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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2화 (12/132)

12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4)

가이가 권유하여 세 사람은 아침 식사부터 함께 하기로 했다.

그간 도피 생활로 인해 싸구려 음식으로만 연명하던 엘피에게는 오랜만의 만찬이었다.

르터바이스 가문에서 직속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답게 음식 수준이 무척 훌륭했다. 예의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전채로 나온 연어 브루쉐타는 더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트론은 입이 짧고 먹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었기에 그를 보면서 좀 안타까웠다. 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별 감동 없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 자리가 그저 즐거운 식사를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식사하는 과정에서 서로 잽을 날리듯이 정보 탐색전이 벌어졌다.

“이나드 영애는 전하의 시녀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메르윙거 경.”

식후 차를 마시며 엘피는 살짝 긴장했다. 라이샤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기에 최소한의 정보만 오픈하면서도 상대의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저어,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어제 저희를 쫓아오신 건 우연이 아닐 것 같은데요. 어떻게 아신 건가요?”

“헤럴드에 의해 왕위 찬탈이 일어난 상황이니, 저희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언론을 통해서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셀딕 왕을 시해 후 도망쳤고, 왕제인 헤럴드가 슬기롭게 혼란에 대처하고 있다’라고 알려졌지만, 가문에서 따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뜬소문으로 ‘트론 전하가 올페마로 왔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가 들어와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죠. 설마 당당하게 저택 근처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지만요.”

그 뜬소문을 흘린 당사자는 모르는 척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엘피는 도망 다니는 처지면서 조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것만 같아서 주눅이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어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정식 루트로는 변경백에게 만남을 청하기 어려워서요.”

“하긴, 그도 그렇겠네요.”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트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정체를 의심하지는 않나?”

“한 번 보면 누구나 잊지 못한다는 고혹적인 외모를 확인하고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트론 전하가 아니라면 우리나라에 제 생각보다 미남이 많았다는 의미니, 그건 그거대로 기쁜 일이지만요.”

“…….”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가 싸늘해졌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만,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네에,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답하고 말았다.

“그건 안타깝군요.”

우습지도 않은 촌극을 묵묵히 지켜보던 트론이 딱딱하게 잘랐다.

“그대의 유희 감각이 부족하다는 점은 알았으니, 본론으로 들어가 주었으면 하는데.”

“전하께서는 마음의 여유가 부족하신 것 같군요. 뭐, 좋습니다. 실제로 마음의 여유가 있을 상황은 아니실 테니.”

안경을 고쳐 쓰며 그가 다시 확인했다.

“변경백 각하를 뵙고 싶으신 거지요?”

“그렇다. 지금 이 자리도 변경백의 인지하에 마련된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부탁하신 말씀도 각하에게 직접 전달 드렸답니다.”

하지만 밀리엔 르터바이스는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엘피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걸 들으신 각하가 분부하셨습니다. 왕자님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저에게 맡기시겠다고요.”

그 말에 엘피는 다소 위화감을 느꼈다. 일개 보좌관에게는 과할 정도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처한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제 저희 가문으로 보낸 메시지도 명확하지요.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

“하지만 음……. 아, 이나드 영애. 영애도 <웬필리와 러트니> 동화를 읽으셨다고 하셨죠?”

“아, 네.”

“줄거리를 기억하시나요?”

“네, 물론이죠.”

“그 동화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엘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웬필리와 러트니> 이야기를 떠올렸다.

르터바이스의 선조 웬필리와 당시 스레데니옴 왕국의 셋째 왕자인 러트니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왕세자였던 첫째 왕자가 자신의 왕위 계승에 불안을 느껴 러트니를 포함한 형제들을 모두 제 손으로 죽이고 만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웬필리는 통곡하며 친구의 복수를 위해 수도로 진군한다. 르터바이스 역사상 유례 없는 반역이었다.

그 과정에서 웬필리는 셋째 왕자 러트니의 영혼을 세 번 만나게 된다.

러트니는 왕가에 반기를 들지 말고 마귀에 사로잡힌 왕세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성군으로 이끌라고 그를 설득한다.

결국, 웬필리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르터바이스 영지로 회군하게 된다.

그는 친구의 말대로 왕세자를 용서하고, 왕세자 또한 마귀에 붙들려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며 성군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말하면 대체 이 이야기에 무슨 거창한 주제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엘피는 고민 끝에 답했다.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못하니 용서하라?”

“제가 문학 선생님이었다면 70점쯤 드렸을 겁니다.”

미묘하게 자존심 상하는 점수였다.

“그럼 메르윙거 경이 생각하시는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엘피가 묻자, 가이는 느릿한 동작으로 손을 깍지 끼워 테이블에 괴었다.

어딘지 가벼워 보이던 표정은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르터바이스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엘피는 눈을 홉떴다. 가이의 시선은 정확하게 트론을 향해 있었다.

“전하께서 저희 영지에 내려오는 고사를 영리하게 인용하신 것은 재미있는 시도였습니다.”

「지켜야 할 벗을 잃었으매, 호랑이는 그리운 만년설로 돌아가리. 방패와 칼을 지니고.」

회한이 담긴 그 시는 친구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고 영지로 돌아가는 자의 심경을 그리고 있었다.

「호랑이는 방패와 칼을 지니고 만년설 봉우리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

트론이 변경백에게 전한 문장은 이제 그들이 영지 밖으로 나가 움직일 때라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하께서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방 안에 순간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저희 르터바이스는 트론 전하와 아무런 연이 없습니다. 그러니 친구를 자칭하실 수도 없지요.”

“…….”

“또한, 전하께서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웬필리 르터바이스가 유례없는 반역을 결의한 것은 셋째 왕자인 러트니 스레데니옴이 ‘죽은 후’입니다. 아니면…….”

트론의 형형한 안광에도 짓눌리는 기색 없이 가이 메르윙거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본인의 시체를 팔아서 르터바이스를 움직이시렵니까?”

고사를 가져와서 빗댄 셋째 왕자조차도 죽어서야 르터바이스를 움직였는데, 살아 있는 당신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었다.

***

“무엄합니다!”

엘피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외쳤다.

무심한 트론의 눈과 흥미로워 보이는 가이의 눈이 동시에 교차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이 메르윙거에게는 처음부터 진지하게 협상을 할 의지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가 입에 담는 말들은 그저 트론을 얕보는 도발뿐이었다.

엘피는 불경한 소리를 입에 담은 그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역설했다.

“트론 전하는 스레데니옴 왕국의 지엄한 국법에 따라 당신들에게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계 왕족입니다. 이 무례를 무엇으로 갚을 겁니까?”

“하하.”

나른한 동작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가이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왕족을 사칭하는 죄도 스레데니옴 왕국의 지엄한 국법에 따라 즉시 처형될 수 있지요. 변경백 권한으로도 가능하니까요. 우리나라의 미남 인구를 줄이는 건 저도 안타깝습니다만.”

“그 입 함부로 놀…….”

엘피가 폭발하기 바로 직전, 트론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왕자님?”

“괜찮다. 앉아라, 이나드 영애.”

흥분해 있는 그녀와 달리 트론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엘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명에 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엘피의 경험상 트론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무조건 안심해도 괜찮았다. 근거도 뭣도 없지만,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앉는 것을 확인한 트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대의 말대로 안타깝지만 나는 아직 르터바이스의 벗이 아니다. 물론 죽어서 그대들을 움직일 생각도 없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트론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했으면 한다. 르터바이스의 정보력으로도 이미 파악했겠지만, 헤럴드 숙부가 수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가 다쳤을 것이다.”

“…….”

“그는 왕좌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미다. 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많은 세금이 낭비되며, 많은 발전이 정체되겠지.”

심각한 내용이었지만, 마치 일상을 이야기하듯 평안한 말투였다.

“르터바이스 가문의 힘이라면 분명히 숙부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의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다.”

“왕자님께서 이렇게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시니 조국의 미래가 밝겠군요.”

가이가 여전히 차가운 웃음을 뱉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훌륭하신 트론 전하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이 되실 생각이신 거구요?”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종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피를 제외한 이에게 처음으로 왕위 쟁탈전에 참여한다는 트론의 의사가 밝혀졌다.

“헤럴드 스레데니옴을 끌어내린다는 반듯한 명분을 다리 삼아, 왕이 되시는 거군요. 힘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계속되는 가이의 비아냥에 엘피는 괜히 자신이 더 상처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트론은 일절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답했다.

“그다지 그대 가문의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군.”

“망극한 말씀이십니다.”

“자, 그럼…….”

푸른색의 찻잔을 품위 있게 감싸며 트론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웬필리와 러트니>의 주제에 대해 내가 정답을 맞혀 보도록 할까.”

트론 쪽으로 몸을 숙이며 가이가 흥미진진한 얼굴을 했다. 표정과 다르게 그의 눈빛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트론은 얽혀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나드 영애와 메르윙거 경은 웬필리와 러트니의 관계에만 주목한 것 같지만, 나는 예전부터 이 고사를 들을 때 다른 부분이 궁금했다.”

“어떤 것입니까?”

“러트니의 복수를 위해 수도 코앞까지 내려와 반역을 꾀한 웬필리 르터바이스의 움직임을 뻔히 알면서도, 스레데니옴 왕실이 아무 제재를 가하지 않은 점이다.”

“…….”

“눈물 나는 우정에 왕실이 감복했다는 이야기라면 동화로서는 완벽하겠지만. 정확히는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겠지.”

가면 같았던 가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번져 나갔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그 당시에도 르터바이스 영지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스레데니옴 왕실에서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후후.”

“하지만 반대로 르터바이스 역시 왕실과 정면충돌하여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엘피는 그도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부딪치면 이기는 것은 왕실이었겠으나, 천문학적인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여기부터는 내 추측이지만. 아마 어린애도 안 믿을 이야기로 진상을 조작하여 무능을 감춘 건 왕실 쪽이겠지? 그대들의 선조는 정면충돌을 피하는 대신 이 멍청한 동화의 주인공이 되는 수모를 넘겼고 말이야.”

가이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트론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심지어 왕실이 준 모욕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기를 따져 보면 르터바이스 가문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한 것도 그 사건 이후니까.”

“…….”

“그러므로 이 동화의 주제는.”

트론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르터바이스 가문이 스레데니옴 왕국의 멸망을 바라게 된 계기 정도가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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