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결자해지(結者解之) (113/120)


113화. 결자해지(結者解之)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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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오물이 덕지덕지 붙은 것이라도 갖고 싶었다.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손끝에 피가 흐르고 너덜너덜해져도, 원하는 위치에 오르기만 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건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욕망을 따라 달리는 길엔 언제나 악몽이 따라붙었다.

이제 겨우 그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 날 수 있으려나 했는데, 눈을 떠보니 지옥인 건 매한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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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너를……. 류강현이 아니라 내가 먼저 널 만났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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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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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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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뭐든 난 이제 선배 말 안 들어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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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하네. 어차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제대로 된 말도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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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차 한 잔 줄 테니 몸부터 녹여요.”

돌아서는 세나의 뒷모습을 보며 채성민은 쓰디쓴 숨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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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보지 못하는 걸 그 새끼는 언제나 먼저 발견하곤 했지…….”

짙은 후회 속에 웅얼대는 말은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나부꼈다.

삑삑삑-삑삑.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조급했다. 한 번에 열리지 못하고 덜컥, 처음부터 다시 제 음에 맞게 눌렸다.

벌컥 열린 현관문과 함께 성큼성큼, 구둣발로 거실을 밟은 강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혹시나 세나에 채성민이 무슨 짓을 하진 않았을까,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머리털이 삐쭉 섰다.

로펌에서 집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궂은 날씨 탓에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강현은 피가 마른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몸소 체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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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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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왜 또 젖었어요?”

부엌에서 머그잔을 들고나오던 세나가 강현을 발견하고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강현은 소파에 앉아있는 채성민을 일별한 뒤 곧장 찾는 이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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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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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요. 난 괜찮으니까. 근데 숨은 왜 이렇게 거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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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가, 내려오질,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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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여기가 몇 층인데 계단으로 올라왔어요?!”

끊어지는 음절마다 호흡이 거칠게 튀고, 옆구리가 쪼이는 통증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사하다는 걸 1분 1초라도 빨리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 그럴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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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전화 와요. 선배.”

강현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아까부터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음이 꾸준히 울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자 관리실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차를 갓길에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무작정 뛰어 올라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이렇게 세워두시고 어딜 가셨냐, 얼른 옮겨달라는 관리인의 요청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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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제가 아니라 선배를 보러온 거니까. 키 주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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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차에, 차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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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를 두고 내렸다고요? 누가 훔쳐 가면 어쩌려고. 이 남자가 겁도 없이!”

아까부터 어수선하게 구는 게, 강현은 꼭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채성민이 찾아왔다는 문자 한 통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구나 짐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캐묻는 것보단 자신이 빠져주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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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얘기 끝나면 연락 줘요. 밖에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세나는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단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운 것뿐인데, 집안의 공기가 한기에 잠식된 듯 써늘하게 가라앉았다.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이 빠듯하게 이어졌다.

두 눈이 빡빡해질 정도로 탐색전이 오가는 동안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 적막한 거실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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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류강현이 그런 얼굴도 할 줄도 알고…….”

한참 만에야 먼저 입을 연 것은 채성민이었다. 비틀린 입술을 뚫고 툭 뱉어진 말씨엔 악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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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하는 모습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의외로운 곳에서 보네. 역시 네 약점은 기세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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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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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는데, 알면서도 무리수를 뒀지. 난 옛날부터 네가 싫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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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 와 사과라도 하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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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말은 죄를 뉘우칠 때나 하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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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뭔갈 바라고 찾아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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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대로 찾아왔어.”

소파에 앉아있던 채성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강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어깨에 걸쳐진 젖은 수건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 수건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강현의 바로 앞에 마주 선 채성민이 물기 어린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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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벌인 설계자랑 거래하러 왔거든.”

그 눈동자는 더 이상 허공을 응시하던 맥 빠진 눈동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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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 하나 죽이자고 이런 짓거릴 벌인 건 아닐 거 아냐?”

분노와 복수로 점철된 칼날이 검은 눈동자 안에 또렷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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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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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야. 네가 가장 잘하는 거잖아?”

잔뜩 좁아진 미간과 짙은 눈썹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일그러졌다.

상대의 패가 무엇인지 가늠하는 강현의 눈빛은 매서웠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섣불리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상품을 들이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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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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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필요해.”

강현이 피식,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채성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이 단박에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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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끌려가기 싫어서 나한테 찾아온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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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살인사건. 네가 장관에게 그 자료를 넘겨줬다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그런데 넌 어디까지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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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네가 누굴 죽이고도 웃을 수 있는 핵폐기물급은 아니라는 거. 넌 그냥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쓰레기지. 가만히 두기엔 거슬리는.”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채성민이 고개를 떨구었다. 바닥을 향한 고개가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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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 후하네.”

모멸감을 느끼고 치욕스러운 감정에 휘둘릴 여유 따위는 없다.

이미 만성적으로 무뎌진 사치스러운 감정일 뿐이었다.

채성민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강현을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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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그룹의 비리 파일.”

어차피 개처럼 굴러온 인생인데, 마지막 남은 오기로 자존심 한 번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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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네가 찾는 것도 있지.”

더 해보라는 듯 강현이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일단 구미가 당길 만한 상품인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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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그룹 황유찬 전무와 고상한 검사의 커넥션.”

일자로 다물렸던 강현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서며 두 눈에 날렵한 이채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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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거래가 성립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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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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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뭘 걸 건데?”

강현이 핸드폰을 들고 음성파일 하나를 재생시켰다.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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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사건, 진범의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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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민은 그길로 경찰서를 방문했다.

7년 전 한인 유학생 살인사건에 대한 양심고백. 그리고 자수였다.

의혹이 난무하는 사건에서의 관련자 등장은, 대중들의 관심도가 높았던 만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채성민은 ‘증거인멸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증거인멸죄가 성립되면, 그 배후에 황유라가 있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하고 뭉개보려 했던 검찰 측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법원 앞 계단을 내려가던 장철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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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 하더니. 난리도 아니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영장 실질 심사는 보통 한두 시간 안에 판결 난다.

그러나 검찰 측에서는 사사건건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트집 잡아 시간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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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를 뒤집어씌우려면 구속 수사하는 게 편할 테니, 되는 대로 던져보는 거죠.”

그러나 판사는 구속영장을 기각, 불구속 수사 원칙을 고수했다.

범죄의 중대성은 높으나,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강현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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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죄 여부가 불확실하므로 구속 상태로 수사해야 한다는 말이 당최 뭔 말이랍니까.”

조금 전 영장 실질 심사에서 판사의 강경한 태도에 검사가 던진 말이었다.

검사는 사건의 명확성을 먼저 파악하고 기소를 준비해야 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게 있는데, 일단 잡아두고 보자는 식의 수사를 재판부가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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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불확실한데 구속수사라니. 씨알도 안 먹힐 헛소리를 멀쩡한 얼굴로 내뱉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아무리 초임 검사라지만, 기본이 안 돼 있으니 미래가 참담하네요.”

장철호가 혀를 끌끌 찼다. 강현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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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류 변호사님, 정말 채 팀장 일 봐주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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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거래는 거래니까요. 그가 의외의 복병이 되어 줄 줄은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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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계획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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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 템포 쉬어 가시죠. 어차피 재판 잡힐 때까지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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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강현 변호사.”

계단을 다 내려설 때쯤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강현과 장철호 실장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뒤를 돌아보자 층계참에 요요히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리 멀리 떨어진 위치가 아니었기에 강현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강현의 옆에 서 있던 장철호 역시 남자를 알아보고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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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랑 얘기 좀 하지.”

남자는 한 손을 바지춤에 찔러 넣은 채 계단을 내려왔다.

안 그래도 올려다봐야 하는 게 불쾌했는데 알아서 내려와 주시니, 강현은 남자에게 가벼운 묵례로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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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고상한 부장검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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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가 되더니 겉모습에 힘이 바짝 들어갔군.”

강현을 위아래로 훑어내리는 눈빛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강현의 옆에 서 있는 장철호를 힐끔인 다음 인사 대신 얕은 코웃음을 쳤다.

장철호 역시 고상한과 익히 아는 사이였지만, 다정히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기에 무시로 일관했다.

같은 적을 두고 있을 때도, 척을 지게 된 지금도, 그리 유쾌한 기억은 없었다.

장철호는 고상한을 두고 교활한 인간상의 표본이라 칭했다. 강현 또한 그의 말에 공감을 표했으니 말 다 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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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가 있을 테니 얘기 끝나면 오세요.”

서로가 말없이 불편한 시선을 주고받는 사이 장철호가 먼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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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시건방지단 말이야, 저 친구. 아랫사람이면서 먼저 숙이는 걸 보기 힘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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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엄연히 따지자면 아랫사람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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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취향 한번 한결같군.”

강현은 그와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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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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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고상한은 강현이 대답도 하기 전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직도 강현을 자기 부하라고 생각하는지, 강압적인 행동에 절로 실소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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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도 상대가 같은 그룹에 있을 때나 먹히지, 지금 저와 무슨 대단한 사이라고.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시나 봅니다. 부장님.”

강현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만약 이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버리면, 저 고고한 인간의 낯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하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고상한이 제게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 그에게 해줄 말이 있었으니까.

강현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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