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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11화 (11/132)

11화. 충정과 만년설 호랑이 (3)

트론이 일부러 자신의 정보를 르터바이스 측에 흘려 놨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엘피는 한참 당황하다가 겨우 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타지 분이 저희 영지의 설화를 잘 알고 계셔서 기뻤습니다.”

하나로 모아 단정하게 올려 묶은 청년의 은발이 얼핏 라일락색을 반사했다.

엘피는 지금까지 봐 온 은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했다.

“아, 이게 용건이 아니었는데. 실례했습니다. 아까 르터바이스 본저 근처에 계셨죠? 뭔가 용건이 있어 보였다고 위병들이 말해서 뵈러 나왔는데, 사라지셨더라고요. 여기 계셨네요.”

“……그 말씀은, 르터바이스 가문에서 일하는 분이신가요?”

청년의 차림이나 분위기는 어딜 봐도 귀족 남성이었다. 집사나 시종 같은 사용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네. 보좌관 일을 하고 있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가이 메르윙거라고 합니다.”

역시 귀족인 모양이었지만, 어린 데다 평민으로 보이는 이쪽을 존중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날카로운 인상과 다르게 사근사근한 사람이었다.

르터바이스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변경백과 접촉할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바로 이쪽의 정체를 밝혀도 될지는 망설여졌다.

“신분도 높으신 분이 일부러 저희를 찾아오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래서 자기소개하기 전에 한 번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다.

가이라고 자신을 밝힌 청년은 생글생글 웃으며 엘피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 나올까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이가 입을 열었다.

“아, 멀리서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우신 분 같더라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꼭 뵙고 싶었답니다!”

“…….”

트론이 그를 경계하며 엘피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표정이 험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가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후드 안 트론의 얼굴을 보고 반색했다.

“동생 쪽도 엄청난 미남이군요! 오늘 눈 호강하네요.”

이번에는 엘피가 트론의 어깨를 잡아 가이의 시야 밖으로 숨겼다.

“아, 너무하십니다. 순수하게 칭찬한 건데 무슨 범죄자라도 보는 듯한 얼굴을 하다뇨. 훌쩍훌쩍.”

“…….”

딱히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가이는 우는 시늉을 그치고 허리를 폈다.

“그건 그렇고. 르터바이스 가문에 용건이 있으신 것 아니었나요? 제가 대신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엘피는 트론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신분을 밝혀도 될지, 혹은 서신을 전해 달라고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트론이 고개를 들었다.

“르터바이스 변경백 각하에게, 전언을 부탁해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된답니다.”

“……호랑이는 방패와 칼을 지니고 만년설 봉우리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

“…….”

“그 문장을, 그대로 전해 주세요.”

놀란 듯한 가이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졌다.

“후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책임지고 전달 드리죠.”

“네.”

그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엘피에게 건넸다.

“전언의 결과는 내일 오전 9시, 그 명함에 쓰여 있는 장소로 찾아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만년설의 가호 아래 평안하시길.”

르터바이스 영지 특유의 인사를 남기고 그는 먼저 사라졌다.

***

“아까 그 메르윙거 경한테 전언을 부탁한 내용, <웬필리와 러트니>와 관련된 것 맞죠?”

여관으로 돌아온 후 엘피가 트론에게 물었다.

설화에서 웬필리가 남긴 시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마 그거면 전해질 거다.”

그녀는 동화책으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셋째 왕자 러트니가 왕세자에 의해 피살당한 사실을 알게 되어, 그의 친구인 웬필리 르터바이스가 복수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트론이 고사에 나오는 시를 이용해 셋째 왕자에 자신을 빗대어 친구로서 자신을 도와 중앙의 헤럴드를 끌어내리자고 돌려 요청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쪽의 패는 전부 보인 것이나 다름없는데…….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는 예측하기 어렵군.”

“그런가요?”

“중앙 정치에 닳을 대로 닳은 가문이라면 무엇을 추구하는지 명확하게 보이지만, 르터바이스는 그렇지 않으니까.”

“으음…….”

엘피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대의와 섬길 만한 주군의 품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트론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밀리엔 르터바이스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나?”

“올페마에 상업 지구를 설치하고 영지법을 개편해서 르터바이스령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린 훌륭한 영주라고 들었어요.”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건 라이샤로서 그대가 제시할 수 있는 정보다.”

엘피의 표정이 흐려졌다. 회귀 전에는 르터바이스가 움직이지 않았기에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뿐이었다.

필연적으로 트론이 폭군이 된 후의 정보였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흥미롭게 관찰하던 그가 입을 뗐다.

“그러고 보면 전에 말했지. 그대가 본 미래에서 세틱스 형님이 나를 죽였다고.”

“……!”

“라이샤가 보는 건 ‘가능성의 미래’라 했던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 미래.”

“……네.”

“그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르터바이스 역시 부정적인 미래에 휩쓸렸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

세틱스가 트론을 죽인 회귀 전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르터바이스가 ‘트론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미래에 휩쓸렸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엘피는 입술만 달싹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트론이 불행해지는 미래를 떠올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대를 괴롭히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일 변경백을 만나는 일은 중요한 전환점이 될 테니까. 그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없는지 궁금한 것뿐이야.”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녀의 뺨을 쓸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지만 엘피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말하기 어렵다면, 무리할 것은 없다.”

물론 본심은 억지로라도 뱉어 내게 하고 싶지만, 그는 조바심에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착하고 다정한 트론에게 약했고,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줄 것이다.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상대로 엘피는 그에 넘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제가 아는 미래는 밀리엔 르터바이스가 아니라 그 후계자가 변경백인 시점입니다. 현 변경백의 정보가 아니라 송구스럽습니다.”

“아니, 그건 상관없다. 그래서?”

“제가 본 미래에 왕자님은 왕위에 오릅니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닌가?”

“……하지만 폭군이 되어 잔혹한 일을 벌입니다.”

“…….”

“이를 두고 보지 못한 르터바이스 가문에서 왕자님을 끌어내리게 됩니다.”

엘피의 이야기를 들은 트론은 석연치 않았던 의문 중 하나를 풀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추악한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지금은 착하고 정의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도 또 다른 가능성의 미래에서, 내가 착한 모습이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착한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역시 이 순진한 라이샤가 무언가를 착각한 것 아닐까.

트론은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느슨한 동작으로 엘피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자상하게 속삭였다.

“그래, 어떤 미래의 ‘나’는 지금의 헤럴드 숙부처럼 어리석은 짓을 벌이고, 르터바이스와 대립한다는 거로군.”

“……네.”

“그렇지만 르터바이스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들이 누군가를 도왔나? 말러 형님이나 세틱스 형님?”

정말로 자신이 폭군이 되었다면 그 두 사람의 명줄이 남아 있을 리 없지만, 트론은 짐짓 그렇게 물었다.

“아뇨……. 전혀 다른 가문 사람을 도와 트론 전하를 쓰러뜨렸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는 살짝 웃었다.

내일 협상에서 쓸 만한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르터바이스에서 긁어모은 정보를 종합하자면, 자급자족이 가능한 올페마의 유통 체계와 중앙의 역모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역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거기에 르터바이스가 다른 가문을 도와 스레데니옴 왕실을 무너뜨렸다는 엘피의 예언을 교차시키면 한 가지 가설이 완성되었다.

트론은 표정을 바로 숨기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대가 본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의 미래에 불과하다. 그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왕자님께 불경한 말씀을 드린 것 같아서요. 폭군이라느니……. 불쾌하시지 않으신가요?”

역시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엘피는 항시 자기보다는 트론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나를 도구로 선택했다면, 굳이 이럴 필요는 없는데…….’

차차 그녀의 본심을 알고 싶었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괜찮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만들지 않을 것이니 마음 놓도록 해라.”

“……네, 전하.”

그제야 고개를 들고 엘피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 말이 공허한 거짓에 불과한데도.

트론은 묵묵히 엘피의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을 마저 닦아 주었다.

***

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각에 맞춰 도착했다.

레스토랑 ‘달 물결’.

가이 메르윙거가 건넨 명함에 쓰여 있는 주소의 가게였다.

그러나 가게 문에는 「영업 12:00∼23:00」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어라? 분명 오전 9시가 맞을 텐데?”

엘피가 당황하자 트론이 침착하게 타일렀다.

“아마 가게 사람에게 미리 말을 해놨을 거야.”

가게 오른쪽에 붙어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점잖게 생긴 지배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안으로 안내했다.

해가 들이치지 않아 어두운 복도를 지나, 두 사람은 가장 끝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잘 오셨습니다.”

그 안에는 어제 만났던 보좌관, 가이 메르윙거가 혼자 있었다. 변경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엘피는 아쉬움을 느꼈다.

지배인이 퇴장하자 가이가 트론의 앞으로 걸어와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쪽 무릎을 세워 바닥에 앉았다.

그 포즈가 흡사 기사 서훈을 받는 포즈와 비슷하다는 것을 엘피가 깨달았을 때, 가이의 입에서 제대로 된 인사가 나왔다.

“번거롭게 직접 찾아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트론 전하. 르터바이스 변경백의 보좌관을 맡고 있는 가이 메르윙거라고 합니다.”

“……그래.”

트론이 후드를 벗으며 완전히 얼굴을 드러냈다.

가이는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역시 엄청난 미소년이세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가이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과 반비례하여 트론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썩어 갔다.

“……어제도 그렇지만, 르터바이스 가문은 환대하는 방법이 독특하군. 트론 스레데니옴이다.”

“후후, 독특한 덕에 전하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변태로서 말인가.”

“그건 오해입니다!”

첫인상을 정정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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