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7)
노을 때문에 어딘지 평소보다 더 짙은 색으로 보이는 새카만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그가 속삭였다.
“부왕께서 돌아가신 건, 헤럴드 숙부의 역모가 성공했다는 의미겠지.”
“……네.”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눈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트론에 대한 기만 같았다.
“그래…….”
“…….”
“호외로 나온 신문을 사고 싶으니 나가기로 하지.”
방문을 잠그고 끼익끼익 소리를 내는 계단을 밟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트론은 재킷의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건물 현관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엘피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호외를 외치던 신문팔이 소년은 이미 다른 구역으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트론은 신문을 다 읽은 노파에게 원래 신문값보다 비싼 동전을 쥐여 주고 호외를 양도받았다.
엘피도 다른 이에게 신문을 사서 속독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엘피가 알고 있던 미래 그대로였다.
미래를 안다는 특권으로 그녀는 거짓 라이샤를 자칭했으며, 트론에게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오직 가족이나 다름없는 왕자님의 참혹한 미래를 바꾸기 위해.
그 결과로서, 그의 부친이 죽는 걸 방조하고 본인에게 경멸받는다 해도.
양 주먹을 깍지 끼어 쥐면서 엘피는 간신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런 그녀 곁에 바구니를 든 소녀가 다가왔다.
“꼬, 꽃 사세요.”
장사 끝물인지 시들시들한 꽃을 바구니에 넣은 소녀가 가냘프게 외쳤다.
멍하니 장사 요령이 없는 아이구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트론이 그 소녀를 붙잡았다.
“남은 꽃 전부.”
은전을 주며 그가 말하자 소녀는 뛸 듯이 놀라 바구니를 통째로 넘겼다.
후드 너머로 언뜻 트론의 얼굴을 보고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나으리……?”
“나도 평민이니까 그런 인사는 됐어. 가 봐.”
그 말을 듣고 난 뒤에도 소녀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신문을 접어 받아 든 바구니에 집어넣으며 그는 엘피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줄래? 누나.”
낮에 들었던 것과 다르게 묵직하게 울리는 ‘누나’라는 표현에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떤 거절의 말도 돌려줄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조용히 끄덕였다.
***
인파를 헤치고 트론이 엘피를 데려간 곳은 여관에 가기 전에 음식을 사 와서 먹었던 공원이었다.
노을빛으로 가득했던 하늘은 어느샌가 반 이상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기 때문인지 사람이 전혀 오가지 않았다.
트론은 벤치에 앉으며 꽃바구니를 옆에 두었다.
엘피는 터질 것 같은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앉지도 못하고 트론과 어정쩡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트론이 빤히 바라보았다.
‘부왕이 죽는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에, 내가 노했다고 짐작하는 걸까.’
그녀는 헤럴드의 반역을 예언하면서, 현왕인 셀딕이 그 일로 죽는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럴드를 알고 있는 트론으로서는 부친의 죽음이 딱히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숙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 목숨을 쉽게 빼앗는 타입이다. 실제로 엘피의 가족도 몰살당하지 않았는가.
‘나라면 부왕을 살려두고 여러모로 써먹은 다음 죽였을 것 같은데, 숙부는 충동적이니까.’
그런 전제를 두고 도출되는 결론은, 반역이 일어난 상황에서 현왕이자 부친인 셀딕 스레데니옴의 목숨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야말로 무한히 0에 수렴한다는 건조한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엘피는 육친에 대한 일을 트론이 냉정하게 잘라 판단하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고 짐작하고, 돌아올 대답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단순히 신하로서 주군의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보기에는 그녀의 반응에 위화감이 있었다.
업무적인 손실을 따진다기보다는, 마치…….
부모의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되어 버린 어린아이의 눈동자 같은.
‘……역시.’
그녀를 제거하지 않고 굳이 궁성을 탈출한다는 선택지를 손에 쥔 보람이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쾌감을 마음 구석으로 누르며, 그는 바구니에 든 꽃을 꺼냈다.
백합, 들국화, 안개꽃 등 주로 흰색을 띠는 꽃들이었다.
트론은 왼손으로 꽃줄기를 쥔 채 오른손으로 공중에 빛의 잔상이 남는 도형을 그려 나갔다.
정확히는 도형이 아니라 고대 문자로, 주술식을 구성하는 뼈대였다.
연초록빛의 잔상으로 주술식을 완전히 그려낸 후, 그는 꽃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방금까지 물기를 머금고 있던 꽃들이 일시에 수분을 잃고 낙엽처럼 말라 간다.
줄기째로 공중을 향해 흔들자, 마른 꽃은 가루가 되어 동쪽으로 날아갔다.
왕궁이 있는 수도 방향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의 뜻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작 추모의 꽃을 바람결에 날리는 트론보다는 엘피가 더 괴로운 얼굴을 했다.
울음을 참는 데에 실패하였는지 그녀는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트론은 이 과정에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착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할 만한 행동을 그대로 연기해 낸 것뿐이었다.
부친을 비롯하여 양어머니인 왕비나 그 외 사망했을 궁성의 인간들에게도 별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형들의 사망이 신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살아 있을 테고, 앞으로 번거롭겠구나 하는 현실적인 계산만이 스쳐 갈 뿐.
이제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울고 있는 금발의 사기꾼 소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사기꾼’이라는 소리는 떼야 할 것 같군. 마지막 확신을 얻었으니까.’
꽃이 말라 버린 가루가 모두 사라진 후, 트론은 품에서 독이 든 병을 꺼냈다.
그녀는 울면서도 그 병을 보고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는 뚜껑을 열어 액체를 바닥에 부어버렸다. 기분 나쁜 냄새를 남기며 독이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독의 잔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트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굳어 있는 엘피에게 다가갔다.
손을 들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훔쳐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소녀의 얼굴은 물기 때문에 축축했다.
그가 다가와서 자신을 만졌다는 사실에 엘피는 동요한 듯했다. 크게 뜬 눈에 다시 방울방울 미지근한 이슬이 맺혔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며 트론은 조용히 속삭였다.
“인정하겠다. 그대가 라이샤라는 것을.”
“전, 하…….”
“그러니 그만 두려워해도 괜찮다. 그대를 책망하거나 벌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떨리는 입술에 눈물이 맺혀 젖기 시작했다.
트론은 엄지로 엘피의 아랫입술을 쓸어냈다.
“그대가 한 말을 믿지 못한 나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없었더라도 트론은 부친이 죽는 상황을 방조했을 것이다. 그뿐인 일이었다.
“……전하는 너무 상냥하십니다.”
착하다거나, 다정하다거나, 상냥하다거나. 그런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수식어는 자신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로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그러나 라이샤가 자신을 왕으로 택한 이유가 그 착각 때문이라면,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그 착각에 부응해 주기로 했다.
“그만 눈물 그쳐 줘. 누나.”
기습 공격을 당한 듯 눈물이 쏙 들어간 얼굴로 엘피가 딸꾹질을 했다.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비비며 트론은 미소했다.
엘피는 어깨를 떨며 울음을 참아 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뺨을 감싸고 있는 트론의 손 위에 겹쳤다.
“알았어, 론.”
그 말만은 눈물에 묻히지 않고 또렷하게 전해졌다.
***
악어의 눈물이라기보다 자기 연민에 가깝다고 엘피는 생각했다.
울 자격은 어디에도 없는데, 무척 값싼 눈물이었다.
그런 싸구려 감정을 내보여서 트론이 걱정하게 만드는 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마음을 추스른 후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져버린 후였다.
“우선, 제가 라이샤라는 사실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그 부분은 그대가 스스로 증명한 것이니 감사할 필요는 없다.”
“……네. 그래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창을 닫아도 방음이 잘 안 되는 싸구려 여관방에 바깥 소음이 기어 들어왔다.
상인이 떨이 물건을 사가라며 목청 높여 외치는 고함, 창과 벽을 치는 바람의 흔적, 어딘가 술집에서 시작된 듯한 피아노 연주, 그 외에도 온갖 것이 섞여 있다.
이 조악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품위 있는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이 빠진 테이블의 틈새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대는 말했다. 나를 왕으로 세우고, 그를 위해 옥새를 먼저 확보하고 싶다고.”
“네.”
그가 입 밖으로 낸 말 역시, 허름한 벽지가 일부 찢어져 있는 여관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
“그대의 목적을 어떻게 해석해도 좋다고 했지.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거기까지는 좋다. 어머니도 모자라 폐하까지 해한 숙부에게는 나 역시 받아낼 핏값이 있으니, 갈 방향이 같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테이블에서 손을 떼고 칠흑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트론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숙부를 끌어내린 다음에 왕이 되어야 할 당위가 어디에도 없다. 형님들이 살아 계실 테니까.”
셀딕 스레데니옴의 부고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이상 그 아들인 왕자들의 죽음을 딱히 숨길 이유는 없었다.
헤럴드가 자신의 조카들을 같이 죽였다면 신문 기사에 그들 역시 정체불명의 반역자 무리에게 암살당했다고 이름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으리라.
트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계승권이 높은 형들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셋째인 자신이 왕이 되는 건 옳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 말이 나올 것이라는 건 엘피 역시 예측하던 바였다.
원작의 트론은 비틀렸을지 몰라도, 그녀가 알고 있던 회귀 전의 트론은 당위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에게 최후의 승리를 거머쥐게 하고 싶어 그녀는 이기적인 길을 택했다.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트론의 부친의 죽음을 방조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분들은 왕의 그릇이 못 됩니다.”
“그 역시 ‘가능성의 기억’으로 알고 있는 것인가?”
엘피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의 첫째 형인 말러 스레데니옴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머저리다. 순수하게 깜냥이 부족했다.
“네. 첫째 형님께서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유약함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일국의 군주로서는 최악이지요.”
“왕족에 대한 모독적인 언사는 우선 넘어가도록 하지. 그렇다면, 세틱스 형님은?”
둘째인 세틱스 스레데니옴.
그를 떠올리면 저절로 손이 떨리고 증오가 피어올랐다.
헤럴드 스레데니옴을 향한 혐오 이상으로.
왜냐면─.
“그는 권력을 쥐기 위해 죄 없는 동생을 살해할 자입니다.”
회귀 전 트론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끼고 살해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