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순간 (完) (120/120)


120화.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순간 (完)
2022.08.23.



 


“그냥 반지가 아닌 것 같으니까 묻는 거지!”

“그냥 반지가 아니면 뭔데?”

“딱 봐도! 응? 누가 봐도 겨…….”

말을 하다 말고 세나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황당한 눈으로 제 약지에 자리한 반지와 제 앞에 서 있는 강현에게 몇 번이나 번갈아 시선을 두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강현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섰다.


“꿈……이 아니었어요?”

“무슨 꿈?”

“선배가 나한테 뜬금없이 결혼하자고……. 자다 말고 일어나서……. 어이가 없어서……. 아 이젠 하다 하다 이런 식으로 날로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

“자는 사람한테 이렇게 막무가내로 프러포즈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세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반지에서 떼지 않았다.


“마음엔 들어?”

예뻤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반지는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강현이 세나의 턱 끝을 살며시 잡아 고개를 올려세웠다.

봉긋하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 아래 따뜻한 밤색 눈을 찾아 시선을 고정한 강현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당겼다.

차갑고 냉철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끝도 모를 만큼 깊어져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대답에 따라서 반지를 뺏을 거예요? 이미 준 건데?”

“응. 뺏을 거야. 비싼 거거든.”

“치사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근데 이거 다이아예요?”

“그게 중요해?”

“네. 결혼반지는 무조건 다이아몬드여야 한다고요.”

“다이아몬드야. 레이어드 된 보석들 전부. 됐어?”

“선배 거는요?”

강현이 눈썹을 와락 구기며 한숨을 토했다.

대답 한 번 듣기 참 어렵네.

강현이 손등이 보이게 올려 친히 그녀의 눈앞에 반지 낀 손을 대령했다.


“여기. 그러니까 이젠 대답을 좀 해보실까요? 사람 애태워 죽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빼요, 빨리.”

“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한 치 앞도 예상이 되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강현은 어이를 상실했다.


“……그게 대답이야?”

세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다시 한번 반지를 빼라 종용했다.


“이런 식으로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누가 거절한대요?”

“그럼 왜 빼라는 거야?”

미적거리는 강현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세나가 그의 오른 손목을 휙, 낚아채 그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빼버렸다.


“당연히 내가 끼워줘야 하니까요!”

반지를 뺏어 든 세나가 그의 반지를 요리조리 꼼꼼히 살피더니 해사하게 웃었다. 싱그러운 아침처럼 맑은 미소였다.


“잘 들어요.”

그러고는 다시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마디를 스치는 손길이 어찌나 신중한지 야살스러운 감촉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멀스멀 번졌다.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하고 하는 말이니까.”

반지에서 시선을 뗀 세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손을 뻗어 강현의 뺨을 따스한 손길로 감쌌다. 흔들림 없이 두 눈망울엔 강현의 형상이 아른하게 맺혔다.

강현은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몇 시간이고 이렇게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선이 흔들린다.


“류강현 씨.”

두 눈을 어여쁘게 휜 그녀가 당당히 포부를 밝히는 사람처럼 제 이름을 불렀다.

강현이 긴장으로 떨리는 근육들을 이완시키기 위해 숨을 한껏 머금었다.


“사랑해요.”

그 순간 강현은 들이켰던 숨을 다시 뱉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이 말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어서 그래.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하고 뱉는 거야.”


“그럼 나는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하고 뱉을 거예요!”


“그래. 기다릴게. 언젠가 대답해줘.”


“류강현 진짜 짜증 나!”

 
그때 그녀가 언제까지 여유로울 수 있겠냐, 자만하지 말라 경고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입에서 반드시 들을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직접 그 말을 듣고 나니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더 이상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 당신 사랑해.”

한 번 들어보니 자꾸만 듣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인 거 알아?”

겨우 내뱉은 한마디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호흡이 뒤엉켜있었다.


“내가요?”

“그래.”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팠다. 이렇게 뛰다 가슴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들 정도로.


“키스해줘.”

절절 끓는 감정이 가득한 강현의 애원 어린 한마디에 세나가 까치발을 세우며 그의 목덜미에 두 팔을 둘렀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겹친 입술의 말캉한 감촉을 만끽했다. 그러다 넘어오는 숨결을 삼킨 순간 이성은 어이없을 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강현이 거칠게 덤벼들자, 세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강현은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커다란 손으로 등허리를 받쳐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결박하듯 몸을 옭아맨 단단한 팔과 달아오른 호흡은 아무리 닿아도 부족하다는 마음을 대신 표현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또다시 겹칠 때마다 깊게 얽혀들었다.

입 안을 점령한 기운은 흉포하면서도 다정했다.

아침부터 맞이하기엔 지독히 달고 진한 키스였다.

***



“뭐 좋은 거 없을까?”

오랜만에 의사 친구와 통화를 하던 세나가 괜찮은 비타민제나 영양제가 없는지 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데?”

금세 회복할 것 같았던 강현의 컨디션이 갈수록 좋지 않았다.

자꾸만 뭔가 먹었다 하면 소화가 안 돼 답답하다며, 이젠 아예 식사를 샌드위치나 간단한 음식으로 대신했다.

심지어 중요한 미팅을 하다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는 소리를 장철호에게 듣고 놀람을 표했다.

천하의 류강현이 미팅을 하다 졸다니!

세나가 친구에게 대략적인 증상을 전하자, 그녀가 별거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마지막 생리가 언젠데?”

“그건 왜?”

-“몸에는 이상이 없다며. 그럼 답은 하나지. 그 증상이 딱 임신 초기 증상이잖아?”

세나가 웃음을 빵 터트렸다. 남자가 무슨 임신이야.


“나 말고 내 애인이 그렇다고.”

-“그래? 이상하다. 역류성 식도염이나 위궤양도 아니라면 뭐지? 난 네 말 듣자마자 ‘임신이네, 축하한다.’ 하려고 했는데.”

“오래간만에 웃겼다.”

대화를 이어가는 세나의 시선에 탁상 캘린더가 걸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 위로 새겨진 숫자를 헤아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날짜를 눈으로 훑어가던 세나가 헉, 숨을 삼켰다.


-“뭔데? 왜 그래?”

“나 이번 달에 해야 할 날짜를 일주일이나 넘겼어…….”

-“생리?”

“어. 미쳤다. 왜 몰랐지? 원래 따박따박 제날짜에 하는데…….”

-“푸핫!”

“왜 웃어?”

-“말로만 들었는데, 답 나왔네. 네 남편 될 사람이 너 대신 입덧하나보다 얘.”

이번에는 수화기 너머의 친구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

강현은 창을 통해 제 방문 앞을 서성이는 세나를 발견했다.

바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계속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하자.”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덜컥, 불안감이 스쳤다.

강현은 세나를 조심스레 소파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왜 그러고 있었어, 사람 불안하게.”

강현이 세나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자길 좀 보라는 듯 시선을 끌었다.

고민에 잠긴 듯 한참을 말이 없던 세나가 주머니 속의 손을 꼼지락거리다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초음파 사진이네?”

“그 검은색 동그라미 안에 코딱지만 한 게 아기래요.”

“그래? 신기하네.”

“그쵸? 나도 신기해. 내 배 속에 그런 게 들어있다는 게.”

어떤 사건의 증거품인 양 초음파 사진을 살펴보던 강현의 고개가 번쩍 쳐들렸다.


“……뭐?”

“임신이래요. 6주.”

망치로 머리통을 한 대 맞은 것처럼 띵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꼬딱지의 아빠라고?


“와…….”

강현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거리다 외마디 감탄사를 툭, 토했다.

또 다른 의미로 가슴이 뭉클하고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연이어 터지는 탄성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나가 강현을 보았다.


“좋아요?”

세나의 따가운 눈총에도 초음파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현이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선배는 뭐가 그렇게 좋아요? 난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미안.”

그제야 분위기상 일단 사과를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라니. 피를 나눈.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강현은 자꾸만 입가로 번지는 미소를 제어하지 못해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래도 잘 되지 않아 아예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세나가 그런 강현을 흘겨보다 긴 한숨을 토했다.


“배 불러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진 않았는데. 게다가 난 일이 좋아요. 일을 쉬고 싶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녀가 발을 동동 굴리다 아예 두 손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어떡해요? 나 사실 무서워요.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너무 걱정돼. 나 하나 책임지는 건 문제 없는데……. 아이는 다르잖아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세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미안. 네가 불안해할 거란 생각을 못 했어. 일단 하나하나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강현은 세나를 살짝 들어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제 가슴에 그녀의 머리를 기대게 만든 후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몸은 어때? 장 실장님 말 들어보니 임신하면 여간 힘든 게 아니라던데.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지만, 입덧 때문에 고생도 하고 별거 아닌 거에도 예민해진다고 하던데. 괜찮아?”

“그건 이미 다 선배가 해주고 있잖아요.”

“내가?”

“도대체 이 남자는 날 얼마나 사랑하는 건지. 무슨 입덧까지 대신해 줘.”

“대신해 줄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대신해 줄 테니까. 지금은 일단 기뻐해 주면 안 될까?”

“얼마만큼 기쁜데요?”

“네겐 미안한데, 사실 난 너무 좋아. 널 들쳐 안고 사무실 곳곳을 뛰어다니고 싶을 만큼.”

강현이 세나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웅크려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포근한 그녀의 향기가 황홀할 만큼 두 배로 달콤했다.

***

거울 앞에 선 강현이 제 차림을 확인했다. 무늬가 없는 검은색 넥타이가 삐뚤어지지 않게 매만진 뒤 카라 핀으로 고정했다.

거실로 나오자 소리를 죽인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감자 복을 입은 황유라가 포승줄에 묶인 채 버스에 올라타고 있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저런…….”

채성민의 사건 또한 잘 마무리가 되었다.

재판부는 그의 죄를 인정,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채성민의 증거인멸죄가 인정되자, 황유라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황유라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강남 한복판 가로수에 차를 처박은 채로 발견됐다. 약물과 음주 상태였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TV를 끄자, 이른 아침의 고요함이 집 안을 물들였다. 강현은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들어갔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세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강현이 그녀의 말간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귓가에 다정한 인사말을 속삭였다.


“다녀올게.”

배가 불러온 뒤로 부쩍 잠이 많아진 그녀였다. 늦은 출근을 할 그녀를 위해 식탁에는 이미 아침상을 차려 뒀고.

메뉴는 새벽녘에 세나가 자다 말고 일어나 먹고 싶다 중얼거렸던 묵은지 등갈비찜이었다.

빠진 게 없는지 한 번 더 확인 후 강현이 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타자 장철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거죠?”

“네. 지난주에 대충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를 했으니 더 미룰 필요가 없겠죠.”

-“오랜만에 신명 나시겠습니다.”

“나쁘진 않습니다.”

-“그럼. 전 K 로펌을 지키고 있을 테니 류 검사님은 건승하고 돌아오십시오.”

지난주부터 과천의 정부 청사로 출근을 하기 시작한 강현은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저와 손발을 맞춰줄 검사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왔던 사건의 자료들로 화이트보드에 마인드맵을 만들었다.

사건의 개요가 담긴 화이트보드를 보고 선 강현의 듬직한 어깨가 어느 때보다 넓고 당당했다.


“다 왔습니다. 시작하시죠. 류 검사님.”

팀원의 부름에 몸을 돌린 강현이 제 앞의 검사들을 향해 자신감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빛냈다.


“일명 악어새 프로젝트. 오늘부터 내사 들어갑니다.”

첫 번째 타깃은 대검찰청의 차장검사로 임명을 앞두고 있는 고상한이었다.


 
이혼은 쉬운데, 연애는 어렵다.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