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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능지처참(陵遲處斬) (118/120)


118화. 능지처참(陵遲處斬)
2022.08.16.


장마와 무더위가 이어지던 계절 끝에 녹음을 뽐내던 가로수들은 제 모습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며칠째 강현의 집무실 앞 복도엔 염탐꾼들이 끊이질 않았다.

외부 일정이 많은 기장수는 복도를 오갈 때마다 강현의 집무실을 비추는 창가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발걸음을 떼었다.

처음 몇 번은 고개를 들고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게 되었다.

기장수가 눈빛으로 뭔가를 전달하려 시도하는데,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창에 머리를 들이미는 장철호는 또 어떻고.

소식을 전해 들은 뒤부터 그는 뭔가에 삐진 사람처럼 방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한숨만 푹푹 쉬다 사라졌다.

지금도 어찌나 흉흉한 기운을 풍기며 저를 노려보는지.

장철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강현은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어버렸다.

중요한 서류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 계약서였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강현은 복도 쪽 블라인드를 쳐버렸다.

근래 들어 두통이 조금씩 생기더니, 관자놀이를 콕콕 쑤시는 통증이 약을 먹어도 쉬이 가시질 않았다.

딱히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경우 대개 의사들은 말한다.


“스트레스성입니다. 웬만하면 담배 끊으시고 술은 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담배는 끊은 지 벌써 몇 개월이고, 술은 굵직한 사건 하나를 끝내고 회식 차원에서 마신 것 말고는 없었다.


“음…….”

이번에는 뒷덜미에서부터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이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선배 어디 아파요?”

시원한 기운이 강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세나는 제 이마를 한번 짚어 열을 재더니 다시 강현의 이마를 짚으며 자신의 체온과 비교를 했다.

그녀가 들어온 줄도 모를 만큼 지끈거렸던 머리가 그녀의 시원한 손길에 눈 녹듯이 사그라졌다.


“이제 괜찮아. 언제 왔어? 상담은 끝났어?”

강현이 상체를 뒤로 물려 의자에 깊이 묻었다.


“막 끝나서 바로 왔죠. 노크했는데, 대답도 없고. 혹시나 해서 문을 열었더니 선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잖아요. 깜짝 놀랐네.”

세나가 테이블에 엉덩이를 기대고 섰다. 그를 살피는 눈초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강현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재차 괜찮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블라인드는 왜 쳤어요?”

“아-.”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끝까지 내려진 블라인드가 평소와 조금 다른 모양새였다.


“그거 알아? 산길에 달리는 자동차가 가장 위험한 순간.”

“밤에 비도 오는데 가로등도 없을 때?”

“뭐 그때도 위험하긴 하겠지.”

“그럼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드는 야생동물. 특히 멧돼지.”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는 차량 앞으로 뛰어드는 멧돼지만큼 위험한 게 없다.

장철호의 눈빛이 딱 그랬다. 느닷없이 나타나 언제고 들이박겠다는 포악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게 블라인드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 블라인드는 어디까지나 예방책이지. 일종의 바리케이드 같은 거야. 멧돼지로부터 날 보호하려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어. 배고프겠다. 빨리 나가자. 멧돼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낯을 살짝 찌푸린 세나의 어깨를 감싼 강현이 재빨리 방을 나섰다.

높다란 빌딩 사이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플랜테리어가 돋보이는 루프톱 온실이었다. 각양각색의 초록 잎들이 테이블 사이사이에 어우러져 있었다.


“분위기 너무 좋다. 그쵸? 꼭 식물원에 온 것 같네.”

“그러네.”

“다음엔 저녁 먹으러 올까 봐요. 저기 좀 봐, 지금도 너무 예쁜데, 노을에 물든 하늘도 되게 예쁠 것 같아요.”

안내받은 자리로 걸어가는 내내 세나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기 전까지도 그녀의 재잘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무덤덤하기만 강현도 간간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럴 때마다 배시시 웃으며 제 반응을 살피는 세나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두툼한 크기의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든 세나가 가니시로 나온 구운 버섯을 반 토막 잘라, 입 안으로 쏙 밀어 넣고는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세나의 고개가 갸우뚱, 잘 그려진 눈썹이 위로 휘었다.


“음. 버섯도 잘 구우면 고기 맛이 난다던데……. 잘 모르겠어요.”

“왜 이번 의뢰인이 채식주의자야?”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혼 상담하러 온 거였어요. 남편은 육식 파. 아내는 페스코. 같이 밥을 먹을 때마다 싸운대요.”

“페스코?”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 채소만 먹는 건 아닌가 보더라고요. 육류를 제외하고 어패류는 먹는 쪽은 페스코, 비건, 락토, 오보, 뭐가 많던데. 암튼. 식습관이 너무 안 맞아서 이혼하고 싶다고 왔더라구요.”

“결혼 전엔 상대의 식습관을 몰랐나?”

“원래는 아내가 플렉시테리언이라고 가끔 육식을 겸한 채식주의자였는데, 결혼하고 나서 닭고기까지 싹! 아예 메뉴에서 제외한 거죠.”

“그래서?”

“제 의뢰인은 남편 쪽인데, 아내는 이혼을 거부. 자신의 신념은 굽히지 않으면서 남편 쪽에 채식을 강요하는 상황이라.”

“종교 강요 같은 그런 문제랑 비슷한 건가?”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죠. 사실 이런 문제로 종종 이혼 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같이 살게 되면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예고도 없이 마주하게 되니까.”

세나가 포크로 스테이크의 한 부분을 푹 찍더니 나이프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 사르륵 녹아 사라지는 안심 스테이크는 꿀맛이었다.


“대부분의 이혼 사유는 거창하다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에요. 그로부터 감정이 상하고, 그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결국엔 서로를 할퀴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연이어 말을 하면서도 칼질을 멈추지 않는 세나를 향해 강현이 물었다.


“너는?”

“네?”

“너는 어떤데?”

“음. 저는 오무(五無)요. 딱 오무만 아니면 돼요.”

“오무?”

“자고로 내 남자라면 이것만큼은 하면 안 된다! 뭐 그런 거예요.”

“그게 뭔데?”

“보증, 도박, 폭력, 주사 그리고 바람.”

강현은 기가 차서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속이 답답했는데, 더 답답해지는 느낌에 물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도대체 그동안 어떤 놈들을 만나고 다닌 거야……?”

“아직까진 보증, 도박, 폭력이 있는 놈들은 안 만나봤어요. 주사는 부리는 그날 길바닥에 버렸고, 바람은 뭐 선배도 익히 아는 사람.”

“…….”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헤어질 때 매달린 적 없고, 가차 없이 차버렸다니까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짓거리를 하는 새끼들을 만나지 말았어야지!

강현은 갑자기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어릴 적엔 한번은 눈감아 준 적도 있는데, 결국 이 오무에 해당하는 행동들은 습관이더라고요.”

그래. 지금 와서 다 끝난 연애사를 들먹여 잔소리할 거 뭐 있나, 싶다가도 또다시 울컥했다.


“하아…….”

“혹시 질투?”

질투 같은 소리 하네.

기세나가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그럴 일 없을 거야.”

“뭐가요?”

이번엔 정말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널 두고 바람피울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분에 겨워 주제도 모르고 멍청한 짓거리를 한 놈들은 이제 잊어.”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던 세나가 피, 하고 귀여운 콧소리를 냈다.


“물론 네가 바람피운다면 또 일이 달라지겠지만.”

강현을 향했던 눈동자가 또르르 다른 쪽으로 굴렀다. 그녀의 광대가 씰룩거리다 입가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린다.


“어떻게 되는데요?”

“왜?”

“궁금하잖아요. 선배라면 바람피운 여친 어떻게 할지. 상상이 잘 안 가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시도해 봐.”

형이 너무 잔인해 고종 때 폐지됐지만, 예로부터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이 있다.

주로 대역죄나 패륜을 범한 자에 가하는 극형.


“그리고 보면 되겠지. 네 눈으로 직접. 너랑 바람피운 새끼가 능지처참당하는 꼴을.”

그러더니 나이프를 들고 스테이크를 무참하게 썰기 시작했다.

두툼한 고기가 단칼에 썰리고, 하얀 접시 위로 육즙과 함께 선홍빛 핏물이 번졌다.

나이프를 쥔 손등에 뼈대가 도드라지고 힘줄이 불거져있었다.

손목의 시계가 햇살에 반짝이고, 세나의 시선이 하얀 와이셔츠를 따라 넓은 어깨에 걸렸다가 수려한 그의 얼굴에 안착했다.

고기를 씹는 턱은 강인한 힘으로 불끈댔다. 곧이어 꿀꺽, 목 넘김 소리와 함께 목젖이 크게 일렁거렸다.

불현듯 등골을 오싹 스치는 기운에 순간적으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와, 소름. 이 기시감. 뭐지?”

“무슨 소리야?”

“나 이 장면 꿈에서 본 것 같아요.”

그때 어떻게 됐더라? 그의 무자비한 칼질에 난도질당했던 것이 저 스테이크가 아니라 나였던가?

세나가 어깨까지 부르르 떨며 팔뚝을 쓸어내렸다.

***



“아니, 정말 안 하실 겁니까?!”

바리케이드를 쳐놨더니 이제 아예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성화였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딨다고! 그 능구렁이 새끼 아주 작살을 낼 수 있는데?!”

“생각 중이라고 했잖습니까.”

“생각하고 자시고가 어딨어요? 어차피 눈 딱 감고 2년. 길면 3년인데!”

버럭 성을 내던 장철호가 미적지근한 강현의 태도에 답답함을 표하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내려쳤다.

큼지막한 주먹이 가슴을 두드릴 때마다 쿵쿵 북소리가 났다.

답답한 건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먹은 스테이크가 얹힌 것인지 속이 더부룩했다.

평소보다 먹지 못했는데도 요즘 들어 뭐만 먹었다 하면 체한 듯 메스껍기까지 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러고 보니 강현의 안색이 조금 파리했다.


“생전 어디 아픈 적이 없던 사람이 얼굴이…….”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에 몇 시간 동안 밖에서 일을 볼 때도 감기 한 번 앓은 적이 없는 사람이 바로 류강현이었다.

그런 그가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앉더니, 목을 옥죄는 넥타이부터 끌어 내렸다.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두통?”

장철호는 터트리려 했던 분통을 잠시 내려놓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 조금 체한 것 같아서요.”

“그러게. 신경 쓰이는 일을 만들어 놓고 해결은 안 하니, 먹는 족족 체하는 거잖아요.”

‘그런 이유로 체할 위장이라면, 검사 생활하는 내내 위에 구멍이 뚫려 피를 토했을 겁니다.’ 하고 말을 덧대고 싶었다.

그러나 장철호의 반응을 보니 뭐라도 딴지를 걸고 싶어 하는 눈치라 말을 아꼈다.


“얼굴색이 영 안 좋은데, 약이라도 사다 드려요?”

“괜찮습니다.”

“어휴…….”

“그건 그렇고, 염탐만 하고 가시다 들이닥치신 거 보니 박 검사한테 소식을 들었나 보군요.”

“네. 판결 났다고 연락 왔더라구요.”

대호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질질 끌어 흐지부지하게 만들려던 계획을 철수.

단순 투약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황 씨 측에서 일부 혐의를 인정했다.

황 씨가 혐의를 인정하자 재판은 빠르게 진행됐다.


“고작 벌금 8천만 원, 추징금 2천만 원이라니. 집행유예도 1년 6개월밖에 안 나온 게 말이 됩니까?!”

어차피 집행유예를 받을 줄은 진작에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벌금이 생각보다 과했다.


“벌금을 세게 때리는 걸로 형량 합의를 봤나 봅니다. 황유라에게 일억이 돈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검찰은 항소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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