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밑바닥보다 더한 밑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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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밑바닥보다 더한 밑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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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밑바닥보다 더한 밑바닥
2022.07.26.
이른 아침 미팅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강현은 책상에 앉기 무섭게 장철호 실장이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동영상 링크와 뉴스 기사 링크, 그리고 커뮤니티의 반응 등이 간략하게 요약된 메일이었다.
압수수색과 검찰 소환조사에도 황유라와 관련된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도대체 뻔히 증거를 앞에 두고 번번이 추가자료를 요구하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입니다. 결국 이렇게 가다 기소 유예나 추징금 얼마로 끝날 것 같은데…….”
“믿는 구석이 없이 그런 짓을 벌였을 리가 없겠죠. 약물에 들어간 재료를 수급하는 제약사는 찾았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향정신성 관련 약물을 취급하는 제약사가 몇 있긴 한데, 외국기업이라 조사가 쉽지 않네요.”
“일단 황유라 측근 리스트에서 병원 관련 일을 하는 인간들부터 전수조사해 보시죠. 뭐 하나 나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박종찬이 이따금 전화를 걸어 상황에 대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의 울분이 가득한 말을 듣는 강현은 사건을 물어다 준 사람치고 덤덤했다.
재벌 2세의 은밀한 일탈로 이슈몰이를 하다 결국엔 집행유예, 벌금, 추징금 얼마로 잊힐 사건.
앞다투어 기사를 띄워대던 언론들도 대중들의 관심이 멀어지자, 점차 다른 기삿거리들로 메인을 장식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사람들 머릿속에서 황유라의 사건이 점차 희미해져 갈 무렵.
술에 물 탄 듯 밍밍해져 가는 분위기 속 새로운 판의 시작을 알린 것은 뉴스 프로가 아니었다.
주말 저녁 늦은 밤에 방영되는 한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강현은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동영상 링크를 클릭했다.
시사 프로 사회자의 덤덤한 내레이션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7년 전 뉴욕 맨해튼 호텔에서 일어난 한인 유학생 살인사건’
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는 강현의 입매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정치판에서 놀던 분이라 그런가, 배포가 남다르시네.”
의혹으로 마무리된 내용이 기정사실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유라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싸질러놨던 온갖 갑질과 패악들이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 까발려지고, 거세진 불길은 대호 그룹으로 번져갔다.
잠시 멀어졌던 여론의 눈초리가 다시 매섭게 치켜세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강현은 자신이 설계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들을 관망하며 노를 저을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딱, 하나만 더.
황유라는 그저 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강현이 진짜로 사냥하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이름만큼이나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어디에 뭘 흘렸을까?”
톡. 톡. 톡.
집무실 책상을 두드리는 손끝의 리듬에 맞춰 강현의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장마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풍 소식이 이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세나는 일찌감치 퇴근했다.
물론 제집이 아닌 강현의 집으로였다.
내일은 달력에도 빨간색으로 표시된 법정공휴일이었다.
최근 들어 더욱 바빠진 강현과 이렇다 할 데이트도 못 했는데, 모처럼 평일과 겹친 휴일이었다.
태풍 때문에 근교로 나들이를 가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맥주와 치킨을 먹기로 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세나가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비도 오니까 역시 스릴러겠지……?”
최신 영화부터 옛날 영화까지 주르륵 나열된 화면이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몇 년간 영화는커녕 문화생활도 안 한 강현일 게 뻔하니 영화를 고르는 것도 세나의 몫이었다.
화면에 뜬 영화 속 간략 줄거리를 읽어내리는 눈동자가 신중했다.
그렇게 강현이 좋아할 만한 범죄스릴러물 영화로 골라두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치킨은 선배가 사 오기로 했고. 맥주는 내가 샀고. 또 뭘 해야 하나?”
늦어지는 강현의 퇴근을 기다리던 세나가 슬슬 지루함을 느껴갈 때쯤,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세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밤이 깊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올 리가…….
“누구세요?”
현관 앞에 서서 목청을 키웠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강현이 늦어지는 퇴근에 치킨을 먼저 보낸 게 아닐까, 싶어 현관 외시경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쿵!’ 현관문이 울렸다.
큰 소리에 놀란 세나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곧이어 누군가 주먹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연달아 쿵, 쿵, 내려찍었다.
여차하면 신고할 요량으로 핸드폰에 112번을 입력한 세나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누구신데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가세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예요!”
잠시 이어진 대치 끝에 상대가 내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현의 집을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채성민이었다.
채성민을 다시 조우할지 몰랐던 세나는 적잖게 놀랐다. 그러나 외시경을 통해 확인한 그의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여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나는 강현에게 상황을 전한 뒤 문을 열었다.
센서 등이 켜진 복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고요함 사이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파고들었다.
“선배가 여긴 왜…….”
무슨 일로 찾아왔냐는 물음은 그의 참담한 몰골을 확인 후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비가 이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우산의 흔적 따윈 없었다.
채성민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쉼 없이 떨어졌다. 그는 어깨부터 발끝까지 물에 빠진 사람처럼 홀딱 젖은 채였다.
내내 바닥을 향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빗물에 젖은 얼굴이 드러났다.
“……안녕. 오랜만이네.”
태평스럽게 건넨 인사와는 다르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는 꺼진 촛불에 피어오른 연기처럼 허공을 배회했다.
그간의 일로 살이 내렸는지 날이 선 턱 끝에 훔치지 못한 물방울이 맺혔다가 툭, 떨어졌다.
“들어가도 될까?”
태평한 인사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이어진 질문에 세나는 거절의 말을 찾다,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면 착각일까?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는 걸음을 따라 집 안으로 발자국이 이어졌다. 그러나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짙게 밴 물 냄새. 도대체 얼마나 오래 비를 맞고 서 있었던 걸까.
채성민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여기 수건. 좀 닦아요.”
채성민은 세나가 건네는 수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자조가 뒤엉킨 탄식을 끝으로 커다란 수건을 펼친 세나가 채성민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마지못해서 하는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저대로 물을 뚝뚝 흘리고 다니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네 행동이 가식인지, 위선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게 뭔가 됐든 상관없네.”
“…….”
“강현이가 잘해줘?”
어떤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채성민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을 뿐.
그녀의 손엔 여전히 112라는 숫자가 입력된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뭔가 해코지하러 온 건 아니니까.”
확실히 해코지하기엔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 선배랑 좋은 사이도 아니잖아요.”
“글쎄. 나를 여기까지 몰아세운 놈에게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나, 아니면 주먹이라도 휘두르려 했나…….”
웅크렸던 어깨를 힘겹게 세운 채성민이 그대로 소파에 등을 묻었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힌 그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멍했다.
7년 전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밑바닥까지 다 보았다고 생각했던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밑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황유라는 무슨 짓을 해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던 목줄을 이제 놔줄 테니 저를 살려달라 애원했다.
“네가 했다고 해줘. 그 장관 아들 죽인 거 내가 아니라, 네가. 네가 그랬다고.”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너도 다 알잖아! 이대로 갔다가 다 끝장이야!”
마약사범과 살인자는 엄연히 다르다.
검찰 윗선에서 그냥 덮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도 했지만, 상대가 전직 장관인지라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다 보상해줄게. 네가 했다고만 해주면……. 그래!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 줄게. 미국에 있는 콘도도, 아 맞다! 너 그 차 갖고 싶다고 했지?! 다 해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더, 나 좀 도와줘.”
여론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자 대호 그룹의 주가가 시종일관 하한가를 쳤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매 운동이 일었다.
문제는 투자금 회수였다.
“이대로 투자금 회수 조치가 들어가면 경영권도 흔들리고 그럼 계열사들 줄도산이야. 법무팀장인 네가 더 잘 알잖아?!”
“그걸 아는 애가 여태껏 그러고 살았어?”
냉소가 절로 터졌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애를 썼는데. 천하를 제 발아래 깔아 둔 것인 양 굴더니 이제 와 계열사 존폐를 들먹이는 게 가소로웠다.
“그래서 달려와 한다는 말이 고작 죄를 대신 뒤집어써달라고?”
“그렇게만 해주면 아빠가 최고의 변호사를 붙여주겠대. 전관예우 변호사로. 과실치사로 말 맞춰준다고 얘기 다 끝났어. 5년. 아니 3년만 살다 나오면 돼.”
“황유라! 정신 차려! 정말 모르겠어? 이미 다 끝났다고.”
“아니야!! 난 그냥……. 그래.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때도 난 네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잖아?!”
“……뭐?”
“네가 그러자고 했잖아! 네가!! 네가 다 망쳤어! 그러니까 돌려놔! 응? 채성민!”
“하……!”
잇새를 뚫고 미어져 나온 것은 울며 매달리는 황유라에 대한 조소였나,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나.
“성민 오빠!! 제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그날 일을 사실대로 밝히고 선처를 구하는 것뿐이야.”
채성민의 단호한 대답에 눈물로 이지러지던 황유라의 얼굴이 일순 괴기하게 뒤틀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돌연 어깨까지 흔들며, 큭큭 몸을 떨었다.
마스카라가 지워진 눈가 주변이 새까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표정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그만하자……. 실수였고, 우발적인 범죄였으니까. 또 약물에 취했었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했잖아. 채성민. 내가 다른 사람이랑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네가 배신감에 앙심을 품고 호텔로 찾아와 칼을 휘둘렀잖아. 기억 안 나?”
“뭐……?”
“그때 네가 한 말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채성민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가 제 입으로 황유라에게 뱉었던 말이었으니.
그날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저지른 짓은 몇 년이 지나도록 끊어 내지 못한 목줄이 되어 비루한 모가지에 걸려 있었으니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자를 어떻게 칼로 찔러 죽여?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난 약에 취해 의식도 없었던 상태였는데?”
저열한 인간들은 결국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키우던 개를 잡아먹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