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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같잖은 수작질 (115/120)


115화. 같잖은 수작질
2022.08.06.



 
이건 또 무슨 같잖은 수작질인지.

강현은 서정연이 내민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 드는 대신 그녀를 차갑게 일별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검찰 마크가 찍힌 파란색 상자를 들고 선 이들을 마주했다.

그녀의 뒤에 우르르 서 있는 대여섯 명의 장정 중 절반 이상이 강현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나직한 저음으로 뚝 떨어지는 강현의 인사말에 다들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하거나, 불편한 기운을 애써 감추며 고개만 까딱였다.


“압수 수색을 진행해야 하니 이만 비켜주시죠.”

서정연은 제 앞을 막고 선 강현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말했다.

그녀의 요구에도 강현이 고고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서정연이 눈썹을 크게 휘며 목청을 키웠다.


“류강현 씨. 지금 법원의 명령을 무시하는 건가요? 공무집행방해죄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싶지 않으면 비키세요!”

“류강현 씨라…….”

강현이 짧게 읊조리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나 뻔뻔스레 들고 있는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이런 짓거리를 벌인 배경에 고상한이 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근거.”

“뭐라고요?”

“다른 곳도 아니고,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 수색을 하는 근거가 뭐냐고.”

강현의 말대로 다른 곳도 아닌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사건 자료와 의뢰인의 비밀이 보관되어있는 사무실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압수 수색을 할 수는 없었다.

특히 변호사는 변호사법에 의거. 의뢰인과의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에 더더욱.

변호사 사무실이 압수 수색을 당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변호사로서의 신뢰와 K 법무법인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서정연이 보란 듯이 사람들을 이끌고 사무실을 급습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법원에서 변호사 사무실 압수 수색 명령을 내렸다면 그 근거가 있을 거 아냐?”

“증거 인멸, 조작 및 검찰 내부 문건 유출이에요.”

“내부 문건 유출이라. 무슨 문건?”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고.”

“내 사무실을 고스란히 내어주게 생겼는데, 내가 알 필요가 없다? 변호사를 떠나 국민의 알 권리 따위는 개나 줘라? 아무리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지만,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강현의 일침에 서정연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서정연은 살을 에는 듯한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검찰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단단히 마음먹은 것과는 별개로, 눈앞의 상대는 류강현이었다.


“서정연 검사, 당신이야말로 지금 제정신입니까?!”

강현의 집무실 문 앞을 막고 선 이들을 파헤치고 끼어든 이는 장철호 실장이었다. 아래층에 있다 소식을 전해 듣고 부리나케 뛰어온 모양이었다.


“아니, 하다 하다 이런 싹수도 경우도 없는 일은 이 일 하면서 처음이네.”

장철호는 강현의 옆에 떡하니 서서 서정연의 뒤에 선 검찰 수사관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나같이 장철호가 아는 인물들이었다.


“알 만한 사람들이 보란 듯이 우르르 몰려와서 뭐 하는 짓들이야?!”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 장철호의 목소리가 복도를 넘나들었다.


“아무리 요즘 공무원들 사명감이 바닥을 찍는다지만, 다들 쉬쉬하고 있는 그 사건에 대해 일말의 양심도 수치심도 없어?”

강현을 볼 낯이 없었던 수사관들은 장철호의 원성 앞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서정연 검사. 당신이 제일 질이 나빠. 어디 팔아먹을 게 없어서 자기 사수를 팔아먹어요?”

“관련 없는 사람은 빠지세요!”

서정연 검사의 행태에 안 그래도 이를 갈고 있던 장철호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식으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내가 왜 관련이 없어요?! 나 이제 검찰청 사람 아니고, K 법무법인 사람입니다! 내가 당신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고!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제대로 된 검사들 얼굴에 먹칠이나 하고. 당신 이러는 거 후배 검사들도 알아요?”

“잘 모르시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지 않다면. 거기서 더 입을 놀렸다간 모욕죄까지 추가해서-.”

검찰 식구들을 대동하고 온 만큼 서정연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아니지. 고소는 내가 해야지. 서정연 검사.”

가만히 입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던 강현이 그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거 다 받고 허위사실 유포에 공무원 품위유지 위반 등 걸고넘어질 것들이 태반인데, 내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주니 만만해 보였나?”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도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니까.”

“서정연. 내 밑에 1년 반 동안 있으면서 배운 게 하나도 없어?”

“…….”

“헐값에 팔아먹었으면 제대로 삼키기라도 했어야지. 도로 게워내게 생겼네.”

강현의 비틀린 입매에서 조소가 새어 나왔다.


“이참에 검사 때려치우고 변호사 할 거면 제대로 배워.”

더는 그녀와 말장난을 주고받을 가치조차 없다는 듯 강현이 서정연을 지나쳐 뒤쪽에 있는 수사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압수해야 할 대상이 뭡니까? 핸드폰, 컴퓨터, 태블릿 PC, 서면 자료 등은 당연히 못 드리고.”

그래도 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해 봐.

강현의 검은 눈동자 위로 살벌한 기운이 머물렀다.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는 즉시 비밀 유지권 침해에 의거 돌아가시는 길, 손에 고소장 하나씩 쥐고 가실 겁니다.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말해주시죠. USB에 담아 줄 테니.”

강현이 검지를 세워 수사관이 들고 있는 파란색 상자를 콕, 찍었다.


“할 일이 없으면, 상자나 접으세요. 쓸데없이 커서 걸리적거리니까.”

쓸모도 없는 커다란 상자를 몇 개씩이나 들고 있는 사실이 민망할 지경이었다.

수사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상자를 접으려는 그때, 또 다른 노성이 복도를 갈랐다.


“이게 뭣들 하는 짓이야?!”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K 법무법인의 수장, 기장수였다.

그의 등장으로 수군대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복도의 벽 쪽으로 붙어섰다.

갈라진 길을 따라 걸어 온 기장수가 서정연에게서 영장을 휙 낚아챘다.

기장수를 처음 본 서정연은 그의 풍채에 한 번, 노련한 눈빛에 한 번 더 놀랐다.


“요즘 검사란 것들은 예의도 없고, 상도덕도 없나?”

영장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기장수가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 쳤다.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잠시 당황했던 서정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저희는 정당한 권리로 영장을 청구했고, 발부받았습니다. 법원에서도 영장 발부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인정해-.”

“이딴 내용으로 압수 수색 영장이 나오다니, 재판부 기강이 매우 해이해졌나 보군.”

서정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장수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라 냈다.

그는 노기에 찬 눈동자로 서정연을 훑어내린 뒤 끌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있던 김정한 비서에게 전화를 연결하라 지시했다.

상대측이 전화를 받자, 김정한이 기장수에게 공손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날세.”

전화를 이어받은 그가 실망스러운 어조로 통화 너머의 상대를 질책했다.


“오늘 우리 법인 변호사가 죄명도, 압수 수색 물품도 제대로 기재가 안 된 영장을 받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전화를 받은 상대가 뭔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자, 기장수가 눈썹을 와락 구겼다.


“그런 핑계를 들어주려 전화를 건 게 아닐세. 딱 봐도 사법 행정권 남용사례인데 인가를 해준 것 자체가 잘못이지.”

그러고는 재고를 해볼 여지도 주지 않았다.


“이 영장을 발부한 재판장을 업무태만 및 직무 유기로 고발하고, 정식으로 변호사 협회와 논의해 성명문을 발표하겠네.”

한때 대법원 판사로 많은 법조인들의 존경을 받던 이가 바로 기장수였다.

여당, 야당 가릴 거 없이 들어온 의원직 제의도 마다하고 변호사의 길을 택한 그는, 편법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K 법무법인을 국내 10대 대형 로펌의 반열로 이끈 명장이었다.

전화를 끊은 기장수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영장을 서정연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어붙였다.


“재판부뿐 아니라 검찰 측도 이번 일에 대해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겁니다. 그럼 하던 일 마저 수고하시고, 류강현 변호사는 일 처리가 끝나는 대로 내 방으로 오게.”

기장수가 강현의 집무실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는 강현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공손했다.


“네. 네. 하, 하지만! 이미 고 부장님께서-.”

그 순간 화가 잔뜩 난 고성이 전화기 너머로 터졌다.

서정연은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상대의 음성이 새어 나갈까 막은 채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향해 연신 굽신거렸다.

말을 다 전하기도 전에 끊어진 전화를 붙든 서정연의 얼굴은 짙은 낭패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쩔쩔매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이 떨어진 듯 보였다.

무리까지 해서 이끌고 온 수사관들을 볼 면목도, 검사로서의 체면도 무참히 짓밟힌 셈이었다.


“서정연 검사.”

푹 숙어진 머리 위로 강현의 써늘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욕심이 많은 건 좋은데, 적어도 남들 앞에선 부끄럽진 않아야 하지 않겠어?”

압수 수색 영장이 서정연의 손 안에서 와락, 구겨져 부들부들 떨렸다.

강현에겐 그녀의 사정을 배려해 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적어도 노력이란 걸 하든가.”

그리고 받은 것은 몇 배로 되갚아주는 타입의 강현은 이 사태를 초래한 이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꽤 많은 세금을 내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공무원이면 공무원답게 도덕성과 ‘윤리’라는 걸 가슴에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

“아, 그리고.”

서정연에게 가까이 다가온 강현이 날카롭게 벼려 둔 비수를 조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 그녀의 귓가에 꽂아 넣었다.


“빽을 뭐로 얻었나 했는데, 그게 머리나 능력이 아닌 건 확실하군.”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운 그의 입가엔 비틀린 냉소가 서려 있었다.

서정연은 패배감을 넘어 지독한 모멸감까지 느껴야 했다.

결국, 얻는 것 없이 자존심만 너덜너덜해진 채로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후 강현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기장수가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자신의 방으로 오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기장수가 강현에게 독대를 청하는 일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대면 보고 자리를 먼저 파한 이는 기장수 대표였지만, 서운하다거나 원망스럽다 생각진 않았다.

애당초 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강현의 예상 안에 포함된 상황이었다.

어차피 정기 보고는 그의 비서인 김정한을 통해 서류와 간략한 내용을 주고받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니.

자신을 대하는 기장수 대표의 태도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제게 불이익을 주거나 일 처리 방식을 문제 삼진 않았다.

그저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탐탁지 않음을 드러낼 뿐.

그런 점은 세나와 똑 닮아 있었다. 강현은 오히려 고작 그 정도만 표해줘서 감사하다 여겼다.

재킷을 걸치고 소매 끝을 정리한 강현이 집무실을 나서기 전, 제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저를 찾아온 윤모연을 떠올렸다.

마침 외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그녀의 말에 강현은 다급히 뛰어갔다.

이상하게도 강현에겐 기 대표보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윤모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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