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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관계의 고리 (111/120)


111화. 관계의 고리
2022.07.23.


장관의 집에서 나와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리길 수 분.

투둑투둑.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만큼이나 강현의 마음도 수런거렸다.

앞 유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와이퍼에 닦여나갔다 채워지길 반복하는 동안, 시야도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오직 제 할 일이 그거라는 듯 부지런히 물기를 지워내는 와이퍼를 멍하니 응시하던 강현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후우-.”

그가 긴 날숨을 뱉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관계.

부모와 자식이라는 특수성에서 오는 괴리감은 다소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강현은 굽어든 등만큼이나 비통하던 장관의 표정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한 번도 속해 본 적이 없는, 그저 어깨너머로만 알 수 있었던 그 관계의 고리가 남긴 회한 같은 것일까?


“‘사무치다’…….”

평소에 자주 쓰지 않는 단어가 미끄러지듯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장관의 모습이 딱 그랬다. 그가 가라앉는 기분을 털어내려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 신호음이 이어지도록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 하는데 전화를 안 받으실까, 우리 이 여사님은.”

연결되지 않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며칠 전 이순옥 여사와의 대화를 더듬었다.

무료한 병원 생활. 병실 사람들과 드라마 보며 수다를 떠는 게 그녀의 낙이라고 했다.

일하던 중간중간 이 여사와 통화를 할 때면, 핸드폰을 스피커로 바꿔놓고 그녀가 들려주는 막장 같은 이야기를 라디오 삼아 듣곤 했다.

드라마에서 일어난 일들을 읊어대는 목소리는 백색 소음처럼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이따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중 너무 이해가 가지 않는 줄거리에 눈썹이 찌푸려진 적도 몇 번. 그러다 진지하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현실에도 막장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드라마까지 막장이면 어떡해?”


-“그러니까 더 재밌는 거지. 욕도 하고, 울기도 하고, 패악도 부리고, 벌도 받고. 하하 호호 행복하게만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그게 뭐 대수라고. 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이러쿵저러쿵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덧붙이며 대화를 이어가다 전화를 끊을 때쯤, ‘강현아.’ 하고 나긋하게 그를 불렀다.
 


“응?”


-“…….”


“불러놓고 왜 말이 없어?”

 
매번 ‘똥강아지’라고 부르던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자, 이상하게도 서류를 넘기던 손이 자연스럽게 멎었다.
 


-“바쁜 것도 좋은데,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여운에 잠긴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렸다.

전화 통화이기에 상대를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마치 이순옥 여사가 눈앞에 있는 듯 그녀의 표정이 한눈에 그려졌다.
 


-“살면서 못 해본 거 없이 다 하고 살아도, 죽을 때 눈 감을라치면 아쉬운 게 인생이란다. 무조건 후회를 하게 돼 있어.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최대한 미련 없이 살도록 해보렴.”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이, 입가에 드리운 잔잔한 미소가,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빛을 잃지 않는 눈동자가 저를 고요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응. 그럴게요.”

 
강현은 조금 늦은 호흡으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뭘 했더라.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뻔하지.”

당시 보고 있던 서류를 마저 읽고, 지시할 것들을 정리한 뒤 또 다른 사건을 들여다보았겠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랬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에 설정된 목적지는 서초동의 K 법무법인 빌딩이었다.

장관의 호출에 일부러 시간을 냈던 터라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펼쳐 둔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왜인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강현은 경로를 이탈했다, 목소리를 높이는 안내를 무시하고, GN 병원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일주일만의 방문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병실이 시끌벅적했다.

닫혀있는 문 너머로 왁자지껄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6인 병실이 이렇게까지 시끄러웠나……?”

살짝 굳은 표정의 강현이 병실 문을 열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광경은 병실이 아니라 동네 잔칫집 같은 모양새였다.

반듯하게 놓여있어야 할 침상들이 어수선하게 놓여있고, 환자, 보호자, 간병인 너나 할 거 없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

강현은 병실에서 마주하기엔 너무 생소한 분위기라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순옥 할머니 잘생긴 아들 왔네!”

그때 환자의 등받이를 매만져 주던 보호자가 먼저 그를 알은체했다.


“오늘따라 더 반갑네. 잘 지냈어요? 자주자주 좀 와.”

몇 번이고 이 병실을 오고 갔지만, 이렇게 저를 반갑게 맞아 준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얼떨떨한 상황을 잠시 뒤로한 채 이 여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우리 똥강아지 왔어?”

TV 근처 침상에 앉아있던 이순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링거대를 끌며 걸어왔다.


“온단 말도 없이 어쩐 일이야?”

“잠깐 밖에 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에…….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강현이 재킷을 벗으며 다시 한번 병실을 둘러보았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영 어색했다.


“그게 말이지-.”

이순옥이 자신의 침상에 궁둥이를 붙이며 말을 이으려는데, 다른 이가 먼저 불쑥 끼어들었다.


“아유, 며느리를 참 잘 뒀어. 어디서 그런 참한 아가씨를 만났을까?”

“이 여사 덕분에 모처럼 맛난 것도 얻어먹고 신이 나네, 신이 나.”

“아들 인물 보니 만날 만했구먼. 마누라한테 잘해야겠어요.”

강현이 저도 모르게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이 말하는 ‘며느리’와 ‘마누라’의 뜻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제게 무슨 마누라며, 이 여사의 며느리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저게 무슨 말이야?”

설명을 요구하는 강현의 눈빛을 읽은 이 여사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겸손은 손짓을 보였다.


“내가 초년에는 좀 박복했는데, 그 복이 말년에 다 들어 왔나 봐. 우리 며느리 예쁘죠?”

“예쁘다마다요! 나도 그런 살가운 며느리 있었으면 좋겠어. 내 나이 오십인데 이제라도 아들을 하나 더 낳아야 하나?”

“주책이야 다 늙어서~.”

그녀의 말에 다들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갔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에 강현이 이순옥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췄다.


“이 여사, 며느리가 있었어? 아들은 나 하나 아냐?”

그 답을 들려준 사람은 막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사람이었다.


“어, 선배! 오늘 중요한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회사에서도 봤는데, 여기서 보니 또 반갑다며 세나가 싱긋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여기 있어?”

놀란 것도 잠시,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강현은 미안한 마음에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 오늘 비도 오고 기분도 꿀꿀했는데, 여사님께서 파전이 드시고 싶다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냉큼 파전을 포장해왔죠.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러고 보니 병실 안에 고소한 냄새가 뭉근히 퍼져있었다.

6개의 침상 테이블엔 각각의 포장 용기가 올려져 있었는데, 내용물을 슬쩍 보니 그녀의 말대로 먹다 남은 전이 담겨있었다.


“비 오는 날엔 파전과 막걸리. 알죠? 국룰이잖아.”

강현의 눈동자가 종이컵에 담긴 옅은 상아색 액체로 향했다. 이에 이순옥이 종이컵을 냅다 들고 한 번에 꿀꺽 삼켰다.


“크, 취한다. 술맛이 다네. 달아.”

강현의 입술이 툭, 벌어지고 동공이 허망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세나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그냥 ‘아침햇님’이에요. 기분만 내려고. 여사님 짓궂으시네.”

이 여사의 손에서 종이컵을 뺏어 든 강현이 코를 박고 킁킁거리곤 안도의 숨을 뱉었다.


“하…….”

“세상에. 선배 이런 거에 속는 사람이었어요?”

이순옥과 세나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강현을 놀리기에 재미를 붙였다.

강현은 제가 사랑하는 두 여자가 재밌어하는 모습을 보며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동안 강현은 세나가 씻어 온 사과를 깎았다.

껍질이 얇게 깎아진 사과를 먹기 좋은 모양으로 잘라 빈 접시에 올려두자, 이순옥이 한 조각을 집어 세나에게 먼저 건넸다.

평소라면 제 입에 먼저 들어왔을 사과였지만, 그녀에게 먼저 가는 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진짜. 사과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깎을까요?”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저 혼자 어디서 배워왔는지 곧잘 하더라구.”

“안 그래도 제가 ‘나중에 우리 결혼하면 살림은 선배가 할래요?’ 하고 물어봤어요.”

“그러니 뭐래?”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대요. 여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잘하는 사람이 하면 좋지, 뭘.”

“그쵸?”

“자고로 결혼할 상대라면 내 눈에 눈물 안 나게 하는 놈으로 만나야 하는데, 저놈은 벌써 눈물 한 바가지 흘리게 했으니, 손에라도 물은 안 묻히게 해야지.”

“들었죠, 선배.”

그가 사과 한 쪽을 집어 들어 재잘거리는 입 안으로 쏙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달콤한 말을 무심히 내뱉는다.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줄 테니 내일이라도 시집오든가.”

세나는 강현이 손수 먹여준 사과 조각을 아삭아삭 씹어 삼킨 뒤 ‘흥.’ 하고 새초롬히 눈을 흘겼다.


“이 남자는 무슨 프러포즈를 반지도 없이 사과 한 조각으로 하지?”

“거절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니까.”

“고백도, 프러포즈도 순 날로 먹어. 날강도야, 뭐야…….”

곁에 두고 나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강현은 애간장이 녹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가 그녀의 표현 방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다.

언제나 당당하던 세나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릴 때면 그게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부끄러워서라는 걸.

***



“퇴근 안 하고 로펌으로 간다고요?”

세나는 동그랗게 솟은 눈썹을 하고는 반문했다.


“내일 재판에 쓸 자료 한 번만 더 확인해야 보려고.”

“지금 아홉 신데?”

손목시계를 확인한 세나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강현이 그런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히 귓가에 걸어주며 애석해했다.


“밥은 먹었어요?”

“대충. 이따가 배고프면 뭐라도 챙겨 먹지, 뭐.”

“장 실장님은요?”

“오늘 일찍 들어가셨어. 와이프가 먹덧이 왔대. 수원에서만 파는 만두가 있는데 먹고 싶다고 새벽부터 노래를 불렀다길래 가보시라고 했어.”

“아 맞다! 셋째 임신하셨다고 했죠? 고생 많으시겠다.”

세나가 장철호의 책상맡에 있는 그의 가족사진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가볍게 웃었다.


“어릴 때 제가 고집부릴 때면 아빠가 ‘너 나중에 시집가서 꼭 너 같은 딸 낳아라! 그래야 지금 내 맘을 알지! 어휴!’ 그랬는데.”

“그랬어?”

“근데 나 같은 딸 놓으면 좋은 거 아닌가? 똑똑하지, 이쁘지, 자기 밥벌이 알아서 척척하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요?”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세나를 앞에 두고 본 적도 없는 얼굴이 그려졌다.

빵빵한 볼이 발긋하고 동그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어린 여자아이.

참새 같은 지저귐으로 재잘재잘, 웃을 때 그녀를 닮은 듯하면서 저를 닮은 듯한 아이가.

이렇다 할 전조도 없이 뇌리를 스친 이미지에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뭐지? 왜 웃지?”

“별거 아니야.”

“뭔데요? 갑자기 왜 웃어요? 제 말이 틀렸다는 거예요? 어디가?”

병실에서 이 여사와 부쩍 친해진 세나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이유로 또다시 마음속이 술렁거렸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족이었다. 강현이 태어나 단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는.

강현이 한 걸음 내디뎌 세나를 품에 안았다. 조그만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그냥……. 좋아서. 다 좋아서.”

강현은 ‘사무친다’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됐다. 어쩐지 눈가가 시큰거렸다.

너와의 관계가 내게 너무 깊이 스며들어, 너와 내가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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