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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광견병 걸린 미친개 (114/120)


114화. 광견병 걸린 미친개
2022.08.02.



 
새빨간 불씨가 제법 오랜 시간 타들어 갔다. 깊게 빨아들인 만큼 내뿜어진 연기도 짙었다.


“류강현 변호사.”

“…….”

“류 프로보다 변호사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군.”

강현을 일별한 고상한은 담배 한 대를 다 피울 동안 그를 가만히 세워두었다.

틱, 틱. 손가락 스냅에 불똥이 튕기고, 그가 꽁초가 된 담배를 바닥으로 툭 던졌다.


“어때? 먹고 살 만한가? 사건이 필요하진 않고?”

“괜찮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바빠서.”

“그럼 변호사 짓만 하고 살면 되지, 왜 아직도 본인이 검사인 줄 착각하고 살아?”

고상한이 강현을 향해 눈썹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의 구둣발 아래 담배꽁초가 짓이겨졌다.


“이 일에서 손 떼.”

이 일이라 하면 포괄적으로 대호 그룹 일일 것이고, 그 안에 황유라와 채성민의 일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변호사 윤리 장전 제 19조에는 ‘변호사는 의뢰인이나 사건의 내용이 사회 일반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수임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조항이 있습니다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그럼 무슨 이유로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겁니까? 설마 제 처지가 걱정돼서 그러시는 건 아니실 테고.”

“쓸데없는 일로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는 말이야.”

시간 낭비란 지금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명령입니까?”

“경고야.”

“경고라…….”

강현이 입안에서 그 단어를 나직이 덧그렸다. 정말이지. 헛웃음이 절로 지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전 심리에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로 시간만 잡아먹던 검사나, 고상한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사사건건 부딪치면 피차 피곤해질 텐데, 알아서 잘 뭉개줄 테니 손 떼라는 거야.”

“뭘 어떻게 뭉개주실 겁니까?”

“…….”

검찰 조직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윗선으로 명령하면 아랫선은 군말 없이 따른다. 그래서 굳이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조직에 오래 몸을 담고 있는 고상한에게 류강현은 모난 돌이자, 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임이 분명했다.


“부장님이야말로 이쯤 하시죠.”

“뭐야?!”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별명이 뭔 줄 아십니까?”

비스듬하게 기울인 입매와는 다르게 강현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광견병 걸린 미친개.”

강현을 노려보는 고상한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누가 저를 그렇게 부르던데……. 전 그 별명이 퍽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래서.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건가?”

“못해볼 건 또 뭐 있습니까?”

“고작 변호사 주제에 기어이 검찰 내부를 들쑤시겠다?”

“잘 아시다시피 제가 변호사가 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아서, 제 주제가 어디까지 될지 아직 잘 파악이 안 돼서 말입니다.”

“이 바닥에 있는 한 계속해서 얼굴 보고 살게 될 텐데,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싶은가 보군.”

“고 부장님, 부장님은 배신자의 뜻부터 제대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애당초 그들은 제게 믿음도 의리도 준 적이 없으니 저 역시 지켜야 할 의리 따위는 없는 조직이 바로 검찰이라는 집단이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해. 더는 후회할 짓 하지 마. 이건 선배로서의 충고야.”

“하실 말씀이 그게 다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류강현!”

강현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훌쩍 지나있었다.

관료주의에 빠진 인간을 상대로 열을 내봐야 저만 손해다. 어차피 들이받기로 한 이상 서로가 지향하는 방향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강현이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먼저 돌아섰다.

한때 자신의 선임이었던 고상한 부장검사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법원에서 돌아온 강현이 세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바빠?”

“오전에 상담 두 개 끝냈고, 지금은 블로그 글 읽으면서 휴식 중. 들어와요.”

세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강현을 맞이했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네. 오늘 기분 되게 좋아요.”

“왜?”

“이거. 이거 봐봐요.”

세나가 자신의 책상 쪽으로 강현을 불렀다. 그러고는 그가 볼 수 있게 노트북의 방향을 돌려주었다.

그녀가 보여 준 것은 빼곡한 글씨가 가득한 누군가의 글이었다.

‘기세나 변호사님께’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은 일전 세나가 맡아주었던 사건이 잘 해결됐음을 알리며, 몇 번이고 그녀를 자신의 은인이라 칭하며 감사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오정자 씨, 결국 패소했어요. 남편분 보험료랑 퇴직금 전부 김주희 씨한테로 귀속됐거든요. 다행이죠?”

법원은 죽은 남편과 김주희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 유산 상속 1순위로 김주희와 배 속 아이의 편을 들어줬다.


“이제 반환 소송을 걸어야 해요. 멋대로 가져간 퇴직금 토해내라고. 아마 진작에 다 쓰고 없겠지만. 그 여자한테 한 푼도 주고 싶지 않아요. 선배 얼굴에 상처도 냈고, 남의 회사까지 찾아와서 그런 패악을 떨었는데.”

강현의 뺨에 난 상처야 이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지만, 이따금 그 흔적이 세나의 눈에는 밟혔다. 괜히 저 때문에 생기지 않아도 될 상처만 생겼다.


“아직도 생각하면 치가 떨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채로 손을 들어 올렸다. 강현은 그녀의 손끝에 제 얼굴이 닿을 수 있도록 허리를 살짝 숙여주었다.


“이 잘생긴 얼굴이 험악하게 보일 뻔했잖아요. 뭐 그랬다면 성형을 해서라도 지워줬을 거지만. 그건 그거대로 마음 아프니까.”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세나는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강현의 뺨을 어루만졌다. 살살거리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큰일 날 뻔했지. 얼굴 뜯어 먹고 사는 사람인데.”

“맞아. 얼굴 말곤 볼 거 없는데.”

“정말?”

“뭐가요?”

“나 정말 얼굴 말고는 볼 거 없어?”

“어?”

익숙하게 주고받던 티키타카인데 돌연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되물어 오는 바람에 세나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강현이 제 뺨에서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는 손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짜릿한 전율이 손끝에서부터 흘러들어 세나의 심장을 저릿하게 움켜쥐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표정을 빠듯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강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 잘한다며. 그래서 질투했었잖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별로야?”

새카만 눈동자가 요요히 빛을 발했다.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발가락 끝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오금이 간질간질했다.

세나가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내려 힘을 주자 강현이 그것보다 조금 더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조였다.


“서. 선배! 여기 지금 제 사무실이잖아요……!”

“알아. 그래서. 뭐 또 여긴 회사고 넌 변호사고, 그런 천편일률적인 말을 할 건 아니고.”

“이, 일단 손 좀 놔줘요…….”

“싫어.”

“누가 지나다 보면 어쩌려고요!”

“보라지. 이미 사내에 소문 다 났어. 한여진 변호사 입이 좀 가벼워야지.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는 중이야.”

세나가 곤란한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블라인드가 올라간 복도 쪽 창도 보고, 능청스럽게 웃고만 있는 강현도 보고.

그가 억지를 부릴 때면, 달래줄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세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현의 입술에 가볍게 쪽, 뽀뽀를 날린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습공격에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강현은 눈을 살짝 키운 채로 미동도 없었다. 세나가 별거 아니란 식으로 시침을 뚝 떼었다.


“방금, 뭐야?”

“왜요? 나라고 못 할 줄 알았어요?”

“하! 학습 능력이 이 정도까지 뛰어날 줄은 몰랐는데…….”

한 방 제대로 먹은 강현이 허공에 떠 있던 손을 거둬 턱 주변을 쓸어내렸다.


“기세나 지금 바빠?”

“딱히? 왜요? 차 한잔할래요? 안 그래도 김 비서님이 선물로 준 홍차가-.”

“그럼 나랑 어디 좀 갈까?”

“어디요?”

“여기서 제일 가까운 호텔.”

“…….”

“농담 아니고 내가 지금 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 거 같은데?”

그러면서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그의 입꼬리가 전보다 더 짓궂게 올라서 있었다.


“이 남자가 진짜 미쳤나 봐! 당장 나가요! 안 바빠요?”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세나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투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현의 앞에서 그녀는 제 속내를 감출 줄 몰랐다.

그래서 더.


“이것도 학습이 될까 해서.”

자꾸만 놀려주고 싶어진다.

강현은 세나와 함께일 때면 늘, 십 대 때도 느끼지 못했던 장난기가 어디선가 줄줄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그 후로 강현은 자신을 방에서 내쫓으려 혈안이 된 세나를 어르고 달래서야 겨우 차 한잔 얻어먹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주어도 없이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강현은 그 속뜻을 금방 이해했다.


“기각됐어. 불구속 수사로 전환될 테니 곧 연락이 오겠지.”

“다행이네요.”

그녀는 그날 이후, 채성민과의 일을 묻지 않았다.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강현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한 것인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심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선배가 하겠다고 할 줄 몰랐는데, 의외였어요. 그대로 내쫓아버릴 줄 알았거든요.”

“뭐. 처음엔 그러려고 했지.”

“하긴. 사이가 어떻든 아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마냥 모른 척하기도 좀 그렇죠. 선배는 어떨 때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베어버릴 것 같다가도, 막상 손 내미는 사람을 쳐내진 못하는 것 같아요.”

“내가?”

“아닌 척하지만, 선배는 좋은 사람이에요. 딱 손해 보기 좋은 타입.”

강현은 찻잎이 향긋하게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손해를 보는 타입이라. 단언컨대 그건 아주 틀린 말이었다.

채성민이 강현에게 거래의 대가로 넘긴 자료는, 그가 여태껏 모았던 어느 자료보다 더 큰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열쇠였다.

강현은 저에 대한 오답을 당당히 써 내려가는 세나에게 딱히 그건 아니다, 정정해주진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제겐 감지덕지한 일이니까.

어차피 기세나에게만큼은 손해를 보더라도 상관없기도 하고.


“성민 선배는 결국 증거인멸죄로 실형을 받게 되겠죠?”

증거인멸죄를 범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백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심지어 단순한 사건이 아닌 살인사건이었다.

그것도 전직 장관의 아들이 피해자인.


“아직 몰라. 저쪽에선 사건을 뭉개려고 안달이 나 있으니. 두고 봐야지.”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되나 봐요. 어떻게 그런 일을 평생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 무섭지도 않았을까요? 나라면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을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니 그렇지. 세상엔 의외로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넘쳐 나.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이 벌어먹고 사는 거고.”

어쩐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강현과 세나는 한동안 말없이 아치형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였다.

***

채성민 사건의 1심 공판 날짜가 잡혔다.

강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 기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채성민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기껏 머리를 굴렸을 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군. 죄다 쓸모가 없는 내용이니.”

강현이 가지고 있는 황유라의 자백이 증거로서 인정이 될지 어떨지는 재판부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검찰은 불법 녹취를 핑계로 증거로서의 가치를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강현은 상대방의 동의는 없었지만, 다른 이의 대화를 불법 녹취한 게 아닌,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대화를 녹취한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어필해 증거로 인정해 달라 반박할 생각이었다.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잠시 숨을 돌릴 때였다.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의 발걸음 소리와 실랑이를 담은 고성이 여과 없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상황을 살피려 몸을 일으키던 그때, 강현의 집무실 문이 허락도 없이 벌컥 열렸다.


“중앙지검에서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그의 집무실로 당당히 걸음 한 서정연은 법원의 인장이 찍힌 압수수색 영장을 강현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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