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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6화 (16/132)

16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8)

트론은 가이의 목을 겨누고 있던 숏소드를 땅에 박았다. 모래가 긁히는 소리가 울렸다.

“……주술의 자취를 추적하고 있었나.”

“그야 당연하죠. 방식이 교묘해서 꼬리를 못 잡고 있었지만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태였다고 할까요?”

“…….”

“아무리 그래도 저희 아버님을 겨냥한 건 너무 비겁하시잖아요. 그분은 온종일 마법 연구하기 바빠서 저희 집안에서 제일 무해한 분이라고요.”

“보험으로 든 차선책이었다.”

트론은 짧게 대꾸했다.

르터바이스 측과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협상이 결렬될 경우에 대비한 보험을 들어 두었다.

일주일 내에 밀리엔 르터바이스의 부군의 목숨이 끊어지게 만드는 주술 준비였다.

협상이 결렬되는 즉시 주술을 발동시켜 목숨 줄을 쥐고 협박할 셈이었다.

주술이 발동하기 직전까지의 밑 작업을 사먼에게 지시해 두었고,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에는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으로 추적당할 일 없이 끝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너무 솜씨가 좋아서 추적이 불가능하겠거니 반쯤 포기했거든요. 그런데 세상에나, 이렇게 왕자님과 만나다니 행운이네요!”

“…….”

“한동안 주술을 안 쓰셨으면 완전 범죄였을 텐데, 왜 이렇게 허술한 짓을 하셨어요?”

트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만, 그로서도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엘피가 무뢰한들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충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답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 그게 유언인가?”

“와, 무서워라. 르터바이스를 적으로 돌리시려고요?”

“가장 좋은 패를 잃는 것은 나로서도 유감이다.”

그 말을 듣고 가이는 쿡쿡 웃었다.

“자, 그럼 이 상태로라도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트론 전하.”

“역시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핏줄이군.”

“그렇지만 전하께서 정말 저를 죽이실 거였다면.”

가이가 팔을 뻗어 자신의 목 옆에 꽂힌 숏소드를 더듬더듬 쥐었다. 칼날에 베인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포털에서 제가 나타나자마자 단칼에 죽이셨겠죠?”

“…….”

“즉, 왕자님께 대화 의지가 있다고 저는 판단했다 이 말입니다.”

칼에서 손을 떼고 피를 날름 핥으며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주술은 상대의 머리칼이나 피가 있으면 되는 거였죠? 뭣하면 저한테 주술을 걸고 시작하셔도 괜찮아요.”

“……후우.”

트론은 가이의 눈에서 손을 떼고 숏소드에서 피를 닦아 내어 칼집에 꽂았다.

몸을 일으킨 후 피가 흐르고 있는 가이의 손을 쥐고 공중에 문양을 그려 냈다.

옅은 분홍빛으로 흔들리던 주술식이 완성되자, 가이의 손에서 상처가 사라졌다.

누운 채로 자신의 손을 살펴보던 가이가 물었다.

“그래서 이건 무슨 주술이죠? 일주일 뒤에 죽나요?”

“……상처를 치료한 것뿐이다.”

후드를 뒤집어쓰며 트론이 짧게 뱉었다.

“치유 주술은 병에만 듣는 거 아니었나요? 치유 마법처럼 상처 치료도 가능했어요?”

“원리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것보다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군.”

가이는 옆에 떨어진 안경을 다시 쓴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은 안 쓰는 저희 가문 별장으로 가시죠.”

***

트론은 가이가 다시 연 포털을 통과하여 바닥에 착지했다.

주변은 온통 장미였다. 잔디 위에 솜씨 좋은 정원사가 가꾼 듯한 장미가 사방을 장식했다.

짙은 장미 향과 함께 정원 저편으로 멀리 르터바이스 산맥의 만년설 봉우리가 옅게 반짝였다.

광맥에 포함된 마법 물질이 발광하여 이런 깊은 밤에도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신비로운 풍경에도 무감동한 얼굴로 트론은 뒤따라 포털을 타고 온 가이를 돌아보았다.

“저희 영지는 여름이라도 밤에는 춥답니다.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난 상관없다.”

“저는 귀하게 자라서 상관있어요!”

“……확실히 나보다는 그대가 귀하게 자랐을 것 같긴 하군.”

딱히 농담을 말하는 기색 없이 트론이 그렇게 뱉고는 정원 안에 자리 잡은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전하께서 데니옴 왕궁의 천덕꾸러기였다는 거야 주지의 사실입니다만, 딱히 지금 어필하셔도 저한테는 소용없는데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그만 가식 떨고’ 이야기하자는 취지 아니었나?”

“저야 좋습니다. 가시죠, 주군.”

저택 안은 사람이 없어 쥐 죽은 듯 고요했으나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가이는 성큼성큼 걸어가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잔과 접시를 테이블에 늘어놓은 가이는 식량 찬장과 와인 셀러를 뒤적거려 견과류와 와인을 꺼내왔다.

“전하께서도 한 잔?”

와인 잔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가이가 권하자 트론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됐다.”

“저는 열 살 때부터 마셨는데!”

“취하지 않는 술 따위 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마셔 보셨어요?”

“술도 일종의 독이니까. 웬만한 독이 들지 않는 몸이니, 술은 오죽할까.”

“애주가한테 혼날 발언입니다만, 넘어가시죠.”

트론의 발언에 담긴 깊이를 일부러 지적하지 않은 채, 가이는 능숙하게 코르크 뚜껑을 땄다.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는 잡담을 하는 것처럼 일상적이고 느긋한 말투로 그가 질문했다.

“트론 전하께 최소 소대 단위의 첩보 집단이 딸려 있다고 파악했습니다만, 맞나요?”

“그래.”

“다른 귀족가와 협력하시는 건 아닌 듯한데요.”

“그대는 내 어머니의 출신을 알고 있나?”

일련의 상황으로 짐작은 갔지만, 정확한 정보는 모르고 있었기에 가이는 고개를 저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것만 들었습니다.”

“주술사였네.”

“…….”

“미래를 촉망받는 유능한 주술사였다고 하더군. 일반적으로 천시받는 주술사니 미래를 촉망받는다는 표현도 우습지만.”

국법하에서는 주술사도 평민이다.

그러나 실제 취급은 평민 이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선 아래에 있는 천민에 가까웠다.

천 년이 넘는 스레데니옴 왕국의 역사에서 주술사의 존재가 공공에 드러난 기간은 500년 남짓했다.

그 이전에는 존재 자체를 숨기며 각종 정치 싸움과 음모의 수면 아래 비장의 수단으로서 활약했다.

독과 저주.

스레데니옴 왕국의 역사를 어둡게 물들이는 장치들이었다.

그러다가 500년 전, 이 지긋지긋한 사슬을 끊기 위해 당시 국왕이 주술사의 존재를 공표했다.

또한, 주술사가 긍정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마수 사냥에 투입한다거나, 농수산물을 개량한다거나, 땅의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병마를 치유하는 긍정적인 면모를 살리는 식이었다.

국왕의 바람대로 주술사가 활약할 장은 늘어났고 태생상 적은 숫자 때문에 원래도 그랬지만 몸값이 높은 직종이 되었다.

그러나 지긋지긋한 사슬은 끊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물밑에서 일어났던 저주 싸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뿐이었다.

유력 귀족 가문은 상시 주술사를 고용하고 정적을 견제했다. 평민들은 사람의 몸과 정신을 멋대로 휘저을 수 있다고 알려진 그들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마법사는 실력을 인정받아 귀족의 작위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주술사는 작위를 받은 전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할 때 불러 비싼 값을 치르긴 하지만 다들 눈살을 찌푸리며 역병이라도 되는 듯 멀리 두고 싶은 존재.

그것이 주술사였다.

“주술사들 중에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씨족끼리 비밀리에 연합을 이루는 집단이 있고, 어머니가 그 출신이었지.”

“……그렇군요. 전하의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 모종의 과정을 거쳐 그들과 손을 잡게 되신 걸까요?”

“그렇게 이해해 주면 될 것 같군.”

가이는 두 잔째 술을 따랐다. 유리잔 너머로 보이는 트론의 새카만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전하는 협력하는 상대가 바라는 것을 제공하는 분 같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

“그 집단도 그저 충정과 동지의 복수만을 위해 전하를 돕는 것은 아닐 텐데, 어떤가요?”

“그대의 목적과 비슷하니 염려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자그마한 소년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자조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이 빌어먹을 나라가 근본적으로 해체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

“하긴, 원한으로 따지면 저희 가문이 따라갈 수도 없겠네요.”

“…….”

“가식 떨지 말자고 했으니 저도 말씀드리자면, 전하. 아마 아버님을 건드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변경백 각하가 알게 되면 절대로 협력해 주시지 않을 거랍니다.”

“신뢰를 저버리는 짓이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그렇지만, 정략결혼치고 두 분 사이가 좋으셔서요. 어머님도 그렇고, 아버님은 최우선 순위가 각하, 그다음이 마법 연구, 아들인 저는 한 5순위쯤 될 정도라니까요.”

가이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려 거품이 나는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의 비열한 방식에 실망한 것은 아닌 듯 보이는군.”

“당연하죠. 애초에 전하와 협상할 때부터 심증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일은 지금 저만 알고 있죠.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그대가 고결한 르터바이스 가문에서 태어나기 어려운 돌연변이라는 점만은 잘 알겠네.”

“에헤헤.”

가이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붉어진 뺨을 손으로 비볐다. 보기보다 술에 약한 모양이었다.

“승리하지 못하는 고결함이란 허무한 자기 위안에 불과합니다. 이 난세에 주군을 고를 거라면, 고결한 패배보다는 비열한 승리를 안겨 줄 사람이 좋습니다.”

“칭찬 고맙군.”

“천년이나 이어져 온 이 나라의 필연 아니었을까요? 르터바이스에서 저 같은 사람이, 또한 동시대에 스레데니옴 왕실에서 왕자님 같은 사람이 태어난 건.”

“……글쎄.”

트론은 접시에 든 피스타치오를 집어 들어 껍데기를 깠다. 딱히 먹을 의도는 아니었는지, 알맹이에 손톱자국만 냈다.

“그것도 제대로 알려 주세요! 왜 허술하게 오늘 주술을 쓰신 겁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할 일인가.”

“그야, 저도 꼬리를 잡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신 왕자님께서 이런 실책을 저지르신 건, 그만큼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잖아요? 저희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니 알아 둬야 할 것 같습니다만.”

트론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히믈 소자작을 알고 있나.”

“아, 압니다. 이번에 뭔가 집안 사업 때문에 저희 영지에 방문 중인 귀족 후계자 무리 중 한 명이었죠.”

“그의 성품은?”

“으음, 그리 칭찬받을 사람은 아닌 거 같네요.”

그에 담긴 뉘앙스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트론은 끄덕였다.

“히믈 소자작 패거리가 그 칭찬받지 못할 짓을 이나드 영애에게 해서.”

“세상에나. 그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짓을.”

가이가 손 위에 올린 해바라기 씨를 부수며 혀를 찼다.

“아까 그 주술은 그 치들에게 거신 거군요? 그래서 죽나요? 일주일 뒤에 죽어요?”

“……아까부터 주술사에 관해 가장 실례되는 편견을 늘어놓고 있지 않나, 그대?”

“아버님한테 그 실례되는 주술을 거시려고 한 분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나요!”

“그 건을 그냥 넘기는 인간에게는 자격이 있나.”

“에헤헤.”

“그리고 사람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고통은 죽음보다 삶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후 그들의 처분은 삶의 범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오싹하게 들리는 그 말에 가이는 얼굴 모를 소자작과 그 친구들을 동정했다.

“……일주일 뒤에 죽는 주술은 아니라는 거다. 그쪽에 내 얼굴이 드러나서 그걸 무마하려는 의미가 컸다.”

머리칼을 이용하여 그 대상에게 트론과 엘피의 인상이 흐려지도록 만드는 주술이었다.

“정신 조작술은 금지된 술법 아니었나요?”

“금지란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면 그만’과 동의어라고 보는데.”

그 말을 듣고 가이가 깔깔 웃었다. 주정뱅이 특유의 오버액션이었다.

“일종의 암시에 불과하다. 아예 사람 정신을 망가뜨리는 금지 술법과 비교하는 건 곤란하지.”

“주술 강의는 다음 기회에 듣지요. 아무튼, 경위는 알겠습니다.”

그는 다시 와인을 들어 잔에 따르다가 테이블에 흘렸다. 보다 못한 트론이 와인 병을 자신 쪽으로 가져왔다.

가이가 투덜대며 입맛을 다시다가 취해서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

“역시, 전하께서 이나드 영애를 아끼신다는 것도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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