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내 사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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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내 사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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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내 사위야!
2022.08.13.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러운 제안일세.”
“그 말씀은…….”
“난 자네를 내년에 임명할 공수처 검사로 추천하고 싶네.”
강재문의 제안에 놀란 건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기장수 역시 만만치 않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자네가 검찰직을 내려놓기 전부터 법무부에서 자네를 주시하고 있었네. 법제처도 마찬가지였고.”
“…….”
“자네의 이력을 보고 법무부에서 내게 묻더군. 어떤 사람인지. 알다시피 공수처가 출범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아직 제대로 자리조차 잡지 못했네.”
이번엔 강현이 입을 다물었다.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는 그의 얼굴 위로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검찰 집단들이 암암리에 행하는 일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옷을 벗은 거 아닌가?”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벌인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 자리에 어울릴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꼭 거창한 개혁을 바라고 하란 말이 아닐세.”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인 만큼 그 수사에 임하는 검사들 역시 범죄 이력이나, 주변의 인물들과의 관계를 따로 조사당한다.
조사 결과 검사 시절 강현은 특별한 라인도 없었고, 수사 실적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번 대호 그룹 사건도, 자네 그림이었다지?”
현재 대호 그룹의 황 씨 일가 사건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 뒤에 류강현이 있다는 소식은 전직 법무부 장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오랜 시간 고여서 썩은 뿌리는 주변의 뿌리까지 썩게 만들지. 그건 비단 약만 쳐서 되는 일이 아니네.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지.”
“교수님.”
“그 뿌리를 다 도려내달라고 하진 않겠네. 다만 어디가 어떻게 썩었는지만, 딱 거기까지만 해줄 순 없겠나?”
“…….”
“신중한 제안인 만큼 지금 당장 가타부타해 달라는 건 아니네만, 그렇다고 바로 거절부터 하진 말게.”
강현은 뜻하지 않은 고민에 잠겨 잠시간 말을 잃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나는 왜 이 자리에 불렀어?”
기장수가 그런 강현의 반응을 곁눈으로 살피며 끼어들었다.
“일단 류 변호사가 자네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네가 나보다 사람 보는 눈이 더 나으니까. 그래서 함께 보자 한 거지.”
“나 참. 이거. 곤란하게 됐네. 류 변호사가 지금 우리 로펌의 기둥인데, 그 기둥을 뽑아가겠다는 소릴 이렇게 태연하게 하다니. 쯧.”
“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네에게 먼저 알리지 못한 건 미안하네.”
만약 강현이 공수처 검사로 가게 되면 K 로펌의 대표인 기장수 역시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강현에게 가해지는 검찰의 견제를 막으려면, 공수처로 자리를 옮기는 것 또한 좋은 수였다.
현재 상황과 그의 성정을 보았을 때, 공수처 검사가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류강현은 썩은 뿌리를 도려낼 삽으로 제격이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지금 여기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인이 아닌 듯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의 고민을 이해한다는 듯 강재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찬찬히 생각해보고 답을 주게나. 모쪼록 긍정적인 답이었으면 하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탓에 시계를 확인한 강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할 듯한데 두 분은 어쩌시겠습니까?”
“우린 할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으니 먼저 가게.”
강재문이 만나서 반가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강현이 그의 손을 맞잡고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무리했다.
강현이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지자 강재문은 참았던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상황이 안 좋아.”
“그거야 뉴스를 보면 다 아는 사실이고.”
“오죽하면 법제처에 있는 나에게까지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하겠어.”
“…….”
“류 변호사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야.”
“까딱하면 되레 탈탈 털릴 수도 있지. 검찰에서 가만히 놔두겠나? 자기네 뒷주머니를 뒤지겠다고 하는 사람을.”
“거기에 휘둘릴 인물이었다면 이런 자리를 제안도 하지 않았겠지.”
“그건 그렇지.”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도 남달랐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나한테 류 변호사를 설득하란 말은 하지 말게. 나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니까.”
“그럼 다른 건 괜찮나?”
“다른 거 뭐?”
평소 남에게 부탁이라곤 일절 안 하는 친구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니 문득 궁금해졌다.
“그 류강현 변호사 만나는 사람은 있나? 자료에 의하면 아직 미혼이던데.”
“그건 왜 물어?”
“내 딸을 소개해 주면 어떨까, 해서.”
“뭐?!”
기장수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의 반응을 오해한 강재문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주선해 달라 하는 거 아니야. 처음엔 공수처에 넣을 인물로만 살폈는데, 이렇게 보니 또 내심 다른 욕심이 생겨서 하는 말이니까.”
“누구 맘대로?!”
“아니, 그럼 어떨까 하는 건데 다짜고짜 왜 화를 내? 성질머리하고는.”
“내 사위니까! 어디 넘볼 게 없어서 친구 사위를 넘봐?!”
“뭐??”
말도 해주지 않고 화부터 버럭 낸 기장수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던 강재문은 이제는 황당해서 기가 찰 지경이었다.
“내 사위야. 내 사위!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찜해놓은 내 사위라고. 조만간 국수 먹여줄 테니까, 맘 접어!”
그럼 그렇다고 말로 하면 되지, 뭐 저리 테이블까지 쾅쾅 내려찍으며 할 말인가?
“정말이야?”
“그래! 내 딸이랑 아주 죽고 못 사는 사이야.”
“흠……. 아깝게 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연락해 볼 것을.”
“암튼. 허튼수작 부리지 마. 친구 사이 멀어지기 싫으면.”
얼굴을 붉히며 조바심까지 드러내는 모습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강재문은 기장수의 반응이 재밌어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참아주기로 했다.
***
“공수처요?!”
강현의 어깨에 기대있던 세나가 동그란 머리통을 번쩍 들어 올렸다.
커다랗게 홉 뜨인 눈동자엔 온갖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제안 받아들일 거예요?”
“글쎄…….”
“왜요? 왜? 선배가 하고자 하는 일이랑 딱 부합되잖아요. 부정부패 척결!”
“내가 하려는 일은 그런 거창한 사명감이 있는 게 아니야. 난 단지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게 싫어서일 뿐이지.”
강현이 세나의 팔을 잡아 다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은 그런 대화보다 샴푸 냄새가 폴폴 나는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고 후희를 즐기고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귓가에 걸어주며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목덜미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그 아래로. 은밀한 접촉이 조금씩 강도를 더해갔다.
그렇게 손길이 뭉근하게 이어지면, 간지럽다고 콧소리를 낼 때가 됐는데…….
이상하게 세나의 반응이 무덤덤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미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작게 혀를 찬 강현이 다시 위로 올라와 그녀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놓았다.
“지금 나만 불타오르는 거야?”
“그냥요. 생각하고 있었어요.”
“무슨 생각?”
“‘공수처 검사 류강현’은 어떨까? 하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거절하긴 아까운 제안이잖아요. 아무한테나 오는 기회가 아닌데.”
강현이 생각에 잠긴 세나의 뺨을 살며시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콧잔등, 뺨에 쪽쪽쪽,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눈을 맞췄다.
장난기가 지워진 눈동자가 그윽하니 깊어져 있었다.
“기회일지 독일지는 아직 몰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자리라.”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검사직에 임하는 동안 K 로펌 파트너 변호사직은 사임해야 한다.
매일 아침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강현에겐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세나의 생각은 거기까진 미치지 않은 듯 보였다.
“그치만 뭐랄까, 선배랑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에요. 뭔가 섹시해.”
세나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고민되네. 기세나한테 섹시하게 보이고 싶은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 목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선배 앞에선 쪽도 못 쓸 거 아니에요?”
“공수처는 비리를 수사하는 부처지, 권력을 휘두르는 부처가 아니야.”
“누가 몰라요?”
“모르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지금 당장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내버려 두고 딴생각에 잠겨있는 거지.”
강현은 제 가슴팍에 올려진 세나의 손을 잡아 아래로 이끌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고 싶으면 나부터 좀 휘둘러 주면 안 될까?”
세나는 제 손바닥에 닿는 뜨거운 온도에 말간 뺨을 붉혔다. 그리고 아직 자신들이 대화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선배. 나 좀 진지한데…….”
“나도 진지해.”
“하아, 진짜.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런 엄청난 제안을 받고도 이렇게 태평하게 굴 수 있는지. 그런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거예요.”
세나가 눈매를 잔뜩 좁히며 귀엽게 흘겨보자 강현이 그녀의 눈두덩에 또다시 입을 맞췄다.
“눈빛 하나만으로 날 휘두를 수 있는 여자도 너밖에 없을 거야.”
이윽고 말캉하게 젖은 입술이 맞물리자, 아찔하리만큼 달콤한 숨결이 교차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숨소리가 농밀해졌다. 그렇게 서로가 얽혀있을 때 사이를 넘실넘실이는 쾌락이 있었다.
“기세나.”
“……으응.”
“이렇게 너와 살갗을 부닥치고 체온을 맞대는 것도 좋아.”
“나도요.”
강현이 내뱉는 더운 숨에 세나의 머리칼이 나풀나풀 흩어졌다.
곧이어 강현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세나의 손등을 넘어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얽혀들었다.
시트 위를 누르는 겹친 두 손 아래로 주름이 잡혔다.
강현의 가슴이 세나의 등 위를 무겁지 않게 짓눌렀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처럼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그 순간 맞닿은 부위로 찌릿한 전율이 서로의 몸을 관통했다.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는 동안에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세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웃자, 강현이 입꼬리만 끌어올려 따라 웃었다.
“가끔 선배는 꼭 안달 난 사람처럼 달려들더라.”
“네가 주는 모든 게 좋아.”
“나도 당신이 주는 모든 게 좋아요…….”
강현은 제 손아귀에 잡혀있는 그녀의 손을 당겨와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너와 손을 맞잡고 있을 때, 우리 사이로 스며드는 안온한 감각도 정말 좋아해.”
“나도. 나도 좋아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곧이어 고롱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삭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 복도 너머로 들리는 너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가끔 일부러 문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도.
바쁘게 굴러가는 일상에서 스치듯 마주하는 너의 미소가 내 어깨에 내려앉은 피곤함을 단박에 날려버린다는 것도.
아침에 출근해서 나누는 인사와 퇴근길 함께 오르는 짧은 데이트가 여전히 아쉽다는 것도.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전부 너라는 것도, 눈치 없는 너는 아마 모를 테지.
나는 네가 주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아직 많이 모자라 더 갖고 싶은데.
그래서 그런 자리 따윈 필요 없다고 한다면 너는 웃을까 아니면 미쳤다고 소리를 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