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낯선 아침 (119/120)


119화. 낯선 아침
2022.08.20.



 


“박 검사 말로는 윗선에서 압박이 떨어졌나 보더라고요. 그만하면 됐다고.”

일단 걸린 게 처음이다 보니 나쁜 판결은 아니었다. 그러니 검찰 측도 무리해서 항소를 진행하기가 껄끄러워질 것이다.

특히나 그것보다 더 큰 사건이 불거진 이때.


“그 망나니가 집행 유예기간 동안 퍽도 사고를 안 칠까? 동부지검에서는 지금 손 떼는 게 맞는 거죠. 어차피 이쪽에서도 판을 벌여 놓은 게 있으니.”

오후 일과를 시작하기에 앞서 봐야 할 자료를 정리하던 강현은 메스꺼움이 점차 심해지자, 아예 목깃의 단추를 풀어버렸다.

머리가 무겁고 손끝이 차갑게 굳은 느낌이었다.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프다기보단 조금 불편한 거라서.”

강현이 별거 아니란 듯 손을 내저으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1차 공판이 미뤄질 거 같네요. 저쪽에서 추가 기소 내용 준비를 이유로 기일 변경 신청서를 제출했거든요.”

“추가 기소라, 지나가는 개도 짖지 않을 헛소리를 하시네.”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죄를 지었으니 벌해달라 자수한 사람이 있는데, 그 죄를 덮지 못해 안달이 났다.

죄를 인정하자니 황유라가 걸리고, 없던 일로 하자니 전직 장관이 눈에 불을 켜고 있고.

검찰은 지금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 방영 덕에 국민의 시선도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쪽에서는 날짜 조정이 불가하다 통보해 주시고, 허튼수작 부릴 때마다 언론에 자료 하나씩 배포하겠다고 강수를 때리시죠.”

“네, 알겠습니다.”

“얼추 마무리됐으면 일 보세요.”

“아,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김 변호사님이랑 박 변호사님이 한잔 가볍게 하자고 하시던데.”

“저는 빠지겠습니다.”

“네. 안 그래도 그런 자리 잘 참석하지 않는다, 이미 언질해뒀습니다.”

장철호가 나가고 강현은 의자에 몸을 푹 묻었다.

목을 쭉 당겨 느슨하게 만든 뒤 좌우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고는 헤드에 뒷머리를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강현이 눈썹을 꿈틀이다 슬며시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운 게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아주 잠깐. 눈만 감고 있던 것뿐이었는데, 두 시간이나 훌쩍 지나있었다.


“하아…….”

안도의 숨을 길게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하루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까지 컨디션이 최악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네.”

요 며칠 내내 자신이 생각해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갑자기 바뀐 날씨 탓에 감기라도 걸린 건가. 아니면 몇 날 며칠 이어진 철야에 피로가 쌓인 건가.

뭐가 됐든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게 뻔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가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강현은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서류들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집으로 돌아와 따로 소화제를 챙겨 먹었음에도 속이 편치 않았다.

강현은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 바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강현은 살면서 크게 앓아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아프면 저만 손해였으니까.

그래서 이런 식으로 원인도 모르고 시름시름 앓으면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몰랐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얼마나 잤을까, 눈을 감은 채로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메스껍던 속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부스럭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을 뜨자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는 중인 세나가 보였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전등이 그녀의 얼굴을 아른아른 비추고 있었다.

입술을 오므려 앞으로 쭉 내밀고 어두운 조명 아래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몽롱한 기분에 취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강현은 이불 속에서 손을 빼내 책 모서리에 달린 보람줄을 슬그머니 당겼다.

활자에 집중하고 있던 갈색 눈동자가 제게로 떨어진 순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심장 가운데가 쩌릿했다.

눈을 뜨자마자 사랑하는 사람을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언제 왔어?”

“한 시간 전쯤에?”

“왔으면 깨우지.”

“선배가 이렇게 깊게 잠든 거 처음 봤어요.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는데 깨지도 않고.”

“그랬어?”

책을 덮은 세나가 손등으로 까슬해진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보드라워 강현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느른한 숨을 뱉었다.


“퇴근 전에 장 실장님이 알려주셨어요. 아무래도 선배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해서, 약 챙겨서 왔는데 곤히 자고 있길래 안 깨웠어.”

“괜찮다고 했는데……. 걱정했겠네.”

“놀랐어요. 작은 인기척만 느껴져도 눈을 번쩍 뜰 사람인데 깨질 않아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모르겠어. 좀 피곤한 건가. 요 며칠 자꾸 이러는데…….”

“하긴. 선배가 최근 일정이 빡빡하긴 했죠. 아까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죽 사 왔는데 좀 먹을래요?”

강현이 침대에 누운 채 몸을 꿈틀, 베개 대신 세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조금만 있다가. 지금은 이렇게 있자.”

세나가 강현이 제게 좀 더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세워뒀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도 없던 남자였는데…….

그런 철인 같던 남자가 제 무릎을 베고 뺨을 뭉근하게 비벼댄다.

그 모습이 측은한 한편 애틋하게 느껴졌다.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세나는 손가락을 빗처럼 만들어 자는 동안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매만져 주었다. 그러자 허리를 감은 팔뚝이 잠시 경직됐다, 이내 느슨하게 풀렸다.


“이런 기분이구나…….”

강현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냐고, 세나가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자 그가 등을 한껏 부풀렸다 꺼트리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나에게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잖아.”

세나가 강현이 말하던 때가 기억났는지 쿡쿡 소리 내 웃었다.

열도 나고 으슬으슬 몸은 떨리고, 아파죽겠는데 혼자는 또 있기 싫고.

여전히 강현을 의심하고 경계하면서도 그가 떠나는 게 이상하게 싫었던 어느 밤.


“그때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서.”

애정과 걱정 어린 시선이 제게 따라붙을 때마다 괜스레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나를 봐줬으면.

이렇게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거려줬으면 했다.

약해진 나를 어루만지는 시선이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유치한 심리.

강현은 세나가 아플 때만큼은 아무리 바빠도 꼭 그녀의 곁에 있어 주겠다, 다짐하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강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방 안.

커튼을 치지 않은 창 너머로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강현은 이불이 바스락거리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제 옆엔 모로 누운 채 잠이 든 세나가 있었다.

사귀게 된 후로 서로의 집에서 잠을 자는 날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바쁜 일상에 치여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실상은 혼자 잠에서 깨는 날이 더 많았다.

수없이 많은 밤을 혼자 보냈고, 혼자 아침을 맞이했던 게 훨씬 익숙할 텐데…….

이렇게 한 번씩 세나와 함께 밤을 보내고 나면 그녀 없이 혼자 아침을 맞이하는 게 낯설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침대맡에 가만히 앉은 강현은 한참을 말없이 잠이 든 세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같이 살면 얼마나 더 좋을까.

강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둥그런 이마 선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진 콧날. 양쪽으로 초승달같이 어여쁘게 휜 눈썹. 그리고 기다란 속눈썹 아래 감춰진 맑은 눈동자를 그려보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세웠다.

때마침 몸을 뒤척이던 세나가 베개 위에 모아둔 두 손 중 하나를 뻗어 옆자리를 더듬거렸다.

빈자리가 느껴져서일까, 미간 사이에 자잘한 주름이 잡히더니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가물가물하던 눈동자가 깜빡임 몇 번에 따사로운 빛을 띠었다.


“세나야.”

머리 위로 떨어진 나직한 목소리에 세나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잠결에 찌푸려졌던 얼굴은 강현을 발견하고는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강현은 마음속에 꾹꾹 눌러 왔던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결혼할까?”

사실 강현은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이 4번 바뀌기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면 말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지 1년이 되었고, 그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나는 바뀌지 않고 계속 너를 사랑해왔다고.

그러니 절대 내가 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이쯤 간 봤으면 그만 싱거워지기 전에 나랑 같이 살자고.

애써 준비한 말들은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지금만큼 제 진심을 표현할 말들은 아마 없을 테니.

강현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세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 만에야 열린 그녀의 입에서 잔뜩 잠긴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응.”

“자다가…… 갑자기……?”

“응. 자다가 갑자기.”

“왜?”

“네가 없는 아침이 낯설고 싫어서.”

“나도 그런데 당신도 그랬구나…….”

그 후로 몇 번 더 끔뻑거리던 눈꺼풀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감겼다.

잠시 뒤 고롱고롱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기대했던 대답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벙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잠들어 버린 그녀를 바라보다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기세나.”

소리를 죽여 웃던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바심 나게 만드는 재주가 남달라요.”

잠결에라도 허튼 대답은 일절 하지 않는 그녀의 얄짤 없음이 미치도록 좋았다.

잠시 뒤 바닥을 딛고 일어난 강현이 침실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민트색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다시 침대맡에 앉은 강현이 상자를 열었다. 그러고는 세나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민트색 상자 속 까만 벨벳 사이로 두 개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금으로 만든 한 쌍의 반지가 영롱한 빛을 뽐냈다.

테두리에 작은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힌 반지를 강현이 세나의 약지에 살며시 끼웠다.

눈대중만 보고 제 새끼손가락에 맞춰 샀는데, 그녀의 사이즈에 딱 맞아떨어졌다.

반지는 상자에 담겨있을 때보다 세나의 손가락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강현은 그윽한 눈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응시하다 그 위에 제 입술을 묻었다 떼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됐네. 이렇게 반지까지 끼웠으니.”

잠에서 깨어난 세나가 제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발견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진다.

강현은 옆으로 누워 세나를 마주 보았다.

이제 밤과 아침을 매일 함께 할 수 있길.

그가 세나의 허리를 팔로 감싸 품 안에 쏙 가두었다.

***



“선배!! 이거 뭐예요?!”

세나가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리도 하지 못하고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세안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얼굴엔 미처 닦지 못한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휘둥그레지게 뜬 채였다.

강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일별한 뒤 수건을 들고 다가갔다. 그리고 보드라운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의 물기를 톡톡 닦아주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 이거, 이거 뭐냐구!”

세나는 자꾸만 제 앞을 가리는 수건을 멀찌감치 치워버리고 강현의 앞에 활짝 펼친 손을 들이밀었다.


“뭔 거 같은데?”

“반지잖아요!”

“잘 알면서 뭘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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