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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악당 길만 걸어요!-4화 (4/132)

4화. 회귀와 거짓 예언자 (4)

짧은 시간 동안 트론은 많은 생각을 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과 답변으로 엘피를 대하면서도 사고의 끈을 늦추지는 않았다.

엘피 이나드라는 존재가 그로서도 예상 밖의 변수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제의 크기와 별개로 그녀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재미있군.’

아마도 철이 들고 나서 겪었던 모든 변칙적인 일 중에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그녀가 헤럴드의 입김이 닿은 간자라는 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별반 놀라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암살 전문가가 아니라, 허점투성이 귀족 영애를 골라 자신에게 보낸 숙부에게 맥이 빠졌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을 얕보고 경계하지 않는다는 증거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어리숙한 영애를 구워삶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트론은 자신의 외모를 어떤 방식으로 이용하면 가장 효과적인지 알고 있었다.

적당히 순진하고 불쌍한 아이인 척 동정심을 유발하면 저쪽에서 양심에 찔려 제풀에 헤럴드의 간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하니 갑자기 ‘라이샤’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줄은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스레데니옴 왕국에는 신비로운 전설이 여럿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엘피가 입에 담은 ‘라이샤’에 얽힌 설화였다.

세상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늘이 내린 예언자 ‘라이샤’가 나타나 가능성의 기억을 읽어 미래를 밝히는 빛을 보여 준다는 이야기.

세계를 구하라는 계시를 받은 라이샤는 왕에게 자신이 읽은 미래의 가능성을 전한다.

긍정적인 내용이라면 그대로 시행하고, 부정적인 내용이라면 그를 피할 방도를 찾으며 왕들은 스레데니옴 왕국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역사상 여섯 명의 라이샤가 등장한 기록이 있으며, 250년 전에 나타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어린애도 안 믿을 사기 행각 같은 거지만.’

먼 과거에 등장했던 라이샤는 몰라도, 근대에 등장한 두 명의 라이샤에게 미래를 읽는 능력 따위는 없었을 거라고 트론은 판단했다.

그런 사기꾼을 자처한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것을 압니다.”

엘피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허술할 정도로 속을 드러내고 있는 주제에, 그녀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관록이 느껴졌다.

“제가 고하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천천히 믿어달라고, 저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왕자님, 헤럴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

헤럴드의 반역을 말하는 거라면, 트론 역시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 파악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세를 구축할지, 아니면 헤럴드의 밑에 기생하여 그의 세를 흡수하고 뒤를 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뿐.

과정의 고단함은 어찌 되었든 간에 효율로 따지자면 후자의 방법이 나을 것 같았고, 거의 마음을 굳혀 가는 상황이었다.

눈앞의 소녀가 라이샤라는 엉뚱한 패를 들고 오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그대는 나에게 어떤 ‘가능성의 기억’을 제시하겠는가?”

엘피를 죽이는 건 손쉬웠다. 지금 당장 트론 본인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필요에 의한 일이라도 목숨을 빼앗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딱히 인도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효율로 계산했을 때 리스크가 크기 때문이다.

하물며, 당장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눈앞의 금발 소녀의 목숨을 굳이 꺼뜨려서 얻을 이익은 전무했다.

그는 움직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살려 두었을 때 이 사기꾼 소녀가 가져올 흥미로움이 더 클 것 같았다.

그녀가 뱉는 헛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그는 무척 오랫동안 그런 감정을 잊고 있었다.

“헤럴드는 앞으로 이틀 뒤에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킵니다. 따라서, 그 전에 왕자님은 저와 함께 왕궁에서 멀리 탈출하셔야 합니다.”

“탈출한 다음에는?”

“역모가 일어나는 동안 옥새가 행방불명될 겁니다. 저희는 헤럴드가 미처 확보하지 못한 그 옥새를 찾아내어, 왕위 계승권자로서 정통성을 다루는 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트론은 무표정하게 엘피를 응시했다.

야심 없는 열두 살짜리 셋째 왕자로서 취해야 할 태도를, 자신이 선택할 다음 수를, 계산하여 연기했다.

“그대의 망상은 잘 들었다. 엘피 이나드.”

“…….”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국왕 폐하께 숙부님의 야욕을 밝히고, 역모를 막는 것 아닌가?”

질문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꽉 쥐고 있는 두 손은 핏기가 가셔 새하얘져 있었다.

흥미롭게 그 변화를 관찰하고 있으려니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숨을 뱉었다.

이로 짓이기던 입술을 떼고,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헤럴드를 막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 말이 반역죄가 된다는 것은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힘없이 끄덕이며 엘피는 아까보다 명확한 발음으로 현 국왕에 대한 불충을 선언했다.

“셀딕 스레데니옴이 왕으로 있는 한, 계승권 순위나 출신이 불리한 트론 전하가 왕이 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고해바친다면 당장 끌려가서 목이 잘릴 소리를 줄줄 읊는 주제에, 금발의 소녀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부터 그는 왕이 될 생각이었다.

이루고 싶은 이상은 없고, 손에 쥐고 싶은 욕망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부친인 셀딕에게는 별 감정이 없었다. 그렇지만 엘피의 말대로 그가 계속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어려웠다.

부친을 대신 치워 주는 헤럴드에게 약간 감사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라이샤를 자칭하는 반푼이 사기꾼은, 그런 속물 같은 소리를 뱉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지금 나를 착한 왕자님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

그는 정말로 눈앞의 소녀가 흥미로웠다. 또한, 궁금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본질조차 꿰뚫어 보지 못한 그녀가, 객관적으로 왕이 될 가능성이 낮은 그를 주군으로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라이샤라는, 말도 안 되는 경우의 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

‘……경멸하고 계시겠지. 자신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역모를 방조하는 게 좋다고 말하는 계집 따위, 소름이 돋을 거야.’

엘피는 펄떡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트론이 학대당하는 것을 방관한 그의 부친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가 왕위를 찬탈당할 만한 폭군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피에겐 트론 스레데니옴을 최후의 승리자로 끌어올리는 것이 다른 모든 가치보다 최우선이었다.

장본인에게 경멸을 받는다 할지언정, 그 선택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쓰렸다.

회귀 전에 친남매처럼 다정하게 지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영영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 엘피를 국왕에게 끌고 가 반역죄로 처형당하게 할 정도로 트론이 모진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6년간 함께 지내온 세월이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물증이 없는 한, 국왕 폐하께 그런 말을 뱉어도 허언으로 치부되겠지요.”

“…….”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제가 전하는 말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그때 가서 제 목을 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속는 셈 치고 제 말에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피로 물든 바닥. 품 안에서 식어 가던 온기. 꺼져 가던 생명.

모든 것이 엘피에게 있어서는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현실이었다.

회귀했다는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자신의 망상이나 꿈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숨 쉬고 살아서 말을 나누고 있는, 눈앞의 그를.

“왕자님을, 꼭 살리고 싶습니다.”

계획성도 무엇도 없는 간절함으로 그 말을 뱉어 냈다.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의 눈길마저 피하면 정말로 아무런 신뢰를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엘피는 용기를 내어 트론의 눈을 곧게 마주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아무런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간절히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엘피는 절망을 느꼈다. 이 방법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그러나 갓 회귀한 그녀는 필사적이었고, 감정을 추스르고 신중하게 고뇌할 시간이 부족했다.

“믿지 않는 말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국왕 폐하께 전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대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를 굳이 밖으로 데려가려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테지. 예컨대, 궁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으로 바깥에서 나를 해하려고 한다거나.”

“…….”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각오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엘피는 품에 가지고 있던 독이 든 작은 병을 트론에게 건넸다.

“이것은?”

“이곳에 오기 전에 헤럴드 측의 첩자가 저에게 넘긴 독입니다.”

“…….”

“저는 내일모레까지 이 독으로 왕자님을 죽이라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역모가 일어날 그날,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는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죽겠지요.”

“……그대는.”

그의 말을 가로채듯 엘피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죽고 싶지 않아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실 것을 압니다. 아뇨, 왕자님. 도망친 후에 제가 예언한 이틀 뒤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내용물을 마시겠습니다. 그것은 왕자님께서 가지고 계시면 됩니다.”

각오를 담아, 엘피는 그렇게 선언했다.

실내가 다시 침묵으로 휩싸였다.

소년은 작은 병 안에 들어 있는 투명한 액체를 잠시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엘피는 깊고 짙은 칠흑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길고도 짧은 시간을 견뎠다.

이윽고 트론의 입술이 그녀가 기다리던 대답을 던졌다.

“좋다. 그대가 말한 대로 이틀 뒤까지. 그동안만 행동을 함께해 주겠다.”

“전하……!”

“독을 마시라고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틀 후 그대의 말이 허언으로 드러난다면, 나는 불경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각오하고 있는 바입니다.”

울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그녀는 굳게 끄덕였다.

여명 2일짜리 신뢰가 이곳에서 맺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미 과거를 겪고 온 엘피는 확신할 수 있었다.

트론의 숙부인 헤럴드 스레데니옴은 곧 자신의 형을 쓰러뜨리고 보좌에 앉는다.

그 뒤로도 신뢰의 목숨이 연장되도록, 그녀는 노력할 셈이었다.

***

그날 바로 사라지면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은 헤럴드의 반역일 전날 밤에 왕궁 밖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다음 수도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근교 도시 카라스에 밤까지 머문 후, 엘피의 예언이 이루어지는지 판가름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을 일단 믿어 주기로 한 트론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라고 자른 후 그녀를 처소로 돌려보냈다.

방에 혼자 남은 트론은 소파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사먼.”

책장에 있던 책이 마치 새라도 된 양 페이지를 나풀거리며 그에게 날아갔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펼쳐진 책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 모서리를 두드리며 트론은 간결하게 지시했다.

“내일 밤부터 하루 이틀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다. 다른 데서 눈치 못 채게 뒤처리하도록. 나 말고 오늘 들어온 시녀도 감시당하고 있으니 그쪽도 같이.”

[이틀 뒤가 거사 당일 아닙니까? 헤럴드 밑으로 들어가실 줄 알았습니다만,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으신지요.]

“변수가 생겨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바뀌는 사항은 뒤에 다시 지시하도록 하지. 거사 당일에는 끼어들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라.”

[변수가 방금 말씀하신 그 시녀입니까?]

“얘기하자면 기니, 설명은 다음에 하겠다.”

[하지만, 주군…….]

목소리의 주인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트론은 서늘하게 웃으며 페이지를 찢어냈다.

“내 결정에 불복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군. 다만, 장로님이 걱정하고 계셔서 그랬습니다.]

“걱정?”

[주군은 피를 보는 것을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정에 치우쳐 저희의 숙원을 이루는 데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염려하신 겁니다.]

트론은 책을 테이블 위에 놓은 후 찢어낸 페이지 위에 불을 붙였다.

책이 메케한 냄새를 남기며 타들어 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이 말 전하도록. 사람 피를 사방에 뿌리는 비효율적인 방식이 좋으면 산에서 마수를 잡아 왕좌에 앉히라고.”

[송구합니다. 주군의 뜻, 받들겠습니다.]

종이가 타들어감에 따라 청년의 목소리도 사그라들었다.

‘어차피 충정도 대의도 없다. 숙원을 이뤄 줄 도구라고 생각하여 나를 돕는 것일 테니.’

트론에게 있어서 그들의 목적이나 본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왕좌에 오르는 자기 증명의 과정에서 선택만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엘피의 말을 선택했다.

재를 불어 공중으로 날리며 트론은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자, 그럼 변수가 얼마나 즐겁게 해줄지 기대해 볼까.”

차갑게 명령을 뱉을 때보다는 온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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