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8)
현 시점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지만, 트론이 죽은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엘피는 참혹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의 말은 모순되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내가 먼저 형님들을 쓰러뜨리고 보위에 오른다면, 나 역시 죄 없는 혈육을 해하는 자가 되는 것 아닌가.”
그 지적에 틀린 것은 없었기에, 엘피는 눈을 내리깔았다.
머리 위로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천년 왕국이라는 그럴듯한 소리로 포장해도, 스레데니옴 왕가에서 왕권을 잡기 위한 혈육 살해는 끊이지 않는 저주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를 쳐죽인 딸, 조카들을 익사시킨 숙모, 손녀를 굶겨 죽인 조부……. 형제자매의 경우는 너무 많아서 꼽기도 힘들고.”
“…….”
“그대는 나에게 그 장본인이 되라고 권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라이샤는 저주의 일종인 모양이군.”
엘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곧바로 트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헛소리처럼 들릴 것을 압니다. 하지만 왕자님, 저는 당신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독한 모순은 그녀 안에서도 계속 맴돌고 있었다.
원작처럼 폭군이 되어 그가 불행하게 죽는 결말을 보고 싶지 않았다.
회귀 전처럼 아무런 힘없이 정적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슬픈 결말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푸르름과 화사함을 모두 긁어모아, 온 세상의 여름이 그의 것이 되도록 장식하고 싶었다.
그가 메마른 한겨울 가운데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외로이 설원에 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걸어가는 길이 괴로울 수는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 같은 계집이 우는 것에도 마음 써 주실 정도로 다정하시니까……. 그 과정을 용납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
“그 끝에 다다르면 당신이 불행하고 비정한 왕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성군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이 헛소리 같은 순진함과 확신이 없는 모순뿐이어도.
“최선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아뇨. 제가 그 길을 찾아 드릴 것입니다. 명분도, 당위도, 이상도, 모두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가짜 라이샤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이용하여 이기적인 길을 걸으라 꾀었다.
***
그녀는 선택 앞에서 언제나 기대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이기적인 길을 걸으라 하면서도, 트론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 눈빛에 담긴 모순이 흥미로웠다.
“그것이 라이샤로서 그대가 받은 계시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그녀의 속내는 알기 어려웠다. 운명이나 계시 따위가 목숨을 걸고 인간이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고 트론은 절대 믿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고, 목적은 차차 알아가도록 하지.’
트론은 엘피의 팔을 잡아 무릎 꿇고 있는 그녀를 일으켰다.
“그렇다면 라이샤인 그대를 믿어 보겠다.”
“왕자님……!”
반색하는 그녀의 눈에 감격한 듯 눈물이 맺혔다. 더 울면 닦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담담히 말했다.
“신문을 보니, 헤럴드 숙부는 언론을 장악한 모양이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려 하고 있지. 물론 반대도 만만치 않을 테고, 그 사이에 혼란이 있을 것이다.”
“……예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그 혼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이 받는다. 도탄에 빠질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면…….”
그 순간 기이하게 사방의 소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내가 왕이 되겠다.”
그 선언을 입 밖으로 내면서도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라고 트론은 생각했다.
백성 따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잘도 이런 말을 지껄인다.
권력자의 본질은 같다. 나라의 구성 요소인 백성을 ‘다루려’ 하는 것뿐, 궁극적으로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 그의 부친조차 그랬다.
힘없는 백성의 표본 같은 그의 어머니는 권력자에 휘둘리다 죽었다. 그조차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흔해 빠진 사연은 저잣거리에 범람하여 강을 이루고 있다.
“네, 전하. 제가 당신을 누구보다 칭송받는 성군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한 도구가 되겠습니다. 얼마든지 저를 이용해 주세요.”
기만과도 같은 말에 감격한 금발의 소녀는 트론 스레데니옴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성자의 재림이라도 되는 양 기뻐했다.
눈앞에 있는 흑발의 소년은 네 목을 몇 번이고 비틀 기회가 있었고, 망설임 없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 그 얼굴은 흐려질까?
“그대는 나와 함께할 동지며, 인격체다. 도구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진실을 고할 생각은 없었다. 성군이 될 재목이라도 되는 양 착하고 지루하며 올곧은 길을 입에 담았다.
“……왕자님께서는 더 못된 마음 드셔도 괜찮아요. 앞으로가 험난한걸요.”
그러면 라이샤는 마지못한 듯, 조금 기쁘게, 그에게 이기적인 길을 권할 테니까.
정말로 즐거운 일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엘피는 트론보다 먼저 눈을 떴다.
잠이 덜 깨서 처음에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지만, 옆 침대에서 자는 자그마한 트론의 얼굴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 이틀간 있었던 엄청난 일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됐다.
‘……역시 꿈이 아니야.’
그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트론은 살아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엘피는 침대를 빠져 나왔다.
무릎을 굽혀 옆자리의 트론이 누워 있는 침대에 눈높이를 맞췄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의 가슴이 호흡에 맞춰 위아래로 작게 움직이는 걸 보고 안심했다.
탁상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7시가 넘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트론의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올려 넘겼다.
‘지금까지는 계산대로 잘 되었지만, 앞으로 잘 될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힘내자.’
부드러운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는 게 아쉬워서 살짝 어루만지고 있으려니 트론이 몸을 움직였다.
“으음…….”
주책맞게 만지다가 괜히 깨운 모양이라고 스스로를 책하며 엘피는 바로 손을 떼었다.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아침……?”
“네, 더 주무세요.”
“싫어……. 일으켜 줘…….”
오랜 시간 함께 살아서 알지만, 그는 잠투정이 심했다.
엘피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숙여 그의 등을 손으로 감쌌다.
트론은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졸려…….”
“그러니까 더 주무셔도 된다니까요.”
“싫어…….”
논리도 뭣도 없는 투정이었다. 그녀는 등을 토닥거려 주며 그가 잠에서 깨는 것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어른스러운 주제에, 잠이 덜 깬 아침에만 보이는 이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약 3분쯤 지났을까, 품 안에 있는 그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를 홱 밀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트론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역시도 경험으로 부끄러워해서 저러는 걸 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미안하다.”
회귀 전에 처음으로 그를 깨웠을 때도 저렇게 말했다.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엘피는 생긋 웃었다.
“아닙니다, 많이 피곤하셨을 거예요. 세숫물 준비하겠습니다.”
괜히 말을 나누면 더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 그녀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났다.
단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그녀가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그가 보일 때마다 기쁘고 설렜다.
트론 스레데니옴이 살아 있다고 실감하는 순간순간이었기에.
***
다른 건 몰라도 아침에 약한 체질은 고치고 싶었다. 어리고 귀여운 모습을 이용하는 것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별개였다. 트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수를 마치고 수건을 내려놓았다.
“새 옷 대령하겠습니다.”
“이제 도망 다녀야 하는 처지에 궁성에서처럼 시중을 받을 생각은 없다.”
“별것도 아닌데, 제가 하게 해 주세요.”
엘피가 가방에서 새 옷을 꺼내 왔다. 트론은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옷을 벗기기 쉽도록 팔을 벌리며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트론의 옷을 벗기던 그녀가 잠시 슬픈 얼굴을 했다가, 얼버무리는 것처럼 숨을 삼켰다. 역시 알고 있는 자의 반응이었다.
“내 몸에 대한 건, 알고 있었나?”
“……네. 둘째 형님인 세틱스 전하가 그러셨다는 걸.”
엘피가 입술을 깨물며 화를 삭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몸에 남아 있는 상처는 주로 그의 형인 세틱스가 남겼다. 주변에 크게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다.
말끝을 흐리고 재빨리 그의 옷을 벗긴 다음, 그녀는 옷과 함께 챙겨온 연고 약을 몸에 발라 주었다.
“그래도 이제는 더 다치실 일도 없고, 상처 다 아무실 거예요.”
“…….”
트론에게는 딱히 상처를 낫게 할 의지가 없었다. 타인의 동정심을 컨트롤하는 데에 이상적인 도구이기도 했고, 가학 성향이 있는 그의 형이 만족하게 놔두는 부분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체로 무심했다.
“여름이라 안 추우니까 잠시만 이렇게 계세요. 연고 굳으면 새 옷 입혀 드릴게요.”
하지만 장본인조차 관심이 없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가방에 연고를 챙겨 오고 일부러 옷을 갈아입혀 주려 했다.
‘라이샤가 굳이 자신의 주군에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역시 엘피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
잠시 후 연고가 마른 것을 확인한 엘피가 그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만족한 얼굴을 하고 그녀는 자신의 옷을 털었다.
“그럼 저는 요기할 만한 음식을 사 오겠습니다. 혹시 달리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아니, 괜찮다. 나도 같이 가겠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 쳤다.
“괜히 왕자님을 번거롭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나도 바깥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김에 다른 일도 처리하려고 했던 엘피는 상황이 난처해졌다.
“저기, 그게 실은.”
딱히 켕기는 일을 하려는 건 아닌데 왠지 멋쩍어진 그녀는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당장은 저쪽도 정신이 없겠지만, 곧 추격이 시작될 겁니다.”
“음, 그렇겠지. 왕이 되고자 하는 헤럴드 숙부로서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나를 죽이거나 생포하여 이용하고 싶을 테니 말이다.”
이는 그의 형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엘피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평민을 가장한다고 해도, 저희의 외견으로 수배라도 떨어지게 되면 도망 다니기 힘들어질 겁니다. 그래서 염색을 할까 했습니다.”
엘피는 자신의 긴 생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거라면 그대보다는 내가 더 위험할 터인데.”
“왕자님은 후드나 모자로 가리면 자세하게 보지 않는 이상 괜찮죠. 하지만, 함께 도망친 제가 눈에 띄는 금발이니 저 때문에 괜히 왕자님까지 의심을 사게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머리칼인데, 아깝지 않은가.”
그녀 역시 자신의 머리카락 색을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기에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이나마 트론의 운신을 편하게 해 주는 일이다.
“새로운 외형에 도전하는 일이니 즐겁습니다. 어차피 염색할 거면 아까우니, 겸사겸사 금발을 짧게 잘라서 팔아 버릴까 싶고요.”
“검은 머리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내가 염색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이 세계에는 아직 탈색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검은 머리를 다른 색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발이라는 수단도 있지만, 첫째로는 비싸고 둘째로는 아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과장된 연극 외에는 어색하기에 위장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미용실에 들를 예정이라 왕자님이 따라오셔 봤자 지루하실 거예요.”
“괜찮다. 과정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그대의 머리가 바뀐 모습을 접하고 싶지는 않다.”
엘피는 끄덕였다. 그녀 역시 트론이 혼자 머리를 자르고 돌아온다면 꽤 섭섭한 기분을 느낄 테니까.
“네, 왕자님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짐이 없는 편이 움직이기 편할 테니, 머리부터 자른 후에 염색약을 포함해서 장을 보러 갈까 합니다.”
“알겠다.”
“그럼 가시죠, 왕자님.”
그러자 그가 옅게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그래, 누나.”
회귀 전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침에 약한 그를 보던 때처럼 기쁜 마음을 애써 눌러 삼키며 대답했다.
“……응, 론.”
일방적인 친애는 그녀 안에만 존재했다. 회귀 후의 그가 친절하게 대해 준다고 해서, 그 경계를 착각해서는 안 되었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미움받아도 좋고, 거래뿐인 관계라도 좋다.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할 테니, 잠깐씩 그에 대한 애정 때문에 눈시울이 글썽해지거나, 마음이 따스해지는 순간만은 부디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 정의 내리기 어려운, 그런 용서를 빌었다.
아마도, 회귀하게 해 준 신에게 비는 용서에 가장 가까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