그것도 그렇고, 과음했더니 숙취도 있어서요. 덕분에 오늘 아침 코스는 해장 요리가 될 것 같습니다만, 맛은 있으니 양해해 주세요.”

“네에…….”

전혀 과음할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기에 엘피는 약간 놀랐다.

트론은 모자를 벗고 엘피의 옆에 앉았다. 레이스 리본이 달린 모자를 벗어도 헤드 드레스가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트론을 보며 가이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놀려 댔다.

“정말 사랑스럽네요, 왕자님. 나중에 딸이 생긴다면 왕자님 같으면 좋겠어요.”

“아침부터 죽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아, 성격은 왕자님 말고 이나드 영애 쪽으로.”

“저희 왕자님이 저보다 성격 좋으신데요?”

팔불출 같이 튀어나온 엘피의 말을 긍정하지는 않으며 가이는 종을 흔들어 지배인에게 아침을 가져오도록 주문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은 다른 사람들한테 전반적으로 친절하신데 소백작한테는 가차 없으시네.’

처음부터 이쪽을 도발해 온 데다가 가이 본인이 알아서 매를 버는 식으로 상대방이랑 친분을 쌓아 가는 타입인 것 같긴 했다.

하지만 트론이 그걸 받아 주는 건 좀 신기했다.

‘왕자님은 부정하시겠지만, 좋은 친구가 생기신 것 같아서 다행이야. ……나보다 빨리 친해진 것 같아서 좀 질투 나긴 하지만.’

싱숭생숭한 마음을 누르며 엘피는 식사를 마쳤다.

해장 요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해물 수프가 나왔지만, 맛은 나무랄 데 없었다.

코스가 끝나고 디저트와 차가 나왔을 때 가이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 미리 의논한 대로, ‘로나’와 ‘엘’이라는 이름의 위장 신분을 마련했답니다. 뒤를 캐기 어려운 경로로 세 번 정도 꼬아 두었으니 추적의 염려는 거의 없습니다.”

“네, 소백작님. 그 부분은 알아서 잘해 주셨을 거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두 분께서 ‘설정’을 철저하게 외워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뒤에 놓아둔 가방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러고는 고풍스러운 끈으로 묶여 있는 서류를 각각 한 부씩 트론과 엘피에게 넘겼다.

“저희 가문도 사람들을 고용할 때 최대한 뒷조사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 ‘완전’이란 건 없는 법이죠. 어디에 보는 눈이 있을지 모르니, 위장 신분으로 타인과 접촉하실 때 설정 범위 내에서 발언하고 움직이셔야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것인가요?”

“가령, 지나치게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티가 난다거나, 설정으로 정해진 고향 지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부분일까요.”

“……맞는 말씀이네요.”

엘피는 자신 몫으로 주어진 서류를 보았다. 성명, 나이, 출신 지역을 시작으로 일상적으로 타인과 대화할 때 유념해야 할 만한 설정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녀보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트론이 특정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매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트론을 살피던 엘피는 이상한 점이 있는 건가 싶어 따라서 뒷페이지를 확인했다.

나무랄 데 없이 고급스러운 필체로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가이의 특별 첨삭 항목(사랑을 담아서)」

페이지 서두부터 불길함만 피어올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언니와 여동생! 정말 듣는 것만으로 사람의 낭만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죠!(저는 외동아들이라 정말 형제자매 있는 사람이 부럽답니다) 두 분께서 모처럼 구미 당기는 설정을 연기하게 되셨으니 이런 멋진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제가 영혼과 수면을 깎아 로나와 엘의 추가 설정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엘피는 극렬하게 아래 내용을 읽고 싶지 않았다.

「역시 언니와 여동생이라면 다정하고 상냥한 언니와 그녀만이 세상 전부인 양 타인을 배제하는 여동생의 조합을 밀겠습니다. 로나는 다른 사람에게 낯을 가리고 언니를 향해서만 천사 같은 미소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타인이 언니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으며…….」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녀는 바로 페이지를 닫았다.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출신지나 기본 지식에 대해서 미흡한 부분 없도록 외워 두겠습니다.”

옆에서 트론도 서류를 다시 가이 쪽으로 밀었다.

“필요한 정보는 머리에 넣었으니 폐기해도 좋다. 내용은 유념하도록 하지.”

가이가 섭섭한 얼굴을 했다.

“두 분, 제대로 다 읽으신 것 맞나요? 명백하게 특정 페이지 이후로는 눈길도 안 주신 것 같은데요?”

“알아서 하겠다. 그래서 용건은 이것으로 끝인가?”

“제가 이거 만들려고 어제 밤을 새웠는데요!”

“그대가 머저리 짓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겠으니, 용건.”

잠시 투덜거리던 가이는 흘러내린 자신의 옆머리를 쭉쭉 잡아당겼다.

“두 분은 제 직속 시종이 될 겁니다. 기본적으로 저만 따라다니면 될 거고, 다른 업무는 일절 맡기지 않도록 가사 총괄에게도 일러 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전하에게 걸레질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난 별로 상관없다.”

“저도 그 꼴 못 보니까 그러지 마세요, 왕자님.”

엘피도 옆에서 뜯어말렸다.

“앞으로 저는 2개월간 공식적인 업무를 되도록 줄이겠습니다. 남는 시간에 북부 귀족 교류 파티 전까지 미리 준비해 둬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논의하기로 하시죠.”

“알겠다. 결정해야 하는 안건은 산더미일 것 같군.”

“네엡. 겸사겸사 저희 영지 업무도 좀 도와주시고요.”

“그쪽이 본심인가?”

“에헤헤.”

부정하지는 않으며 가이는 카푸치노를 홀짝 마셨다.

“아차차, 잊을 뻔했다. 중요한 거 하나 더 있었습니다. 전하.”

“뭐지.”

“슬슬 이나드 영애의 정체를 알려 주셨으면 하는데요.”

생글생글 웃으며 가이가 엘피를 쳐다보았다. 안경 안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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