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이제 저 받아주시죠 (116/120)


116화. 이제 저 받아주시죠
2022.08.09.



 


“그날 일,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모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요.”


“이해합니다.”

 
강현은 유리잔을 쥐고 있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두 손을 맞물려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긴장감에 손바닥 사이로 땀이 배어났다.

윤모연이 우아하게 눈가를 휘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좋아해요?”


“네?”

 
딱딱하게 굳은 강현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와 똑같은 얼굴과 태도로 그를 대했다.
 


“음식 뭐 좋아하냐고요.”


“아, 전 다 잘 먹습니다.”


“그럼, 조만간에 또 놀러 와요. 맛있는 거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윤모연은 강현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이었다.

취미는 뭔지,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별거 아닌 물음들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는 순간에도 강현의 머릿속은 바쁘게만 돌아갔다.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불쑥,
 


“외롭진 않았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허를 찔렸다.
 


“키워준 분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그늘이라는 게 있으니까.”


“…….”

 
강현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윤모연이 말하는 그늘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그늘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세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묻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이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고요한 눈동자가 다른 어떤 선입견도 없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외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상대의 외로움을 알아본다고 했어요.”


“…….”


“이런 말 실례일지 모르지만, 강현 씨가 내 딸을 외롭게 만들지 않을 사람이란 게 내 눈엔 보였어요.”


“…….”


“앞으로도 세나, 많이 사랑해줘요. 되도록 오래. 외롭지 않게.”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있던 강현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윤모연의 당부에 오늘 그녀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네. 어머님.”

 
다른 것도 아닌 그것이라면,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잘해 낼 자신도 있었다.

대표실로 가는 길 강현은 세나의 집무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녀는 오늘 오전 오후 모두 법원에서 스케줄이 있어 자리에 없었다.

창 너머로 주인 없는 방을 들여다보며 강현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읽은 글귀가 있었다. 강현은 그 글귀를 보자마자 머리와 마음에 새겼다.

어두운 시절 남이 내 곁을 지켜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해가 지면 심지어 내 그림자도 나를 버리기 마련이다.

시리아의 법학자, 이본 타이마야의 말이었다.

어릴 적엔 그것이 제 외로움에 빗대어 와닿은 글귀란 걸 몰랐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됐을 때쯤에서야. ‘아. 내가 참 외롭게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달라져야겠다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제 어둠을 지켜줄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만 같다.

대표실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안쪽에서 열렸다. 강현을 맞이한 김정한 비서가 그를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김정한은 숙련된 비서답게 강현이 방문할 시간에 맞춰 다과를 준비했고, 접객용 테이블에 이미 그것을 세팅해 두고 나오는 길이었다.


“커피보다는 따뜻한 차가 좋을 것 같아 카모마일로 준비해봤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할 일을 다 한 김정한은 조용히 문을 닫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앉게.”

기장수가 강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강현은 자리에 앉기 전 허리를 숙여 사과의 말부터 전했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됐네. 자네를 우리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데려왔을 때부터 이런 일이 언제고 한 번쯤 일어날 거라 예상했었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 면목이 없습니다.”

“오란 곳도 많았던 자네가 K 법무법인을 선택한 이유가 이런 일에 휘둘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그의 말이 맞았다.

강현이 다른 곳도 아닌 K 법무법인을 선택한 이유.

다른 법무법인들에 비해서 변호사들의 이직률이 낮고, 내실이 탄탄했다.

큰 태풍이 불어닥쳐도 그들을 이끄는 수장의 노련함이 있다면 뱃머리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넨 K 법무법인 사람이고 그 말은 즉, 내 사람이란 소릴세. 내게는 내 사람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이사진들은 K 로펌의 새로운 수장으로 류강현을 밀고 있었다. 그들의 말에 기장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세나의 말대로 류강현만 놓고 본다면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어화둥둥 춤판을 벌이고 쾌재를 불러야 하는데…….


“나도 많이 늙었나 보군. 자꾸 쓸데없는 근심만 느는 걸 보니.”

“조금 전 호통치실 때 뵈니 여전히 기백이 넘치시던데, 당장 현역으로 뛰셔도 될 것 같았습니다.”

“어디 자네만 하겠나.”

“저는 이제 겨우 발돋움했을 뿐입니다.”

기장수는 진득한 눈길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시종일관 진중한 태도로 대화에 임했으나, 말투에서 묻어나는 자신감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실리를 따졌지만, 서로가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잘 마무리 할 줄 알았다.

본인을 평가함에 있어서 누구보다 객관적이었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남달랐다.

기장수는 류강현을 보자마자 자신의 로펌으로 꼭 데려오겠다, 마음을 먹었었다.

이제 와 그의 과거를 알았다 한들, 그의 잘못도 아닌 일로 책임을 묻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자네…….”

“네.”

“그. 저기, 그 말일세.”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어렵사리 운부터 떼어보았다.


“그 말이 사실인가?”

“어떤 말씀이신지.”

“그거. 그거 말일세.”

강현이 알아듣지 못하자 답답한 기장수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세나가 자넬 데리고 나가서 새로운 로펌을 차리겠다! 날 협박한 건 알고 있나?”

“아-.”

“자네도 동의한 바고?”

“음.”

강현이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자, 기장수는 느긋하게 기대있던 상체를 벌떡 세웠다.


“내가 자넬 내 사람으로 여기는데, 설마 그 말에 동의를 한 건 아니겠지?”

설마 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K 로펌으로선 큰일이 난 셈이었다. 기장수로서는 더는 체면만 내세우고 있을 수 없었다.


“내 딸과의 일은 사적인 일이고, 로펌의 일은 공적인 일이지. 자네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는 그런 사람 아니지 않는가!”

강현은 명제가 없이 던져진 말의 뜻을 비로소 눈치챘다.

아마도 기장수의 입장에선 대놓고 반대한 적은 없으니, 이제 와 다시 만나라 할 수 없을 터였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대표님의 결정에 달린 것 같습니다.”

“류강현 변호사! 자네 이럴 건가 정말?!”

“대표님.”

로펌 대표로서의 입장도,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세워주기 딱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제가 기세나 변호사를 많이 사랑합니다.”

“난 그걸 물은 게 아니네만…….”

강현의 대답에 기장수는 마지 못한 척,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기적이게도 저는 그 사람을 만나 행복한데, 그 사람도 행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 딸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해도 모자랄 판에 장담을 못 하겠다는 소리나 해대다니.

참 입에 발린 소리 하나 못 하는 게 안타까워 기장수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평생 외롭진 않게 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강현이 뱉는 말엔 힘이 있고, 믿음이 간다. 허튼소리는 절대 하지 않고, 제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키리라, 는 믿음.


“그러니 이제 저 받아주시죠. 로펌 사람 말고, 대표님의 사위로.”

“…….”

강현과 한참을 시선을 맞대던 기장수는 이렇다 할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잔에 가려진 입꼬리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렸다.

강현도 같은 모양의 찻잔을 들고 조용히 카모마일 티를 음미했다.


 


“큼. 그건 그렇고, 자네 강 교수랑은 잘 아는 사인가?”

강 교수라. 강 씨를 달고 있는 교수가 한두 명도 아닌데……, 하던 차 누군가 떠올랐다.


“혹시 강재문 교수님이라면, 대학 다닐 때 은사님이십니다. 법조 윤리학을 가르치셨는데.”

“거참, 그 친구가 나랑 막역한 사이인데 얼마 전 갑자기 연락이 왔어. 자네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던데.”

“저도 졸업하고 나선 찾아뵙질 못해서……. 혹시 무슨 연유 때문인지 아십니까?”

기장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장수도 무슨 일 때문이냐 물었지만, 강재문은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니. 일단 만남을 주선해달라고만 하더군.”

십 년 만에 갑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무엇일까. 강현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지만, 딱히 감이 오질 않았다.


“강 교수님 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한번 연락드려보겠습니다.”

“괜찮다면 같이 저녁을 먹지. 안 그래도 나도 그 친구를 만날 때가 됐어. 시간 언제가 괜찮나?”

 

***

강재문 교수와의 만남 장소는 강현과 기장수가 종종 점심을 함께했던 일식집이었다.

세 사람은 마주 보고 앉아 식사와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오랜 친구 사이에서 흔히들 나누는 사담이었지만, 강현은 기장수 옆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강현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강재문이 입을 열었다.


“자넨,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군.”

“교수님이야말로 여전하십니다. 지난번 동문회 때 오셨다 들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나도 자네가 올 줄 알았으면 자리를 지키는 건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뭐해서 금방 돌아간 게지.”

“류 변호사가 꽤 아끼던 제자였나 봐. 이렇게 내게 따로 연락해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란 거 보니.”

“눈길이 가는 제자였지. 가르쳐 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수업이 좀 지루해야지. 요즘 학생들은 판례나 법 조항들이나 줄줄 외울 줄이나 알았지, 그 법이 왜 만들어지고, 그 속에 어떤 비극과 희망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으니 말이야.”

강현은 그런 학생들과 달랐다.

출석 체크를 따로 하지 않는 수업이었지만, 빠진 적도 없거니와 이해도가 남다르고 제출하는 과제 또한 완벽했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로 시작했던 강현의 과제는 법을 오랫동안 연구한 강재문의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그건 법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재문의 입에서 강현에 대한 칭찬이 마르지 않자, 보다 못한 기장수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더러 젊은 사람들이 꼰대라 부르는 거야.”

“꼰대 맞지 뭐. 너나 나나. 참 세월이란 게 야속하단 말이야. 우리한테도 열정과 패기가 넘쳤던 젊은 날이 있었는데 말이야.”

“서론은 이만하면 됐고, 본론이나 시작하게. 바쁜 사람 불러놓고 추억담만 늘어놓고 끝낼 게 아니라면.”

기장수가 직원을 불러 식사가 끝난 테이블을 정리했다.

말끔해진 테이블 위로 다과상이 차려지는 동안 강재문은 자신의 머릿속을 정리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에 들어왔던 직원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가 한 톤이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류강현 변호사. 자넨 공수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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